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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대구 진골목의 대부호였던 서병국이 살던 저택으로서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 해방 후 대구 화교 협회에서 사들였다.
▲ 대구 화교협회 원래는 대구 진골목의 대부호였던 서병국이 살던 저택으로서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 해방 후 대구 화교 협회에서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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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종로와 똑같은 이름의 거리가 대구에도 있다. 대구의 종로는 한때 이 지역을 대표했던 거리였고,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종루가 있던 거리'라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1970년대 까지 수많은 요정과 화교 상권 등이 포진해 인파가 북적거리는 활기찬 거리였지만 이제는 가구와 도자기, 전통 문화 거리로 탈바꿈했다.

이러한 대구 종로 거리의 역사 중 대표적인 하나를 꼽으라면 화교 문화라는 이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현재도 이곳에는 화교 음식점이 몇 군데 있어서 옛 맛을 그리워하는 노인이나 그들의 손을 잡고 어린 시절 들른 기억을 따라 음식을 먹으러 오는 중장년들로 분주하다.

대구 종로거리의 역사와 한국 화교의 역사

'화교(華僑)'. 중국을 뜻하는 華, '타향살이하다'는 뜻을 가진 橋가 합쳐진 의미로서 말 그대로 중국 국적을 가지고 다른 나라에 정착해 살아가는 중국인을 뜻한다. 그간 우리는 그들을 화교라고 부르기 보다는 '짱께', '왕서방'이라 칭하는데 더 익숙했다. 이렇듯 화교 비하 발언이 이 땅에 존재할 동안 화교는 한국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19세기 말인 1882년 산둥성 출신 중국인 40명이 청나라의 보호 아래 조선 땅에 들어온 것이 시초다. 이들은 청나라 조계지(집단거주지)에 거주하며 비단, 광목, 경공업에 종사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중국은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였고, 이를 사대주의 정신으로 일관한 조선이었다. 이후 1894년 일본 전쟁에서 크게 패한 중국은 쇠퇴의 일로를 걷게 된다.

또한 1961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으로 화교들은 땅 한 평, 집 한 채 가질 수 없었고,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하더라도 항상 화교라는 딱지가 따라 붙었다. 이후 2002년에 가서야 비로소 영주권을 얻을 수 있었고,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이렇듯 한국 화교 역사 100년 동안 해외 화교들과 단절된 네트워크 및 한국 정부의 핍박으로 경제 기반도 약한 편이다. 현재 미국, 일본, 영국, 호주, 동남아 등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화교의 수는 4천만 명 이상, 우리나라에도 2만 명이 넘는 화교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00년이 넘은 대구 화교의 역사

이제 대구 화교 역사도 100년이 넘었다. 대구에 화교가 처음 정착한 것은 1905년. 당시 경부 철도 개설 등의 이유로 대구가 조선 3대 상업도시 중 하나였던 것이 화교 정착의 발판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에 대구경북의 화교 인구는 1384명으로 늘었다. 국내 화교 인구가 1만9963명이었다는 조선총독부 기록에 비춰보면 적잖은 숫자다. 화교 경제는 해방 이후 급속도로 확장된다. 미 군정의 우대를 받아 경제력을 키운 데다 한국전쟁 때 서울과 인천의 화교들이 대거 대구로 내려온 것이 그 연유이다. 전쟁 후 중국과 국교가 단절되면서 이동할 통로를 잃은 국내 화교는 1960년대까지 안정기를 맞는다. 대구 화교 인구도 1967년에 3108명으로 최대에 이르렀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 화교들이 진골목의 부자인 서병국 저택을 사들여 호교 협회로 삼고 그 옆에는 학교를 지었다.

그러다 1970년대 이후 대구 화교는 급격하게 쇠퇴했다. 화교 자본에 대한 국내 규제가 심해지면서 대만, 미국, 호주 등지로 대거 이주한 것이 그 원인이다. 화교들이 운영하던 양조장과 주물공장 등도 자취를 감추었고 중국식당도 거의 사라져 현재 대구 종로에는 3곳만 영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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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교 학교 학생들의 서예와 글짓기 작품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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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600여 명에 이르렀던 화교 학교 학생 수는 현재 100여 명도 되지 않는다. 우리처럼 그들도 한 자녀만 낳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을 뜨고 있기에 취학 아동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중국이 세계의 핵으로 부상하면서 조기 중국어 공부를 위해 화교학교에 입학하는 한국 아이들이 많아져서 학교라는 이름이 무색해졌다.

화교 100년사의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은 땅을 살 수도, 은행거래도 할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노인이 되어도 한국 사람들과 달리 경로우대 혜택을 받지 못했다. 화교 잡화상점에서 일하면서 비단을 팔거나 중국 음식점을 하며 화교 역사를 만들었던 1세대들이 노환으로 거의 사라진 지금은 2, 3세대가 그 골목의 주역이 됐다.

하지만 한국 화교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화교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과 '제대로 된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 한국' 에 대한 섭섭함은 극복하지 못한다. 하지만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으며 수년 전부터 지역 불우이웃과 소외계층의 후원과 소록도 주민 음식지원 등 지역 사회의 모범이 되고 있다. 또한 해마다 대구 종로 거리에서 화교 축제를 개최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근본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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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교학교 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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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화교 사회의 시대별 특징

1) 제1기(1905년~1930년)
이 시기는 빠른 인구증가와 화교경제의 발전기다. 1928년 화상공회가 설립되고, 화교사회가 형성된다.

2) 제2기(1931년~1945년)
1931년 7월 국내배화사건, 1934년 조선총독부의 화교 입국 제한 조치, 1937년 중일 전쟁 등의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화교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는 쇠퇴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중국 본토 왕래가 어려워지자 1943년 대구화교소학교가 설립되는 계기가 된다.

3) 제3기(1945년~1955년)
대구화교는 미군정기(1945.9-1948.8) 에 연합국 국민으로 우대를 받아 경제력을 확대한다. 화교 인구의 증가로 대구 화교 소학교 신축 교사를 구입하고, 화상공회 건물을 현재의 대구화교협회 건물로 이전한다. 한국전쟁 때 인천, 서울의 화교 피난민이 대거 대구로 내려와 인구가 급증한다.

4) 제4기(1955년~1970년)
중국 대륙과의 교류 단절로 큰 국내 이동이 없어지면서 대구 화교 사회는 보이지 않는 안정기를 맞이한다. 1958년 대구화교 중학 설립, 1965년 현 화교중학교 부지로 이전, 1968년 고등부가 설립된다.

5) 제5기(1970년~2005년)
이 시기는 대구화교의 이동기다. 화교경제의 근간이던 중화 요리점의 침체와 해외 이민의 자유로 1970년대와 80년대에 화교들은 대량으로 대만, 미국, 호주 등지로 이주한다. 1990년대 들어 한중 국교 수립이 이뤄지면서 중국 산둥성으로 이주하는 화교가 늘어나고 있다.

화교, 중국 건축을 대구에 소개하다

1913년 화교 청년 모문금은 천주교 신도 서상돈(독립운동가)으로부터 기증받은 대구 남산동 3만3000㎡(1만여평)의 부지에 성유스티노 신학교를 건축했다. 1930년대 공업에 종사한 화교는 약 2만 명으로 상업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 가운데 토목, 건축 관련 종사자가 56.5%로 높았다.

화교 건축가 모문금이 설계
▲ 대구 화교협회 화교 건축가 모문금이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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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을 인정받은 모문금은 교구청 주교관, 성바오로수녀원, 성모당 등 종교 건축물들을 잇달아 짓는다. 그들은 남산동 가톨릭대학 구내에 벽돌공장을 두고 벽돌을 직접 제작해 사용했다. 여기서 만들어진 벽돌은 대구 지역 일본인 관공서 건축에까지 쓰였다고 한다. 현재 대구 화교협회 건물 역시 그의 작품이다.

현재 대구 화교 인구는 700여 명이다. 그들은 우리의 오랜 이웃이며 중국의 개방과 발전으로 인해 더욱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이다. 단일민족을 자랑으로 내세우던 한국인들에게 이제 한국인끼리만 뭉쳐서 산다는 말이 더 이상은 무색해지고 있다. 곳곳마다 넘쳐나는 외국인들, 그들과 데이트하는 젊은 층들은 이제 한국 사람만을 이웃이라 여기는 의식은 굳이 가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 땅에 이주 한지 100년이 넘는 이웃, 화교들에 대해 새롭게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태그:#대구화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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