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이면서 자유주의 사상 등 향후 러시아 혁명의 전야를 예고하는 걸작입니다. 특히 수많은 민중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나폴레옹을 검은 영웅으로 묘사하며, 전쟁의 비극을 전쟁으로 묘사한 역설은 더욱 각별합니다.

19세기 초반 유럽의 정세와 제정 러시아를 압축해 놓은 이 소설을 통해 톨스토이는 니콜라이 1세의 광폭한 반동정치와 외세의 침략에 결사항전하며 조국 러시아를 방어했던 농민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아 붓습니다. 농민에 대한 그의 이 같은 애정은 러시아에서 농노제가 폐지되기 수년 전 자신의 농지에서 농노제 폐지를 앞서 시행한 것처럼 뿌리가 깊습니다.

그리고 100년 전인 1910년. 톨스토이는 아내 소피아의 눈을 피해 야반도주하다시피 가출해 작은 간이역 아스타포브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죽기 1년 전 벌인 실험적인 마을공동체운동과 아내와의 갈등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와 최후 등 말년의 톨스토이의 삶을 압축하며 당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은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질감으로 비춥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간 톨스토이'

 발렌틴이 톨스토이와 함께 그가 자주 거닐던 산책길을 걷고 있다. 영화의 이 장면은 생전의 톨스토이가 걷던 길과 너무나 흡사하다.

발렌틴이 톨스토이와 함께 그가 자주 거닐던 산책길을 걷고 있다. 영화의 이 장면은 생전의 톨스토이가 걷던 길과 너무나 흡사하다. ⓒ (주)씨씨에스미디어


영화는 톨스토이 사상에 심취한 문학청년 발렌틴 불가코프(제임스 맥어보이)가 톨스토이(크리스토퍼 플러머)의 개인 비서로 채용되면서 시작됩니다. 그의 임무는 부인인 소피아(헬렌 미렌)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는 것. 톨스토이주의자의 좌장격인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폴 지아매티)가 톨스토이의 새 유언장을 만들기 위해 작전을 짠 것입니다.

야스나야 폴랴나로 온 발렌틴은 톨스토이를 만나 감개무량해 합니다. 그와 함께 톨스토이가 운영하던 마을공동체에서 마샤를 만나 첫 눈에 사랑에 빠집니다. 반면 블라디미르의 귀띔과는 달리 소피아는 '악처'로 보이지 않습니다. 톨스토이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그녀의 진심은 발렌틴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러던 중 톨스토이는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작품의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소피아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분노하고, 이 모든 게 블라디미르의 간계라며 그의 사진을 향해 총을 발사합니다. 새 유언장을 작성하던 중 소피아가 톨스토이의 노트를 몰래 훔쳐본 게 발단이 되어 급기야 톨스토이는 집을 떠나기에 이릅니다.

영화는 살아있는 성자가 아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톨스토이'를 그립니다. 그와 함께 <전쟁과 평화>를 6번이나 필사하는 등 43년간 헌신적으로 내조했던 소피아가 세계3대 악처(?)로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나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처럼 악처가 아니라는 점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새로운 시선을 끌어냅니다.

또한 영화는 평등과 박애로 귀결되는 톨스토이즘을 실천하던 마을공동체운동과 함께 블라디미르 등 일부 교조적인 톨스토이주의자들이 어떻게 그를 인간이 아닌 성자로 박제해 가는지를 날것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렇게 영화는 톨스토이 죽음 뒤의 '우상'과 함께 발렌틴의 눈으로 본 살아 생전의 '이성'을 함께 관객에게 보여주면서 그에 대한 신화를 깨트립니다.

교조주의자들로 인해 박제가 된 톨스토이즘

 톨스토이와 소피아가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영화는 톨스토이의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던 소피아에 대한 선입견을 거부한다.

톨스토이와 소피아가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영화는 톨스토이의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던 소피아에 대한 선입견을 거부한다. ⓒ (주)씨씨에스미디어


'톨스토이 신화 깨기'는 톨스토이와 소피아 간의 애증을 통해 드러납니다. 발렌틴의 시선으로 기록한 톨스토이는 위대한 작가나 성자이기 이전에 따듯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인품의 소유자입니다. 발렌틴이 쓴 보잘 것 없는 에세이까지 평해주며 글쓰기를 격려하는 그는 희망의 메신저이기도 합니다.

그런 톨스토이의 인간적인 면모는 감기에 걸렸다며 드러누운 소피아가 위문공연을 요청하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수탉울음 소리를 내고 날갯짓까지 퍼덕이며 장난치다 침대 위로 올라가 소피아를 안아주는 톨스토이는 '사랑스런 노인'일 뿐입니다. 젊은 날, 사랑을 나누며 서로를 희롱했던 톨스토이 부부의 내밀한 속살이 재현되는 이 장면은 관객들에겐 유쾌함 그 자체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것은 톨스토이주의자들이 끼어들면서 시작됩니다. 무소유와 노동의 신성함을 실천하는 마을공동체운동의 리더 블라디미르의 관심은 오직 톨스토이즘을 이 세상에 널리 알려 민중들을 계몽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차대한 사명을 앞에 두고 재산에만 관심이 있는 소피아는 철딱서니 없는 골칫덩어리일 뿐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톨스토이를 향한 소피아의 일편단심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합니다.

생전에 톨스토이는 스스로는 만족할만한 톨스토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소피아와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갈등하는 톨스토이의 모든 일정을 장악하고 톨스토이보다 더 톨스토이답게 하나둘씩 '결정'해 나갑니다. 소피아와의 대립각은 더욱 날이 서고, 아스타포브에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그녀는 톨스토이를 보지 못합니다.

폐렴 증세가 있는 톨스토이가 가출한데는 이들의 입김이 거셌던 것으로 보입니다. 톨스토이즘의 극적인 승화를 위해서는 그의 죽음을 선지자의 반열에 올려야 하고 그런 만큼 죽음 자체도 드라마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마을공동체운동을 하다 모스크바로 쫓겨난 마샤가 아스타포브로 돌아와 발렌틴과 해후하는 장면을 통해 톨스토이를 성자로 박제하는 교조주의에 대해 으름장을 놓으며 엔딩 크레딧을 올립니다.

지식인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했던 톨스토이즘

 자신의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할 것은 선언하는 톨스토이는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을 무엇보다 경멸했다. 가출한지 10일 만에 죽은 톨스토이는 유언대로 묘비하나 없는 소박한 무덤에 안치된다.

자신의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할 것은 선언하는 톨스토이는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을 무엇보다 경멸했다. 가출한지 10일 만에 죽은 톨스토이는 유언대로 묘비하나 없는 소박한 무덤에 안치된다. ⓒ (주)씨씨에스미디어


영화는 <전쟁과 평화>의 한 구절인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오직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를 전제로 오프닝을 엽니다. 톨스토이가 일생을 바쳐 작품과 사상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사랑 즉, 평등과 박애였다는 점을 분명히 못 박아 두는 셈입니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의 여명이 동터 오르자 짜르 체제의 야만에 협조하는 개량주의를 거부하고,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글로 맞서 싸웠던 톨스토이즘으로 뒷받침됩니다.

<전쟁과 평화>처럼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을 최상의 리얼리즘으로 성취해 낸 뒤 러시아 혁명에 녹아듭니다. 민중들에게 무관심한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다 파문당하고, 모스크바 빈민굴에서 대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캠페인을 조직하고, 젊은 시절 고향에서 농민학교를 운영하며 브나로드를 실천하는 등 행동하는 인텔리겐치아의 표상이기도 했던 톨스토이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었던 셈입니다.

일찍이 레닌은 "톨스토이 이전에 러시아 문학에서 진정한 농민의 모습은 없었다"며 "그는 러시아 혁명의 거울"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권력에 저항하고 전쟁을 반대하면서도 혁명의 폭력성을 경계했던 평화주의자 톨스토이의 문학은 스탈린 시절에도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남게 됩니다.

마을공동체에서 청빈한 삶과 금욕으로 자신을 정화하던 자유인 톨스토이가 아이들로부터 해바라기 꽃을 선물로 받고 활짝 웃는 모습은 평화로움을 상징합니다. 이런 톨스토이의 삶은 비폭력 불복종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육체노동의 신성함과 비폭력에 대한 톨스토이의 신념은 간디에게 모범이 됩니다. 간디가 톨스토이가 죽던 해에 남아공에 '톨스토이 농원'을 설립해 실천함으로써 톨스토이즘은 부활합니다.

야만과 광기에 맞선 리영희 선생의 부활을 꿈꾸며

'스스로 선택한 가난'인 청빈이야말로 진실을 추구하는 글쓰기의 힘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스승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65살이 되어서야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문명의 혜택을 받아보았다"던 리영희 선생입니다.

가혹한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가혹한 시대를 살며 권력과 조중동의 화간질을 깨기 위해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맞섰던 선생에게 그러나 정작 가혹했던 것은 글을 쓰는 자신이었습니다. 글의 진실은 사실에서 나오고 그것은 발로 뛰는 자료 위에 있다던 선생이 글쓰기의 고통 끝에 중풍으로 쓰러진 일화는 글쓰기의 엄격함을 상징합니다.

대쪽같이 살아 온 선생의 삶은 언론인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글을 쓰는 모든 이들에게 어떻게 글을 쓰며, 무엇을 쓸 것인지를 보여준 '죽비소리'나 진배없는 것입니다.

또한 생전의 선생은 톨스토이처럼, 지식인이 맑은 영혼을 지닌 진정한 자유인이라면 사회적 실천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더욱이 야만과 광기가 깊어지는 이명박 정부에서 선생이 남긴 진실과 이성은 더욱 간절해집니다. 그래섭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생전 톨스토이의 모습을 담은 흑백영사기가 돌아가며 톨스토이를 되살리듯, 천도를 축원하는 선생의 49재를 앞두고 영계(靈界)와 명부를 건너 뛰어 시대의 한 복판에서 다시 '부활'할 리영희 정신을 고대하는 것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상'에 맞선 '이성'은 여전히 빛나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리영희 간디 전쟁과 평화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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