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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찾아와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미네르바(Minerva)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에 해당한다. 이 여신이 자신의 상징으로 삼은 새가 부엉이였다. 그래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지혜를 상징한다. 이 부엉이가 낮이 다 지난 황혼에야 날기 시작한다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인간의 앎과 이해는 그 사건이 마무리되는 즈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뜻이다.

본래 이 말은 철학자 헤겔이 그의 저서 <법철학 강요>의 서문에 쓴 말이다.

세계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가르치려 하는 것에 대해 한마디 덧붙인다면 그렇게 하기에는 철학은 언제나 너무 늦게 도착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세계에 대한 '사상(思想)'인 한 현실이 그 형성과정을 완료하여 자기를 완성시킨 뒤에야 비로소 철학은 시간 속에 나타난다. (중략)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찾아와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헤겔은 인류 역사를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전개하고 자각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며 또 그 과정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한 시대의 본질과 의미는 오직 그 시대가 완성된 다음에야 인간에게 인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시대를 앞서서 다가올 시대를 예측하거나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려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를 포함하여 많은 개혁가와 혁명가들이 헤겔의 이런 생각에 대해 인간의 정신능력과 주체성을 과소평가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인류는 역사의 주인으로 그 이성과 의지에 따라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우리의 많은 지식인들도 기꺼이 이런 비판에 동참한 바 있다.

민주화에 대한 사람들의 신념과 헌신으로 민주국가가 성취된 무수한 사례 등은 인간이 스스로 그들이 원하는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헤겔 역시 진실의 한 측면을 드러내어 준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가령 일제 말기 한국 사람들 중에 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그대로 유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20세기 말 사회주의권의 급속한 몰락도 예측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당시 우리 지식인들은 큰 충격 속에서 그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연에 대해 그렇듯이 역사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개척하려 할 뿐 아니라 그 앞에서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역사 역시 때로는 인간이 도저히 예측할 수도 대처할 수도 없게 도도히 밀려오기도 한다.

이런 사실에 눈을 감은 채 인간의 주체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할 때 이르는 귀결 중의 하나는 북한의 주체철학이 잘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가 사회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혁명도 가능하다고 본 바에 비해 주체철학은 인간은 이런 조건에 구애되지 않고 언제든 그가 의지하는 바를 구현할 수 있다고 낙관하였다. 그 주체철학에 근간한 사회가 지금의 북한이다.

역사라는 큰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삶의 지평에서는 어떨까.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 제목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개인적인 삶에서도 우리는 어떤 순간의 의미를 한참이 지나서야 깨닫기도 하고 지나간 것이 절호의 기회였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뒤처짐'은 실수나 부주의, 의지박약 때문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중 상당수는 바로 우리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러니 예상 못한 결과나 놓쳐버린 기회 등에 대해 너무 아쉬워하거나 자책할 필요는 없다. 기회를 놓치는 것으로 따진다면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인생역전'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 6개 숫자를 몇 분 미리 알지 못해서 매주 로또 1등상을 놓치고 있다. 상한가를 기록하는 주식이 하루에도 수십 개이다. 경마장의 말도 뛰고 있고 경륜장의 자건거도 달리고 있다. 이런 기회들을 놓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면 내가 안타까워하는 그 기회를 놓친 것 역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앞날에 대해서도 열심히 노력은 하되 그 결과에는 우연이나 운명 등이 개입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와 같은 맹목적 낙관주의나 '무조건 행복해져라'와 같은 행복지상주의는 북한의 주체철학이 범한 우와 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앞으로의 삶 언제쯤에 문득 부엉이가 날아오를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은 헤겔의 말대로 인생이 저물 때일지 모른다. 이제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시기일지도. 하지만 위대한 지혜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고양시킬 것이다. 그러니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꿈꿀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 카페 <가우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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