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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여성, 여성을 말하다'는 세대별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인물 르포로 새세상연구소 르포팀에 의해서 구성되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이주노동자들이 나오는 영화 <방가? 방가!>의 공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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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야(가명)는 30대 중반, 미혼의 몽골여성이다. 20대 중반에 한국에 와서 지금은 한국생활이 10년이 넘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토야는 스웨터 제조공장에 취업했다. 그녀는 몽골에서도 미싱을 할 줄 알았다. 양재학교를 졸업했고, 졸업 후에는 경험을 쌓기 위해 회사에서 잠바, 원피스 같은 것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스웨터도 대체로 비슷할 줄 알았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 전혀 달랐다. 모든 것을 배워야 했다. 기술만이 아니라,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아주 적응이 잘 되어 있지만 한국생활 초기에는 토야도 무척 힘들었다. 한국어는 물론이고 한국물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한국사람들과 생활을 해야 했으니 힘든 게 당연하다 하겠다. 토야가 자기 이름을 몽골어로 말해도 토야의 발음을 한국사람들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사장님이 토야에게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당시에 한국사람들이 토야를 부르면, 토야는 "아~아~~"라고 답했다. 그게 몽골어로 '예'라는 뜻이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아~~"라고 하면 안되고  "예~~"라고 하라고 해서 그렇게 대답하는 것부터 배웠다. 하지만 당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토야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모두 토야에게 반말을 했다. 토야는 그게 반말인지 존대인지 뭔지 모르니까 그대로 배울 뿐이었다. 그래서 사장님에게도 존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사장님이 토야에게 존댓말을 해야 한다고 했고 그 이후부터 존댓말을 배웠다.

집도 음식도 사람도 고양이도 이상했던 한국

초기 생활 중에 잊을 수 없는 것이 음식이었다. 그때 토야는 끼니 때마다 밥을 두 그릇씩 먹었다. 몽골에서는 그렇게 많이 먹지 않는데 한국반찬들이 익숙지 않아서 도무지 먹을 것이 없었다. 김치도 이상했고 사장님이 토야를 생각해서 챙겨주는 김밥도 이상했다. 그나마 먹을 것이 밥밖에 없었다. 그래서 밥만 많이 먹었다. 토야의 그런 고충을 공장 사람들이 알아채고부터는 빈대떡, 계란 프라이 같은 것을 해주고 고기 들어간 음식, 예를 들면 김치찌개 같은 것에 고기가 있으면 다 토야에게 주곤 했다.

사람들은 다 토야에게 잘해주었지만 몽골이 그립고 일이 힘들어서 그녀는 한 달 동안 매일매일 울고 지냈다. 숨막힐 것 같이 좁고, 일하고 나서 샤워할 곳도 마땅치 않고 쉬기도 편치 않은 숙소, 이런 것들이 정말 토야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무서움. 토야는 몽골에서는 늘 가족과 함께 지냈는데 한국에 와서 난생 처음 혼자 지냈다. 그때 토야가 살던 집은, 방문을 열면 조그만 부엌 아닌 부엌이 있고, 부엌문만 열면 바로 길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게다가 그 동네에는 고양이가 있었는데 밤만 되면 애기 우는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그 소리며 오가는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서 그녀는 매일매일 불을 켜고 잤다. 그러자 어느 날 주인 아주머니는 토야에게 뭐라뭐라 했다.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자 아주머니가 불을 가리켰다. '아 불 끄고 자라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무서워서 불 대신 TV를 켜놓고 잤다. 그렇게 혼자 지내는 걸 무서워했다. 지금이야 누가 같이 지내면 불편해하지만.

거기다가 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음식을 바꾼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가 심하게 아팠다. 그러나 치과 찾기도 힘들고 돈도 없고 해서 그냥 고통을 참으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즈음 토야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한국이 이런 곳인 줄 모르고 왔다고. 그래서 딱 1000달러만 벌면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왜 하필이면 1000달러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목표를 그렇게 정하고 억지로 억지로 참았다.

그러다가 첫 월급을 받았다. 첫 월급이 50만 원 좀 넘었는데, 월급을 받고 보니, 몽골과 한국과의 환율차이로 몽골에서 그 돈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실감이 났다. 한국기준으로 많은 건지 적은 건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 정도 돈이어도 돌아가려는 마음을 바꿔먹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런 정도면 참고 해볼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야 그렇게 먹었지만, 마음과 달리 일은 힘들고 먹는 것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월급으로 받은 돈이 50만 원 남짓 되었는데, 그 중에서 300달러를 몽골로 송금하고, 월세 20만원 내고. 그러면 아낄래야 아낄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는 집에서는 아예 밥을 먹지 않았다. 돈을 아끼려고 공장에서 다 해결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해서 처음에는 살이 많이 빠졌다. 몽골에서는 몸무게가 얼마인지 수시로 재보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빠졌는지는 모르지만 옷 치수로 미루어볼 때 많이 빠졌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한국에 적응이 잘 되었고 한국음식도 잘 먹어서 오히려 몽골음식이 좀 느끼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지만 그 때는 그랬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회식도 하고 하면서 맥주도 조금 마시게 되었다. 몽골에 있을 때 술이나 담배를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맥주를 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 한참 걸렸다.

힘들었던 한국 생활... '좋은 동료들을 만나 그나마 다행이다'

이주노동자들이 나오는 영화 <방가? 방가!>의 한 장면
 이주노동자들이 나오는 영화 <방가? 방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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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야는 좋은 직장동료들을 만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되어서 일도 빨리 배우고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이 노력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토야는 자신이 한국말로 '눈썰미가 있는' 편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실제로 일을 금방 금방 배웠다. 원래 회사에서는 한국인 직원과 외국인 직원이 있으면 한국인 직원에게 먼저 일을 가르쳤다. 그런데 그 한국인 동료는 일을 빨리 못 배운 반면 토야는 금방 배우곤 했다.

그러자 자연히 여러 기술을 토야에게 가르치게 됐고, 나중에는 사람들이 한국인에게는 일을 가르치지 않고 외국인에게만 가르친다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을 빨리 배웠다. 그 과정이, 토야 스스로 생각해도 '무척 노력했다'고 할 정도로 대견스럽게 생각된다. 일을 시작하고 상당한 기간 동안, 한국인 동료들이 점심시간에 잠을 자거나 쉴 때에도 토야는 한국어를 배우고 일을 배웠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초짜였던 토야는 시다일을 했는데, 시다일을 제대로 하려면 각종 물건과 부품에 대해서 다 알아야 했다. 그래서 뭐든지 다 물어봐야 했고, 한국어를 못하니 한국어 발음을 몽골어로 종이에 적어놓고 그걸 들여다보고 외우고 외우고 또 외웠다.

또 일할 때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오면 노래가사를 적어서 외웠다. 사장님 딸이 초등학생 1학년인가 2학년인가 그랬는데, 그 딸에게 물어보고 귀에 들리는 대로 발음을 적어놓았었다. 그렇게 노력을 해서 지금은 미싱, 오바, 쇼타 등 모든 공정을 다 소화할 정도로 기술자가 되었고 한국어도 본인이 밝히지 않으면 외국인인줄 모를 정도로 유창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토야는 몽골사람으로 보면 보통 체구지만 힘이 셌다. 한국에 온 초기에는 어렸고 해서 힘이 더 셌다. 그래서 옷이 완성되면 50개씩 묶어서 출고하는 곳에 쌓아놓는 일이 있었는데, 토야는 그걸 혼자서 다 묶고 옮기곤 했다. 보니까 한국사람들은 혼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토야는 시간이 갈수록 공장에서 사람들의 아낌을 받았고 언니동생 하면서 사람들과 돈독하게 지냈다.

다른 몽골사람들이 한국인 동료들에게 차별받고 무시당하는 사례들을 듣기도 하지만 대체로 토야는 잘 지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직장동료들이 다 토야에게 잘해 준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새로 온 신참이 외국사람이라고 토야를 무시하기도 했다. 작업하다 틀려놓고 토야에게 미루기도 했다. 그런데 토야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보니 뭐라 하기도 어려워서 억울했지만 가만히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한국인 동료들은 토야를 따돌리지 않고 똑같이 대해주었는데 그 덕분에 일이 힘들어도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성수기에는 철야작업, 비수기에는 무급으로 휴업

스웨터업계에는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다. 성수기는 가을, 겨울이고 비수기는 봄, 여름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하는 시간은 오전 9시~저녁 7시가 정상근무이다. 그런데 성수기에는 거의 매일 밤 9시, 10시까지 야근을 하고 철야도 자주 했다. 휴일에도 쉬는 날이 드물었다. 한국생활 초기에는 밤 새우고 일을 해도 몸이 잘 버텨줘서 괜찮았으나 지금은 힘들다. 예년과 달리 힘들 뿐만 아니라 일하면서 여기저기 몸을 부딪혀 멍이 많이 든다. 예전에는 빨리빨리 다녀도 부딪히는 적이 없었다. 아마 나이 먹고 움직임이 둔해져서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일해서 받는 한달 월급은 대개 130만~150만 원정도. 야근을 좀 많이 하면 180만 원 정도까지도 받았다. 기술자이니 그 정도 받는 것이다.

그러다가 비수기인 봄, 여름이 되면 아예 휴업을 한다. 휴업수당은 없다. 그냥 쉬어야 했다. 그렇다고 퇴사하는 건 아니고 휴직으로 된다. 노동법으로 어떻게 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쨌든, 회사가 쉴 때 토야는 그동안 알게 된 아는 언니들의 도움을 받아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그냥 놀기도 했다. 어떨 때는 한참 동안 다른 회사에 다니기도 했다. 그 때는 회사가 1년 이상 사실상 휴업을 했다. 그래서 토야는 아예 다른 회사를 다니기로 했다.

그 회사에서는 일당제로 해서 1일에 6만 원을 주었다. 그건 토야가 그때까지 다니던 회사에서 주던 급여보다 더 많은 급여였다. 토야는 그게 자신의 기술과 노동력에 대한 적정임금이었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전에 다니던 공장에서 월급을 적게 받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좋았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까 새로운 사람들과 사귀는 것도 쉽지 않았고, 스웨터 종류인데도 전의 공장과는 작업공정이 좀 달라서 새로 배워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아는 언니가 '도급'하자고 제안해서 그 언니와 같이 지하 방에서 도급제로 일을 했는데, 여름에 비가 아주 많이 와서 공장이 침수되면서 그만두고 말았다. 그 즈음에 1년 넘어 휴업했던 회사의 사장님이 다시 공장을 열면서 토야를 불렀다. 토야는 다른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망설였다. 그때 사장님이 한 말이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 한다'고도 하고 '너 없으면 안된다'고도 그랬다. 그 말을 들으니 가지 않으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냥 사장님 따라 가기에는 내키지 않는 면도 있었다. 월급이 적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동안 다른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토야는 자신이 요구하는 대로 받았다. 이 업계에서는 꽤 높은 편이다. 어엿한 기술자로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만큼 일을 잘해주기 때문에 요구대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사장님과는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한 번도 월급을 두고 요구하거나 교섭해본 적이 없었다. 며칠 고민하다가 토야는 사장님과 월급을 교섭했다. 처음이었다. 결과는? 토야는 자신의 요구대로 월급을 받기로 했다. 그동안 세상을 좀 배운 것 같았다.

젊은 사람이 없는 한국 공장... 일에 시달리는 한국인들

이주노동자들이 나오는 영화 <방가? 방가!>의 한 장면
 이주노동자들이 나오는 영화 <방가? 방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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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야는 웬만하면 회사를 옮기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래 있어야 일도 배우고 익숙해지니까. 물론 전제가 있다. 월급이 꼬박꼬박 나와야 한다는 것. 토야가 아는 언니는 한국에 5년 정도 있었는데, 굉장히 자주 회사를 옮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월급이 두세달씩 밀리니 다니려야 다닐 수가 없었다.

토야가 있던 곳이 월급은 적고 일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월급이 꼬박꼬박 나왔다. 가끔, 회사 사정이 정말 안 좋을 때면 사장님이 일한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주고 반장이나 토야같이 오래된 사람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며칠 늦게 준 때도 있지만, 대체로 괜찮았기에 오래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주 옮기지 않고 일하다 보니 한국인 노동자들의 교체가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하다가 그만 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토야가 일하는 회사의 한국인들은 다 50대 여성들이고 토야가 가장 젊다. 사무실에는 사무 보는 아가씨가 있는데 그 아가씨는 아주 젊어서 20대이다. 그 아가씨는 나이든 아주머니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회식이며 야유회며 다 빠진다. 세대 차이 나고 문화가 다르다고 하면서.

그리고 다른 생활이야 잘 모르겠는데, 한국인들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은 것 같다. 토야가 아는 어떤 언니는 반장인데, 인천에서 서울까지 출퇴근한다. 매일 늦게 집에 가고, 일요일에 나올 때도 있다. 그러면 가족들과는 언제 시간을 보내나 싶다. 그 언니만이 아니라 대체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적은 것 같다. 한국사람들은 일을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몽골보다 더 익숙해진 한국, 그래도 언젠가는 내 나라로...

비자가 없는 토야의 생활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미등록 외국인 단속이다. 한번은 출입국관리국 공무원이 바로 근처 공장으로 단속나온 적이 있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근처 식당에서 신고했다고 하는데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 비자없는 외국인 한 사람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잡혀갔다. 인접한 곳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나면 한참 동안 한국인들도 무척 긴장한다.

어쩌다 공장에 단속반이 들어와 한 번 돌아보고 가는 때면 최소한 한 달간은 모든 사람이 긴장한다. 다들 입 다물고 그저 일만 한다. 물론 토야는 더하다. 일하다가 자주자주 출입문을 바라보고 누가 들어오기만 하면 깜짝깜짝 놀란다. 집에서는 악몽도 꾼다. 한국에서 오래 살았으니까 단속되어 집에 간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오랫동안 일도 잘했고 한국에 적응도 잘했는데 그렇게 가게 되면 속상할 것이다. 그냥 마음을 비워놓고 살기로 했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스스로 생각해도 강해진 것 같다.

토야는 형제들이 많은데, 7형제 중 셋이 한국으로 왔다. 언니, 토야,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한국에 있으면서 일을 해서 각자 일정액을 매달 본국에 계신 부모님께 송금했다. 그 돈은 부모님의 생활비, 어린 세 동생의 학비로 쓰였다. 세 자매 중 현재는 토야만 한국에 있다. 언니는 3년 전에 미등록노동자 단속에 걸려서 추방당했고, 여동생은 스스로 귀국했다. 토야도 가끔 '귀국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3~4년 정도만 더 있다가 귀국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 체류한 지는 꽤 되었지만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어놓은 것은 아니다. 몽골에서 무언가 할 계획은 있는데, 그걸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다. 몽골에 돌아갈 생각을 하면…가면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나이에 한국에 왔고 한국에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 한국의 시스템과 문화에 익숙하고 오히려 몽골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더 많다. 몇 년 전에 몽골에 한번 갔다왔는데, 가보니 은행업무도 처리를 못할 정도로 낯설었다. 여러 가지 걱정되는 일들이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 영원히 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니 언젠가는 갈 것이다. 머지않아 돌아가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석원정 기자는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소장입니다.



태그:#이주노동자 , #몽골,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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