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제민주연대와 <오마이뉴스>는 세계 거대 여행 사업체들에 돌아갈 돈을 현지인들에게 주자는 취지의 '공정여행'을 널리 알리고자 '지금은 공정여행 시대를 기획했습니다. 공정여행족과 함께 여행을 하고 온 김현자 기자의 '차마고도' 여행기와 이정희 기자의 '내몽골' 여행기를 싣습니다. [편집자말]
[기사 수정: 10월 20일 오후 2시 15분]

"차는 피요, 차는 살이요, 차는 생명이다"

"식량이 없으면 사흘을 견딜 수 있지만, 차가 없으면 하루를 버티지 못한다."

티베트인들이 차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또한, 차를 흑금자(黑金子), 즉 검은 황금이라고 부른다. 그들에게 차가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가늠할 수 있는 말들이다.

해발 4000m 이상의 고원지대에 사는 티베트인들은 추위를 이겨내고자 육류를 주로 먹는다. 동시에, 몸속에 축적되는 동물성 지방을 분해할 수 있는 비타민 섭취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티베트인들이 살아가는 곳은 워낙 높은 지역인지라 여타의 채소들이 자랄 수 없다. 이런 티베트인들에게 나타난 것이 중국의 차(茶).

30~40년전까지만 해도 양가죽 주머니에 바람을 넣어 몸에 묶어 부표 삼아 험한 강을 건넜다고 한다.-차마고도 박물관에서
 30~40년전까지만 해도 양가죽 주머니에 바람을 넣어 몸에 묶어 부표 삼아 험한 강을 건넜다고 한다.-차마고도 박물관에서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반면, 이미 오래전부터 차를 생산, 일상음료로 마시고 있는 중국인들에게는 티베트 고원지대 초원에서 자라는 우수한 말이 필요했다. 이처럼 양쪽의 차와 말에 대한 필요 때문에 차마고도(茶馬古道)는 생겨났고, 한번 생겨난 길은 이천년 넘도록 이어졌다. 해발 3000~5000m를 넘나드는 험한 길인지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있는 길인데도.

공정여행 6일차인 7월 21일, 어머니에서 딸로 대(代)를 잇는 지구상 유일한 모계씨족사회인 루구후에서 이틀 밤을 잔 우리는 오전 11시쯤 모서인 객잔 주인의 부탁으로 그의 손바닥만 한 디지털카메라에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을 마지막으로 루구후를 떠나 왔다. 차마고도의 도시 리장 쑤허 마을(여강 속하고진)로 가고자.

'루구후~리장' 오가는 길은 험하다. 7~8시간 가까이 해발 3000m를 넘나들거나 그에 가까운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달려야만 한다. 오전 11시에 서둘러 떠났음에도 리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가 넘어서. 정말 많은 시간을 버스에서 보낸 것이다.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눈을 감을 감는 사람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시각각 펼쳐지는 아름답고 이색적인 풍경들 때문에었다. 

수많은 풍경들 중 아스라한 벼랑 끝에 서 있던 작고 초라한 집들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달렸던 길들은 마치 과일을 돌려 깎듯 높은 산을 굽이굽이 깎아 만들었는지라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이 창밖으로 예사로 보이곤 했는데, 그 아스라한 벼랑 끝에 성냥갑처럼 작은 집들이 한 채 혹은 두 채, 혹은 서너 채씩 서 있곤 했다.

사실 처음 그 집들을 멀리서 봤을 때 사람이 살지 않는 집들이거나 방목해 기르고 있는 가축들 때문에 간단하게 지은 집들인가 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험천만해 보이는 벼랑 끝에 작고 초라하게 서 있는지라. 그런데 스치면서 보면 빨래가 햇살에 마르고 있고, 여인들이 길가에 나와 빨래 혹은 설거지를 하고 있거나 아이들이 길가에서 놀고 있었다.

문명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절대적인 요소도 아니고, 외부인인 내가 스치며 잠깐 보는 것으로 절대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들을 구경하며 여행을 하는 내가 그들보다 행복하다고 100% 자신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생각까지 하는데도 루구후 오가는 길고 긴 시간동안 그들의 벼랑 끝 삶의 환경이 쉽게 털어지지 않았다.

루구후 나오는 길에 엄청난 폭우를 만났다. 바로 눈앞에서, 산에서 돌들이 굴러 떨어져 내리는 바람에 간이 바짝 오그라들기도 했다. 돌이 차를 덮치고 그 때문에 천 길 낭떠러지로, 흙빛으로 흐르는 진사강으로 굴러 떨어질까 봐. 안쓰러움이 너무 깊었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는가 싶게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것은 그처럼 위험한 곳에 깃들어 사는 그들이었다.

오래도록, 비가 내리는 날이면 아스라한 벼랑 끝에 살아가는 그들이 생각날 것 같다. 낯모르는 그들의 안부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혹시 모르겠다. 힘든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척박한 환경에 살아가는 그들의 초라하고 소박한 집들이, 그 길에서 만난 초라한 여인들과 길에서 놀던 자그마한 아이들이 생각날지도 말이다.

해발 3000m를 넘나들며 루구후 오가는 길에 자주 보였던 사람 사는 집(왼쪽), 금방이라도 흙이 쏟아져 내리고 집이 통째로 구를 것처럼 위태롭게 서 있는 집들이 자주 보였다. 달리는 차 속에서 돌아서 가야할 길을 찍었다.
 해발 3000m를 넘나들며 루구후 오가는 길에 자주 보였던 사람 사는 집(왼쪽), 금방이라도 흙이 쏟아져 내리고 집이 통째로 구를 것처럼 위태롭게 서 있는 집들이 자주 보였다. 달리는 차 속에서 돌아서 가야할 길을 찍었다.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쑤허 마을 뒷산에 올라 바라본 쑤허 마을의 기와지붕 물결
 쑤허 마을 뒷산에 올라 바라본 쑤허 마을의 기와지붕 물결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머문 곳은 나시족의 객잔. 다음날 아침, 쑤허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을 뒷산 가는 길에 800년 된, 장예모 감독의 <천리주단기>란 영화에도 나온다는 돌다리에서 잠시 멈춰 사진을 찍었다. 설명에 의하면 800년 전에 깔았던 돌 그대로란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발길에 닳을 대로 닳은 돌들은 미끄러웠다. 종아리가 긴장해 바짝 올라붙을 만큼.

사실 이 다리만 미끄러운 것이 아니다. 리장의 거리마다 돌이 깔려져 있는데, 사람의 발길에 닳았기 때문인지 거의 모든 길들이 미끄러워 바짝 긴장하며 걸어야만 했다. 특히 리장 고성은 비까지 와서 더욱 미끄러워 내리막길에선 산행 후 하산할 때처럼 발을 옆으로 차면서 걷곤 했다. 스포츠 샌들과 비슷한, 계곡 물속에서도 신을 수 경등산화를 신고 갔는데도 말이다.

수많은 객잔과 민가를 지나 이슬이 그대로 맺혀 있는 풀숲을 헤치고 도착한 마을 뒷산(대보산)에서 내려다보는 쑤허 마을의 기와지붕 물결, 그 풍경은 이틀 전에 머물렀던 리장 고성의 기와지붕 물결과 언뜻 비슷했다. 그러나 거리에서 느끼는 그 속살은 많이 다르다. 자동차로 불과 20분 거리라는 데, 분위기는 정반대다. 한마디로 쑤허 마을이 훨씬 좋다.

성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리장 고성은 워낙 많이 알려졌기 때문인지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거기다가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고성 사방가 가까이에 마이크 소리 요란한 주점들까지 몰려 있어서 밤에는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로, 낮에는 관광객들로 왁자지껄했다. 사람들을 피해 걸어야만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또, 이방인임을 알고 처음부터 바가지를 씌우거나 그러고서도 꼭 그 가격을 받지 많으면 본전도 못하는 듯 배짱을 부리는 가게주인들이 많았다. 그런지라 흥정을 하다가 가격이 맞지 않거나 자존심이 상해 그냥 나온 경우도 몇 번이나 된다. 같은 물건인데도 가게마다 가격이 저마다 달랐는데 심지어는 두 배까지 차이가 나기도 했다. 

수로를 따라 도시가 발달했다. 그냥 흐르는 물이 아니다. 이 물에 채소나 과일을 씻어 팔기도 한다.
 수로를 따라 도시가 발달했다. 그냥 흐르는 물이 아니다. 이 물에 채소나 과일을 씻어 팔기도 한다.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굴쓰는 사람들이 몇 달 머물며 글쓰는 것을 꿈꿀 정도로 속살이 아름다운 리장 쑤허 마을의 한 풍경
 굴쓰는 사람들이 몇 달 머물며 글쓰는 것을 꿈꿀 정도로 속살이 아름다운 리장 쑤허 마을의 한 풍경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쑤허 마을은 관광객들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인지 바가지를 씌운다는 느낌이 거의 없었다. 가죽 제품은 눈감고 사도 절대 실패하지 않을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주려고 지갑을 골랐는데, 한 개에 40위안. 두 개에 50위안 하자고 흥정하니 처음에는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다가 웃으며 100위안을 내민 내게 50위안을 거슬러 줬다.

리장 고성이나 대리 고성처럼 쑤허 마을도 물과 함께 건물을 지었다. 때문에 집과 길 사이에 수로가 조성되어 물이 흐르는데, 어딘지 모르게 훨씬 운치 있고 멋스럽다. 한 점의 그림처럼 운치 있고 아름다운 쑤허 마을 곳곳을 기웃거리며 생각했다. '글쟁이들이 이곳에 여러 달 머물며 글 쓰는 것을 최고의 로망으로 꼽는 이유가 있구나'라고.

산에서 내려와 삼원정을 지나 차마고도 박물관에 갔다. 리장은 여러 갈래의 차마고도 길 중 한 갈래의 길을 시작하는 곳이자 차마고도 덕분에 발전한 도시다. 특히 우리가 이날 여행한 쑤허 마을은 차마고도를 떠나기 전에 마방들이 모여들어 힘든 여정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던 곳이다. 때문에 차마고도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쑤허 마을을 빼놓아선 안 된다.

박물관 측의 안내로 각 전시관을 돌며 차마고도 관련 유물들을 보며 차마고도와, 차마고도를 탄생시키고 발전시킨 윈난의 대표차인 보이차(푸얼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차마고도 박물관 안에 있는, 보이차를 직접 만져보며 구분해 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우리에게 보이차로 더 낯익은 푸얼차는 윈난의 시솽반나와 쓰마오 지역의 6대 차산에서 생산된 차를 보이부(푸얼현)에 모아 운반하기 좋도록 압축한 것에서 시작된다. 운반할 때의 부피도 줄이고 생 찻잎이 부스러지는 것을 막고자 압착해 운반하는 과정에서 차가 자연 발효되어 건강보조식품으로까지 마실 정도의 여러 약효를 차 스스로 지니게 된 것이다.

얼마 전 MBC 드라마 '계백'이란 사극을 보는데, 어린 계백이 평소 사모하던 은고 아가씨에게 주려고 이복형을 통해 보이차를 구입하나 왈짜패들에게 속아 가짜를 선물하는 바람에 도리어 비웃음을 사고 마는 장면이 나왔다. 사실이라면 당시에도 가짜가 판 칠 정도로 보이차의 명성과 수요가 대단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소설 <홍루몽>에도 나온다. 주인공 가보옥이 여러 아가씨들과 '여아차'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여아차가 윈난의 보이차다. 고대문헌에 기록된-소녀들이 손이 아닌 입술로 여린 찻잎을 가려 따서 잠시 입에 물고 있다가 바구니에 담는-독특한 채집과정 때문에 여아차란 이름이 붙었다나.

참고로, 이런 독특한 방법으로 채집한 까닭은 소녀의 순결한 기운이 찻잎에 스며들게 하고 생산과정에서 찻잎이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단다.

기계로 만든 동전모양의 보이차
 기계로 만든 동전모양의 보이차
ⓒ 김대규

관련사진보기


보이차는 이제 기호품으로서의 차 그 이상의 목적과 의미로 마신다. 중국인들 중에는 "돈을 저축하느니 그 돈으로 푸얼차를 사두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좋은 보이차는 소장가치 또한 높다고 한다. 광저우에서 푸얼차 경매대회가 열렸는데, 루쉰이 평생 소장한 3g 남짓의 푸얼차가 20여 차례의 경쟁 끝에 인민폐 12000위안(경매 당시 우리 돈 156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이처럼 소장가치가 높은 보이차는 골동차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도 보이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때문에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보이차를 사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가이드에 의하면 윈난에서 생산되지 않은 찻잎으로 만들었거나 제대로 발효되지 않은 것. 몸에 좋지 않은 이물질을 섞은 것, 상표만 도용한 것 등 가짜 보이차가 대부분이다. 진짜 보이차는 눈 씻고 봐도 구분하기도 구하기도 힘들단다.

중국 현지 사정과 유통 과정 등을 따져 보건데, 우리나라에서 판매되는 보이차 90%가 가짜일 가능성이 많단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보이차는 엄청 비싸게 팔린다. 차마고도 박물관에서 보증하는 최고로 비싼 보이차는 500위안, 100~200위안 정도면 좋은 보이차를 살 수 있는데 30만 원을 웃돈다나. 가이드는 헤어지는 길에도 베이징 공항 면세점에서 파는 보이차들도 거의 모두 가짜이니 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신신 당부를 했다.

참고로 보이차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귀한 보이차가 상할 것을 우려해 냉장고에 넣어 보관하는데 이는 보이차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비싼 값에 가짜 보이차를 사느니 30위안 남짓의 숙성되지 않은 차를 사서 몇 년 동안 잊고 묵혀두면 현지에서 120~200위안 등에 파는 정도의 품질 좋은 보이차가 되는데, 냉장고는 절대 금물, 구입할 때의 종이 포장지나 한지에 싸서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보관하면 훨씬 좋단다.

보이차는 어렵다. 차를 들고 이리보고 저리 봐도, 달라붙은 찻잎 하나를 떼어내 입에 넣고 씹어 보고, 눈을 감고 킁킁 향을 맡아 봐도 쉽게 구분을 할 수 없었다. 한 시간 동안 차마고도 박물관에서 보이차에 대해 공부한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하기야 보이차 제대로 구분하는 것이 오죽 어려우면 보이차 감별 관련 책들까지 출간됐을까 싶다.

윈난 커피
 윈난 커피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인민폐 20~35위안에 팔고 있는 윈난 커피는 전체 물가 대비 우리의 커피값보다 비싸다.
 인민폐 20~35위안에 팔고 있는 윈난 커피는 전체 물가 대비 우리의 커피값보다 비싸다.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차마고도 박물관에서 나온 후 인근 티베트 장족 가옥을 탐방한 후 쑤허 마을을 구경하다 커피를 파는 곳이 있어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최근 몇 년 명성이 자자한 그 유명한 윈난 커피를. 윈난 커피 한잔 값은 20위안~30위안. 여행 당시 10위안=1800원이었으니 대략 우리돈 3500~5500원쯤 된다. 커피 값만 놓고 보면 그리 비싸지 않은데, 중국의 물가가 우리보다 3/1~3/2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보다 커피 값이 많이 비싼 것이다. 

최근 몇 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윈난 커피의 명성답게 커피 맛은 무척 좋았다. 강하고 향기롭고 개운하면서 입속에 오랫동안 머무는 커피의 여운이 좋아 한참동안 입을 꾹 다문채 입안에 가득 퍼지는 커피 향을 즐겼다. 고2때, 쌍계사(하동)에 며칠 머물며 스님에게 얻어 마신 작설차와의 첫 만남을 오랜만에 기억해내며.

지금이야 녹차가 유명하지만 1983년 그때는 녹차가 그리 대중적이지 못했다. 그러니 촌뜨기인 난 당연히 녹차도 작설차의 존재도 전혀 몰랐다. 그런 내게 작설차와의 첫 만남은 윈난의 커피, 그 느낌처럼 남아 있다. 그러고 보니 참 신기하다. 커피와 작설차의 맛과 성질이 전혀 다른데 둘의 느낌이 내게는 같은 느낌으로 스며드는 것이 말이다.

차마고도가 생겨나기 전, 그러니까 티베트에 중국의 차가 전해지기 훨씬 전부터 우리가 여행한 중국 윈난은 쓰촨성(사천성)과 함께 중국 최대의 차 재배지였다. 하지만 이젠 이런 윈난에선 차나무가 빠른 속도로 뽑혀져 나가고 그 자리엔 커피나무가 윈난의 또 다른 상징물로 빠르게 확산되며 자라고 있다. 차가 이젠 더 이상 돈벌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윈난 커피는 해마다 전 세계 평균 성장률 2%를 크게 웃도는 15%씩 성장하고 있단다. 보이차의 도시 윈난이 차마고도의 역사를 뒤로한 채 커피 산지로 재빠르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빠른 변화를 중국의 그 어느 지역보다 차마고도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쑤허 마을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훗날 여행을 하기 전까지 자주 궁금해 질 것 같다.

ⓒ 김현자

덧붙이는 글 | ※인사이트아시아차마고도 제작팀의 <차마고도>(위즈덤하우스)와 탕하이정 <윈난에 가봐야 하는 20가지 이유>(터치아트)에서 일부 참고하였습니다.



태그:#차마고도, #공정여행, #윈난, #보이차, #쑤허마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