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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선욱. 나는 그가 가끔 펴내는 책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그는 시인이지만 시란 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동화, 평전까지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에게 시인 말고도 동화작가, 인물평론가라는 말이 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지난 2006년에 어린이평전 <윤이상>을 썼다. 이번에는 청소년과 어른을 위한 <윤이상>을 또 썼다.

 

'타고 난 글쟁이'가 따로 없다. 시인 박선욱, 그가 '타고난 글쟁이'다. 그는 나와 아주 가깝고도 살가운 벗이다. 그와 첫 단추를 꿰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여 년 앞이었던 1980년대 허리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그때 창원공단 노동현장에서 시쳇말로 '쎄(혀) 빠지게' 일하다가 정말 우연찮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에 노동시 몇 편을 발표했다.

 

그 이듬해였던가. 그는 내가 발표했던 노동시를 그가 묶은 <한국노동시선집>에 실었다. 나는 그때부터 그가 쓴 시를 찾아 꼼꼼히 읽기 시작했고, 서울로 상경한 뒤 그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구속문인 석방의 밤', '민족문학의 밤', '구속문인을 위한 철야농성', '민주화를 위한 가투' 등에 늘 함께했다.

 

내 결혼식 때에는 그가 하루 앞날 마산까지 내려와 허름한 여관에서 1박을 한 뒤 '그리운 금강산'이라는 축가까지 불러주었다. 나는 요즈음 그를 볼 때마다 좀 부끄럽다. 왜? 나는 윤이상이 태어난 통영과 가까운 창원이 고향이지만 윤이상에 대해 깊이 있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는 통영과 조금 먼 전남 나주가 고향이지만 윤이상에 대해 벌써 두 권이나 썼으니, 그 앞에서 어찌 얼굴을 뻣뻣하게 들 수 있겠는가. 

 

미래 그려나가는 일 힘 부치면 윤이상 떠올려라

 

"어린 시절의 윤이상 선생님에게도 캄캄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것도 고통이었겠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못하게 하는 아버지의 반대 또한 큰 시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윤이상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윤이상 선생님이 만난 가장 큰 시련은 1967년에 겪은 납치와 고문, 그리고 투옥일 것입니다." - '저자의 말' 몇 토막

 

시인이자 동화작가, 인물평론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박선욱(51)이 평전 <윤이상>(작은씨앗)을 펴냈다.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이라는 덧글이 붙어 있는 이 책은 윤이상 어머니 김순달이 용꿈을 꾸고 난 뒤 선생이 태어날 때부터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겪었던 힘겹고도 찬란했던 삶이 알몸 그대로 드러나 있다.

 

'첫 번째 유럽 연주회'로 문을 여는 이 책은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 삶을 모두 6부에 사실 그대로 담고 있다. 제1부 '뽕나무 위의 현자', 제2부 '일본 유학 그리고 해방', 제3부 '새로운 나라를 위하여', 제4부 '유럽유학', 제5부 '고난의 길', 제6부 '승천하는 용' 등 36꼭지가 그것.

 

지난 17일(금) 저녁 때 홍대 주변, 작은 주막에서 열린 <윤이상>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시인 박선욱은 "꿈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쏟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윤이상 선생님은 몸소 보여주었다"고 못 박는다. 그는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다면 그것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게 자신의 인생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며 "미래의 구도를 그려나가는 일이 힘에 부칠 때 윤이상 선생님을 떠올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 우리나라가 낳은 지구촌 천재음악가 윤이상. 그는 박선욱 시인 말처럼 고전과 현대, 동양혼과 서양 음악기법을 아우르면서 어느 곳에도 매이지 않음을 바랐다. 그 앞에 놓인 시대는 얄밉게도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는 그 때문에 수많은 좌절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우리나라 땅에 한 줌 흙으로 남기를 바랐지만 끝내 조국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지 않았던가.

 

"왜 다른 사람이 쓴 악보를 내가 연주해야만 하지?"

 

"윤이상의 이웃집에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청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청년의 집에 놀러간 윤이상은 방안에 있는 악기 하나를 발견하고 청년에게 묻는다.

'야, 신기한 게 있네? 형 이것 이름이 뭐야?'

'응, 그건 바이올린이라는 서양 악기야.'

청년은 바이올린을 집어 들어 짧은 곡을 연주했다... 거기서 나오는 소리 또한 가야금이나 거문고에서 나온 것과 딴 판이었다." - '처음 쓴 악보' 몇 토막

 

우리나라 이름을 지구촌 곳곳에 떨치며 한국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었던 윤이상. 모진 세파와 고난 속에서 찬란한 예술을 탄생시킨 음악적 집념과 그가 작곡한 음악이 현대 지구촌 음악사에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게 된 그 뿌리는 그가 처음 본 바이올린에서 비롯된다. 그는 그날 해질녘까지 그 청년 집에서 머무르며 쉴 사이 없이 묻고 답을 듣는다.

 

경남 통영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자라며 자연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과 사람들 사이에서 이어지는 감정에서 음악을 찾던 감수성 많은 아이. 그가 바로 윤이상이다. 그는 음악에 대한 불꽃을 피우며 한길을 꿋꿋하게 가고자 했지만 큰 벽이 가로 막고 있었다. 그 큰 벽은 다름 아닌 아버지라는 벽이었다.

 

어머니가 사준 바이올린을 들고 그 청년에게 가서 배우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아버지가 "그 끼이끼이 하는 소리 좀 그만둘 수 없겠니? 꼭 복어 울음소리 같아 듣기 싫구나!"라며 크게 꾸중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란 큰 벽 앞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열세 살 때 "왜 다른 사람이 쓴 악보를 내가 연주해야만 하지?"라는 물음을 품다가 마침내 첫 악보를 썼다. 천재작곡가 윤이상이 음악이란 첫 주춧돌을 놓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 땀까지 음악에 녹여냈던 '윤이상' 젊은 나날

 

"윤이상은 왠지 이수자에게 끌렸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백의 설원처럼 맑디맑은 샘물이 이수자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듯했다. 윤이상은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으나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게 되자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었다. / 몇 개월이 흐르는 동안 윤이상은 이수자와 점심도 먹고 저녁식사도 하면서 조심스레 데이트를 했다." - '보름달 아래 꽃 핀 사랑' 몇 토막

 

윤이상은 일제 강점기 때 첼로를 다시 배우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다. 그는 그때부터 독립투쟁을 하다가 병상에서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 뒤 시인 김상옥, 김춘수, 서양화가 전혁림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에 참여했다가 부산시립고아원 원장을 맡아 고아들을 이끈다. 1948년 서른한 살 나이에는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며 청마 유치환과 자주 만난다.  

 

1949년에는 부산사범학교로 가 그곳 합창단과 함께 오케스트라에 참여해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4중주곡을 연주하면서 왕성한 창작열에 휩싸인다. 그는 이때부터 건강이 몹시 나빠져 각혈을 하고, 2주 동안 입원하지만 세끼 식사와 산책을 하면서 병마를 물리친다. 이때 부산사범학교에서 만난 선생이 아내가 된 이수자였다.   

 

윤이상은 1950년 1월 30일, 부산 철도호텔에서 이수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해 6월 25일, 피비린내 나는 한국전쟁이 터지지만 윤이상은 군 합창단과 브라스밴드 지휘자로 일하며 포연 속에 아름다운 동요를 피운다. 마지막 한 방울 땀까지 음악에 녹여냈던 슬프고도 찬란한 이름 '윤이상'. 그가 살아온 젊은 때를 꼼꼼히 살펴보면 '윤이상 음악' 주춧돌이 보인다.

 

박선욱 시인은 "윤이상 선생은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11월에 첫 딸을 얻었으며, 1951년부터 1953년까지 70여 편에 이르는 동요를 작곡했다"라며 "이 동요들은 당시의 국민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음악교과서 6권과 전시 국민학교 노래책인 <소년 기마대> 1권에 수록됐다. 윤이상은 이때 주간 <소년 태양>의 편집국장으로 활동하며 동요 작곡뿐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잡지를 만드는 데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고 귀띔했다.

 

시모노세키에서 배 타고 남해안 근처에서 고향 통영 바라보다

 

"존경하는 윤이상 선생님. 이번 음악회에 오시기 전에 '지난 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는 것과 '앞으로 예술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편지에 써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입국하시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 '끝내 이루지 못한 귀국' 몇 토막

 

이 글은 1994년 우리나라에서 12년 만에 민간 차원에서 윤이상음악제를 준비하고 있을 때 김영삼 정부 부총리가 그에게 보낸 편지다. 윤이상은 이때 답장에서 "나는 평생 조국을 사랑해왔습니다. 병든 몸으로 귀향하는 마당에 오직 명예회복 외에는 바랄 게 없습니다. 확실한 명예회복을 공표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고향 땅을 밟지 못할 것입니다. 더 이상 다른 의사 표현을 바라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쓴다.

 

윤이상 나이 77세. 그는 이 때문에 38년 만에 자유인으로서 고국을 방문하려던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정부 방해로 그는 끝내 귀국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9월 우리나라에서는 윤이상이 없는 윤이상음악제가 치러졌다. 그는 이때 병환 중임에도 도쿄로 가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타고 남해안 근처까지 나아가 멀리 수평선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고향 통영을 바라보았다.

 

박선욱 시인은 "윤이상 선생님은 생애 마지막으로 고향에 가려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는 "윤이상 선생님은 이때 바닷길 멀리서나마 고향 땅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리움을 달래야 했다"며 "이때 찬 바닷바람을 맞은 까닭인지 폐렴이 더욱 악화돼 한 달 보름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고 말했다.   

 

윤이상은 이때 병원에서 퇴원한 뒤 아내에게 빨리 독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식민지 조국을 떠올리면 금세 치욕으로 물들곤 하던 일본 땅에 뼈를 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5년 2월 윤이상은 베를린으로 돌아온 뒤 이틀 뒤에 다시 입원을 한다. 독일 바이마르 괴테상 심사위원들은 이때 윤이상에게 괴테상을 주어 '불멸의 예술혼'에 깊은 존경을 나타냈다. 독일 자르브뤼켄방송국에서도 '20세기를 이끈 음악인 20인'에 윤이상이란 이름을 올렸다. 

 

한 마리 나비 되어 저 세상으로 날아간 천재 음악가

 

"'여보, 당신은 민족과 조국을 위해 할 도리를 다했어요. 예술가로서도 많은 일을 해냈으니 마음 편안하게 가세요.' 1995년 11월 3일, 이수자는 남편의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윤이상의 얼굴에 잠시 평안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절친한 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윤이상은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창문으로 날아갔다." - '끝내 이루지 못한 귀국' 몇 토막 

 

소설가 윤정모는 "윤이상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라며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뒤에도 평생 이 나라 산천을 그리워했고,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주주의를 신앙처럼 염원했던 순정한 사람"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박선욱이 정성껏 빚어놓은 이 책에서는 윤이상이 풀어놓은 우리 가락의 오묘함이 갈피마다 새록새록 배어나오고 있다"고 쐐기를 박았다.

 

음악학자 홍은미(한국예술종합학교, 윤이상작곡상 운영위원)는 "이 평전은 청소년과 성인 누구나 읽고 윤이상의 삶과 작품의 유기적 관련성을 더듬어볼 수 있는 귀한 책"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는 "내가 만난 윤이상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작가적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윤이상 선생만큼이나 독자에 대한 애정으로 성장의 밑거름이 되고자 하는 소망에 자신을 잊고 고뇌한 날들을 많이 보내신 듯하다"고 박수를 보냈다.

 

시인 박선욱이 펴낸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 이 책은 그 어느 시대보다 힘겹고 어려운 시대란 벽을 넘어 지구촌 음악계에서 5대 거장으로 거듭난 윤이상 선생, 우리나라가 낳은 천재 음악가를 씨줄로 엮고 날줄로 꼼꼼하게 기운 평전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이 세상을 떠난 윤이상'이 아니라 우리 겨레 마음 곳곳에 '음악으로 살아 꿈틀거리는 윤이상'을 만날 수 있다.

 

시인 박선욱은 1959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1982년 <실천문학> 제1회 신인상을 받으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그때 이후> <다시 불러보는 벗들> <세상의 출구>가 있으며, 창작동화집 <모나리자 누나와 하모니카>, 청소년 평전 <채광석>, 어린이 평전 <윤이상>, 그림책 <행복한 이티 할아버지> 등을 펴냈다.


윤이상 평전 (2017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 거장의 귀환

박선욱 지음, 삼인(2017)


태그:#시인 박선욱, #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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