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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갈 때마다 먼저 찾는 곳이 분황사다. 정문에서 황룡사 터 쪽을 바라보는 즐거움과 그 뜻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다시 <삼국유사>(5권 2책, 국보 제306호, 국보 제306-2호) 관련 책 한권을 읽었다. 그 책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현암사)의 저자 고운기는 이런 글로 경주에서의 1박 2일 여정을 시작한다. 저자의 이와 같은 말을 빌려 지난 몇 년 동안 이와 같은 <삼국유사> 관련 책 몇 권을 읽은 그 감회와 각별함을 말하면.

"<삼국유사>를 대할 때마다 먼저 찾아 읽는 것은 '천수대비가(도천수관음가, 이하 생략)'와 '정수사구빙녀'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쓴 이유를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삼국유사>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그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감동스럽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겉그림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겉그림
ⓒ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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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김제 금산사 지척에 있다. 스무 살까지 금산사를 품어 안고 있는 모악산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았고, 금산사의 범종 소리를 들으며 자랐거니와 친정 부모님께서 살아계신 곳인지라 늘 그리운 곳이다. 그러니 금산사에 대한 추억은 애틋하고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지라 여행 관련 책을 대하면 으레 목차에서 금산사를 찾아 먼저 읽곤 한다. 누가 쓴 글이든 그리움과 반가움을 앞세워 우선 읽게 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금산사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삼국유사>속 금산사만큼은 늘 뒷전으로 둔다. <삼국유사>의 수많은 현장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천수대비가'의 현장인 분황사와 '정수사구빙녀'의 주인공 정수스님이 머물렀다는 황룡사(터)이기 때문이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 향가 14수를 기록했다. <균여전>에 수록된 11수와 함께 우리나라 향가의 유일한 흔적, 그 소중한 기록이다. 내가 각별한 마음으로 품고 사는 '천수대비가'도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향가 14수 중 하나다.

무릎이 헐도록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고 빌어 두노라 일천 개 손 일천 개 눈 하나를 덜어 둘 없는 내라 한 개사 적이 헐어 주시려는가 아, 나에게 끼치신다면 어디에 쓸 자비라고 큰 고-<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중에서

천수대비가 그 풀이다. 설명하자면, '자비하신 천수천안관자재보살님께 무릎이 헐고 두 손이 닳도록 빌고 비옵니다. 중생들의 고통을 헤아리는 당신의 천개의 눈 그 하나만 덜어 눈 먼 내 딸에게 베풀어, 내 딸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불쌍하고 가련한 내 딸에게 베풀 수 없는 자비라면(고통을 외면한다면), 당신의 자비가 아무리 크고 밝은들 자비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무슨 소용이리오.' 아마 이 정도쯤 될 것 같다.

신라 경덕왕 때. 경주 천기리라는 곳에 사는 한 여인의 다섯 살짜리 딸이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멀고 만다. 어미로써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며,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에 그 어미는 눈먼 딸의 손을 잡고 중생들의 고통을 헤아려 준다는 자비의 화신 '천수천안관자재보살' 즉, '관세음보살'이 모셔진 분황사에 가서 이처럼 애걸복걸한다.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며 빌고 또 빌며, 노래를 지어 딸에게도 부르게 하고 자신도 부르며 울며불며, 애원, 애원했다던가! 천개의 눈으로 중생들의 고통을 헤아려 천개의 손으로 중생들의 그 고통을 덜어준다는 자비하신 '천수천안관자재보살'께 말이다.

여인이 그때 지어 부른 노래가, 딸에게 부르게 한 노래가 천수대비가다. 오직 이 길밖에 없다는 절박함으로 눈먼 딸을 부여안고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울고불고 했을 그 당시 그 상황, 지레짐작만으로 목이 멘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읽어도 감동스럽고 그냥 와 닿는 그대로 읽어도 감동스럽다는 말뿐.

애장왕 때라면 9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이다. 저물어 가는 나라의 분위기가 여기저기 감지되고, 정치적으로는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때였다. (줄임) 정수는 황룡사 이 큰 절의 존재 없는 '일개 승려'였다. 조정에 나가 힘깨나 쓴다는 큰 스님이 즐비하고, 절 안 곳곳 방은 얼마나 많은지, 벌거숭이로 돌아와 거적때기 덮고 잠자리에 들어도 누구하나 알아차리질 못한다. 그런 처지에 벗어 준 옷 한 벌이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기독교의 성서에 나온다. 그러나 세태는 오른손이 하기도 전에 왼손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정수에게는 몰라줄 왼손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오른손이 했다.(줄임) 정수 스님은 제가 입은 옷 한 벌을 벗었다. 그것은 그의 재산 전부였다.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에서

신라 애장왕 때. 정수는 황룡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해 겨울 그리고 그 날 눈이 많이 왔다. 삼랑사에 갔다가 황룡사로 돌아가던 정수는 천암사 앞에서 아이를 낳은 후 다 죽어가는 거지여인을 보게 된다. 정수는 숨소리조차 희미한 여인을 오랫동안 끌어안아 자신의 체온으로 살린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고 벌거벗은 채 황룡사로 뛰어간다. 절에 갔지만 입을 옷 하나 없는 처지인지라 거적때기로 추운 겨울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국사의 일연스님(1206~1289)이 자신이 머물렀던 곳의 역사와 일화,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는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이다. 일연스님이 살았던 13세기는 혼란과 고통의 시대였다. 무신들의 권력다툼(무신정권,1170~1270)으로 나라는 혼란스러웠고, 30년 동안 계속된 몽골의 침략으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가 혼란스럽거나 전쟁이 나면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은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백성들이다. 고려의 백성들은 시도 때도 없이 번득이는 안팎(무신정권과 몽골침략)의 매서운 칼날에 구차한 목숨을 연명해야만 했으리라.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태반이었으리라. 와중에 가족들이 죽거나 흩어져, 집을 잃고 떠도는 유민들도 많았으리라.

국사 지위까지 올랐던 일연스님이다. 일연스님에게, 나라의 운명은 나 몰라라. 권력 싸움에 정신이 팔려 물고 뜯고 하다가 전쟁이 나자 자기들 살 궁리만 하면서 섬(강화도)으로 도망쳐 버린 당시 고려의 지배자들은 어떻게 보였을까? 무엇으로 보였을까? 헐벗고 굶주린 수많은 고려 백성들에게 막상 해줄 수 있는 것이란 설법밖에 없음을 한탄하지 않았을까?

가난한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배고픔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밥 한 그릇과 얼어가는 몸을 녹여줄 수 있는 옷 한 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제자들이, 혹은 수많은 불도가 정수스님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덜어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길 바라며. 무릇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천수대비가 속 관세음보살처럼, 정수스님처럼 보잘것없고 이름 없는 백성들의 말 한마디, 사정하나 낱낱이 헤아려 그들의 희망(눈)과 밥과 옷이 되어 주길 바라며 <삼국유사>를 썼던 것은 아닐까.

국민들의 혈세를 낭비하는 나라와 지방자치의 각종 공사들을 보면서, 국민들의 사정과 고통은 나 몰라라 한 비효율적인 정책들을 보면서, 국민들 눈에도 빤히 보이는 정치인들의 싸움을 보면서, 신도들의 주머니 사정은 결코 헤아리지 않는 종교 현장들을 만나게 되면, 국민들 혹은 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거만하고 오만한 정치인들이나 성직자들을 대하노라면 나는 어김없이 '천수대비가'와 '정수사구빙녀'를 떠올리곤 한다.

다행히 천수대비가를 지어 부른 여인의 어린 딸은 눈을 뜨게 된다. 갈수록 사는 것이 힘들다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단벌옷을 벗어 죽어가는 여인을 살린 정수스님의 참다운 보살행과 같은, 힘든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정책이나 대안이 절실한 이유다.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는 30년 가까이 <삼국유사>를 연구하며 셀 수 없이 그 현장들을 찾고 있다는 저자가 그동안 자신이 찾았던 그 역사 현장들을 1박 2일 여행 일정에 맞춰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관련 역사지식을 해박하게 풀어 넣거나 <삼국유사> 위주로 썼던 예전의 <삼국유사> 관련 책들과 달리 근현대 이야기도 자분자분 풀어 쓰고 있다.

<삼국유사> 현장 중에는 관광지로 개발되거나 사찰로써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도 있지만 탑이나 석물 일부만 남아 있는 곳도 있다. 후자는 그냥 지나치고 말기에는 다소 섭섭한 그런 역사적 가치가 남다른 곳들도 있다. 모르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누구든 쉽게 갈 수 있도록 관련 지도와 관련 삼국유사 본문을 더함으로써 지니고 다니며 <삼국유사>를 각별하게 느낄 수 있도록, 좀 더 의미 있고 특별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덧붙이는 글 |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고운기 씀ㅣ 2011.8ㅣ 현암사ㅣ15000원)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고운기 지음, 현암사(2011)


태그:#삼국유사, #천수대비가, #일연스님, #정수사구빙녀,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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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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