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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전통시장. 대 여섯 명의 거지들이 떼를 지어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때마침 국밥집 앞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장꾼들이 '막걸리 한 잔 하고 가라'고 손짓을 하자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넙죽' 술잔을 받습니다.

불과 5분도 안 돼 이들은 구분 없이 뒤섞여 즉석 굿판을 벌입니다. 한쪽에선 어물전 아주머니가 건넨 낙지 한 마리를 놓고 서로 먹겠다고 실랑이를 벌입니다. 오랜만에 시장에는 박장대소 생기가 돋아납니다.

작악자(作樂者)들입니다. 요새는 '품바' 혹은 '각설이'라고 부르지요. 지금으로부터 471년 전인 1470년(성종2년) 문을 연 조선 최초의 지방시장 남창장(지금의 일장)에 의문의 걸립패들이 놋쇠그릇을 두드리며 등장합니다. 세계문화유산인 판소리보다 200여년이 앞선 시기입니다. 훗날 품바 혹은 각설이로 불리는 작악자들이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지요.

동냥바가지에 동냥해온 튀밥을 나눠 먹는 각설이패들
▲ 식은 밥도 좋아라우 동냥바가지에 동냥해온 튀밥을 나눠 먹는 각설이패들
ⓒ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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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년 직제학 눌재 양성지가 세조 2년에 올린 상소문에서 각설이는 '세상(막 기틀을 잡아 가는 조선)을 어지럽히는 오랑캐의 무리와 같다'고 처음 언급되어 있습니다. 작악걸자(作樂乞者), 다시 말해 '노래를 지어 부르며 구걸하는 무리'들을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자에서 역성혁명을 한 조선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백성들을 선동하니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유학자들이 탁발(동냥)하는 승려들을 동냥치로 부르고 들에 단을 쌓고 법회를 여는 야단법석을 시끄러운 소음으로 폄하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들은 떼를 지어 다니며 부호의 집을 털고 관아를 습격하는가 하면 반란을 일으키는 양수척의 무리와 같이 취급받게 됩니다. 나라를 잃은 백제의 유민들이 북방민족인 양수척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에 저항했듯이, 작악자들 또한 조정에 의해 불법화된 불교의 승려들과 고려의 유민들이 백성들의 언어와 몸짓으로 사설과 춤사위를 만들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것이겠지요.

따라서 조선조정은 이들을 '불온한 세력'으로 규정하고 백성들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결국 그들의 의지대로 작악자들은 거리에서 사라집니다. 세상을 바꾸는 깨달음은 사라지고 생존을 위한 연행만 있는 연희패가 되는 것이지요.

각설이들을 만나기 위해 장 나들이를 나온 팔순 할아버지의 춤사위가 흥겹다.
▲ 할아버지도 신명이 나고 각설이들을 만나기 위해 장 나들이를 나온 팔순 할아버지의 춤사위가 흥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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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를 만나러 온 관광객들과 즉석 막걸리 잔치가 벌어진다.
▲ 어이 각설이! 막걸리 한잔 하고 가소 각설이를 만나러 온 관광객들과 즉석 막걸리 잔치가 벌어진다.
ⓒ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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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장, 작악자들이 다시 살아나다

품바(작악)의 발상지인 일로장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작악자들을 다시 불러 오고 싶었습니다. 소리꾼, 품바, 춤꾼 등등 광대들이 모여 작당을 하였습니다. 고상한 무대를 버리고 장날엔 무조건 일로장으로 가자.

무대도, 대본도, 음향도 없습니다. 딱히 배우도 없으니 연기 하지도 않습니다. 배우가 아니라 각설이들입니다. 1일과 6일, 일로 장날이면 각설이 대여섯 명이 장터를 휘젓고 다닙니다. 장터국밥집에서 국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술자리가 벌어지면 끼어들어 막걸리를 얻어 마시고 술에 취해 주정도 합니다. 거지라고 해서 공짜는 없습니다. 얻어먹으면 반드시 '숫자타령'이나 '신세타령' 한 자락씩은 나옵니다.

막걸리에 대한 답례로 각설이들이 신명나는 숫자타령을 부른다.
▲ 막걸리 값은 해야 제. 막걸리에 대한 답례로 각설이들이 신명나는 숫자타령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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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김에 세태를 꼬집는 '촌철살인' 한 마디씩 내뱉습니다. 아무리 높으신 벼슬아치들 욕을 해도 거지니 나무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탓하는 사람은 '거지만도 못한 놈'이 되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나라 마지막 각설이인 천장근(?~1973)을 기억하는 할머니들은 동냥 바가지에 과일이나 생선, 튀밥을 넣어 주기도 합니다. 국밥집 아주머니는 국밥을 말아 내오기도 합니다. 장 나들이 할아버지들은 깡통에 꼬깃꼬깃 쌈짓돈을 꺼내 넣어주고 신명이 나면 함께 춤사위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어물전 아주머니가 건넨 산 낙지 한 마리를 놓고 각설이들끼리 전쟁이 났다.
▲ 몇 년 만에 고기냐. 어물전 아주머니가 건넨 산 낙지 한 마리를 놓고 각설이들끼리 전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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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도 가지가지입니다. 강산이는 역모에 몰려 패가망신한 선비입니다. 그래도 양반이랍시고 도포자락에 갓을 쓰고 거드름을 피우고 다닙니다. 왕년에 정승판서까지 했다고 허세를 부립니다. 그래서 다른 각설이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입니다.

전(前) 장군은 가슴에 큰 별을 달고 다닙디다. '원래 5성 장군인데 전두환·노태우가 반란을 일으킬 때 같이 안 놀았다고 쫓겨나서 일로장에서 구걸을 하게 되었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그래서 5·18때 시민군이었다는 철주와는 단짝 친구입니다.

 장날마다 나오시는 ‘일로품바’ 열성 어르신 팬들과 나누는 막걸리 잔이 정겹다.
▲ 장터국밥에는 막걸리가 최고여. 장날마다 나오시는 ‘일로품바’ 열성 어르신 팬들과 나누는 막걸리 잔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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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보는 일로장의 터줏대감입니다. 정신이 살짝 간 듯해도 가끔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내 뱉습니다. 사법고시에 1차까지 패스했는데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살짝 맛이 갔다고 합니다.

막내 작은이는 어디서 굴러왔는지 정체를 모르는 각설이인데 원래는 절에서 중노릇을 했다는 소문입니다. 과거를 절대 밝히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각설이들이 장날마다 자기 나름의 사연으로 일로장에 모여 들었습니다.

각설이들의 출연으로 활기를 되찾아 가는 재래시장

오전 10시가 되면 장에 나와 어물전, 과일전, 우시장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상인·장꾼들과 어우러집니다. 지난 6일 장날엔 시인인 박관서씨가 와서 각설이들에게 장터국밥에 막걸리를 샀습니다. 답례로 멋들어진 장타령을 늘어놓자 장보러 온 어르신들이 한데 어우러져 굿판이 벌어집니다.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아 5성 장군에서 각설이로 밀렸다는 전(前)장군.
▲ 오성장군 전장군.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아 5성 장군에서 각설이로 밀렸다는 전(前)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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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0여 년 전까지 각설이들은 500여 년 일로장의 역사와 함께 했습니다. 한 세대가 지나고 나서 다시 돌아 온 각설이들로 어르신들은 요새 장날이 즐겁습니다. 농사일이 바빠도 꼭 장날을 챙깁니다. 어르신들에게 각설이는 나누고 베풀어야 할 한 식구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관광객들이 짓궂게 농을 걸거나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가끔 '버럭' 화를 내기도 하지만 금세 꼬리를 내립니다.

각설이의 연행은 춤과 소리, 사설 모든 것이 즉흥적입니다. 요샛말로 애드리브인 셈이지요.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일로장엔 전국 각지에서 발품을 팔아 각설이들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면 대형유통매장에 밀려나 겨우 숨이 붙어 있는 재래시장도 점차 옛날의 활기를 되찾게 되겠지요. 그날을 기대해 봅니다.

한 가지 바람이 더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을 이야기하는 각설이들의 목소리기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작은이가 동냥깡통에 든 튀밥을 관광객에 건네며 넉살을 떨고 있다.
▲ 시상에 거지 밥을 뺏어 묵네. 작은이가 동냥깡통에 든 튀밥을 관광객에 건네며 넉살을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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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대호 기자는 청년 광대들이 원형의 품바(각설이)를 되살리는 노력에 함께 동참하고 있습니다.



태그:#각설이, #일로장, #작악걸자, #품바발상지, #최초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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