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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지만 진한 '형제애'를 나누는 둘도 없는 친구가 있다. 대학생활 동안 잠 안 오는 새벽마다 전화로 신세한탄하며 베갯잇을 적시던 사이인지라 서로 설렐 틈이 없었다. 스무 살의 대화가 다 그렇듯 이성에 대한 설레발이나 장래에 대한 걱정들이 대부분이었다. 항상 우리 대화는 서로의 연애상담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통화가 계속되면 이내 우리가 지금 이딴 얘기 할 때가 아니라 앞으로 뭐 해먹고 살지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나름 생산적인 고민에 봉착하며 감정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찌질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당시엔 말 못할 고민을 함께하며 서로 큰 위로가 됐다.

 

내 친구 민영이는 원래 대학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할 계획이었다. 고등학교에서 공부도 썩 잘 하던 아이였기 때문에 소위 명문대에 진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음대에 들어가려면 비싼 수업료의 과외를 받아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합격할 확률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아신 민영이의 어머니는 딸을 그런 방법으로는 대학에 보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대신 어머니는 그녀에게 학교에서 사회학을 배우길 권했다.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어머니는 딸을 불합리한 관행 속으로 밀어 넣고 싶지 않은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 했고, 그녀도 그런 입시 현실에 거부감이 들어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에 민영이는 급하게 진로를 바꾼 탓인지 학과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책에서 얼핏 보고 들은 내용들을 가지고 나와 내 친구들이 갑론을박을 펼치면 자신은 잘 모르겠다며 한 발 물러나 있었다. 나는 그녀가 토론수업이 많은 사회과학부 수업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무리에 끼여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항상 열심히 공부하면서 장학금도 받았다. 이따금씩 클라리넷을 불며 "앞으로 음악을 다시 할지도 모르잖아…"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녀가 이제 사회과학 쪽으로 진로를 굳혔다고 생각했었다.

 

음대 대신 선택한 사회과학대... "클라리넷 취미로 하려던 거 아니었어?"

 

대학시절 민영이는 아마추어 관현악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매해 크고 작은 연주회에 참가했다. 클래식이라곤 교과서 사진 속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만 줄기차게 외워대던 나인지라 '오케스트라' 하니 뭔가 고상해 보이고 멋진 취미인 것 같았다. 그런데 졸업이 가까워진 어느 날 그녀는 음대 편입시험에 응시하겠다고 했다.

 

"취미로 하려던 거 아니었어?"

"아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건 음악인 것 같아. 지금이라도 다시 해보려고."

 

스물일곱, 어리다면 어리다 할 수 있겠지만, 여자동기들은 대부분 취직해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나이에 대학, 그것도 음대에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기에 나는 그녀를 말렸다. 앞으로 들어갈 돈도 돈이지만 장래를 생각해봐도 그건 도박이나 다름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두 명 뽑는 음대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요금 못내서 전화 끊겼어"

 

올해 그녀는 두 명밖에 뽑지 않는 편입시험에 오롯이 자기 실력으로 합격하여 음대생의 꿈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그녀가 다니는 학교는 등록금이 전국에서 가장 비싼 예대다. 첫 등록금은 부모님께서 해결해 주셨지만, 대학을 두 번이나 다니면서 언제까지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닥치는 대로 알바를 찾았다.

 

아이들 레슨에 음악콩쿨 진행요원, 아동센터 선생님까지 수업만 끝나면 학비를 벌기 위해 뛰어다녔다. 전화통화 말미에 "밥 한 번 먹자"는 흔한 인사말을 꺼내기도 미안할 정도로 바쁘고 힘들게 지내는 친구를 보며 안쓰럽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니 행복하다는 그녀는 내 걱정 보다는 훨씬 다부져 보였다.

 

얼마 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민영이었다.

 

"나야."

"뭐야, 번호 바꾼 거야?"

"아니 요금을 못 내서 착신 끊겼어. 너한테 온 부재중 전화 보고 옆에 친구 꺼 잠깐 빌려서 전화하는 거야. 요 며칠 학교 홍보하러 대천으로 공연왔어.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수영하고 노니까 완전 재미있다. 흐흐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어쩌다 전화를 못 걸 정도까지 요금이 밀렸는지 차마 묻진 못했다. 처지에 비해서 너무 발랄한 것 아니냐고 묻자 그래도 별일 없이 산다며 바닷가에서 너무 심하게 놀아 아프기까지 하다고 나에게 칭얼댔다.

 

지나치게 명랑해 오히려 더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근황을 들어보니 내가 알던 민영이가 맞았다. 그 바쁜 와중에도 두리반으로 공연도 다니고, 풍물패도 들고, 친구들과 재즈밴드도 결성해서 다른 음악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단다.

 

내 친구는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 라고 늘 얘기한다. 소녀의 감성으로 항상 발랄하게 자신의 꿈을 좇는 그녀가 취업준비에 걱정으로 떨고 있는 나로서는 꽤 부럽기도 하다. 그래서 난 더욱 그녀가 잘 되길 바란다. 꼭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 팍팍하게 살고 있는 나 역시 그녀의 성공을 보며 흐뭇함을 느끼는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싶다. 나의 뮤즈(Muse) 민영이를 응원한다.

 


태그:#당신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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