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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귀향길. 고향집에 들어서기 전, 차를 도로 한쪽에 세웠다. 오랫동안 비가 내렸지만, 들에 있는 나락들은 벌써 누렇게 익어 간다. 아내와 아이들을 차에서 내리게 했다.

"아빠 여기 어디에요? 여기 할머니 집이 아니잖아요?"

큰 아이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애들아, 여기 내려봐. 저기가 우리 논이야. 시골서 매번 할머니가 쌀 보내주시지? 저 논에서 나는 거란다. 저기 나락을 찧으면 쌀이 되는 거란다."

아이들이 신기한 듯 논두렁으로 내려갔다.

"그래 잘 봐둬라. 이 논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피땀으로 가꾼 땅이고, 이제까지 우리에게 쌀을 만들어 주던 땅이란다. 그렇지만 내년에는 이쪽으로 도로가 나고 할머니는 더 이상 쌀을 보내줄 수 없단다."

40년 동안 우리에게 쌀 주던 논, 도로가 되다

40년 넘게 우리 식구들에게 밥을 주고, 자식 공부시키데 큰 보탬이 되었던 땅. 그 땅을 아이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논에는 논 중간으로 길이 난다는 표식의 파란 깃발이 꽂혀 있었다. 올가을에 나락을 베고 나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되는 것이다.

국가에서 현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할 예정이고, 내년 봄부터는 공사를 해야 되기 때문에 보상을 조속해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것이 보상을 맡고 있는 한국감정원의 설명이었다. 개인이 어떡할 수 없는 국가사업. 아버지, 어머니가 밥을 굶으며 사들였다는 40년도 더 된 논은 이제 국가에게 팔려 아스팔트가 깔리고 나면 더 이상 어떤 농작물도 키울 수 없는 불모의 땅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광화문 견인차들이 도착해 물에 잠긴 차들을 한 대씩 견인하는 중' (3755님이 엄지뉴스에 전송해주신 사진입니다)
 '광화문 견인차들이 도착해 물에 잠긴 차들을 한 대씩 견인하는 중' (3755님이 엄지뉴스에 전송해주신 사진입니다)
ⓒ 3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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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에 서울 등 중부지방이 물난리가 났다. 시골에서 추석 연휴을 보내고 서울에 올라와 보니 TV에서 보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했다. 서민들의 보금자리인 반지하 집들이 물에 잠겼고, 중소기업에서 생산된 수천만 원어치 생산품이 하루 아침에 쓰레깃더미로 변했다. 대한민국의 심장이라는 광화문 광장이 물에 잠겼고, 사진 속 시청 광장에선 공들여 심어 놓았던 잔디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난 뒤, 서울 물난리를 두고 책임 공방이 뜨겁다. 야당과 시민단체에서는 광화문 광장 등을 새롭게 조성하면서 가로수 등을 뽑아내고 물을 흡수할 수 있는 흙을 전부 콘크리트로 덮어 빚어진 인재라고 주장하고, 서울시에서는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는 폭우로 인한 천재지변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이 내린 비가 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천재지변이라 운운하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천만 서울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서울시가 보여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빗물 관리, 치수에 관한 문제는 광화문 조성 당시 많은 전문가와 시민단체에서 제기한 문제고 콘크리트 바닥이 물 한방울 흡수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하늘 탓, 날씨탓만 하고 있으니... 앞으로 더욱 자주 기상이변이 나타날 텐데, 폭우와 폭설 등에 어떻게 대비할지 걱정이다. 더군다나 빗물처리 능력(시간당 75mm)을 의식해 강수량 71mm를 90mm로 부풀려 발표했다고 하니, 대책보다는 하늘탓으로 책임만 떠넘기려는 서울시의 처사는 어떤 해명에도 지탄을 면하기 어렵다.

농업 등한시한 정부... 이미 예견된 사태

최근 배추를 비롯한 주요 채소값이 폭등하고 있는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러온 한 시민이 배추의 가격과 품질를 살펴보고 있다.
 최근 배추를 비롯한 주요 채소값이 폭등하고 있는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러온 한 시민이 배추의 가격과 품질를 살펴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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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서울시처럼 도깨비 씨름 같이 얼렁뚱땅 책임을 떠넘기려는 처사를 보이는 이들이 또 있다. 바로 정부다. 추석 전 '물가 특단의 대책' 운운하던 정부는 추석 이후에도 채솟값, 과일값 등이 계속 고공행진을 하자 이제는 하늘과 날씨에 그 책임을 넘겨버렸다.

야당에서 '한 포기에 1만5000원이나 하는 배춧값이 4대강 사업 때문에 경작지가 축소된 탓이 아니냐'고 하자 농림식품부는 9월 29일 보도자료를 내 "채솟값 폭등의 원인이 4대강 사업으로 재배면적이 줄어 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며 봄철 저온, 여름철 폭염, 잦은 강우 등 이상 기온으로 작물 생육 불량, 병충해 피해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나섰다.

물론 날씨탓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올 여름이 유난히 무덥고 비가 많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때문에 작황이 좋지 않다는 것도, 품귀 현상이 빚어져 채솟값이 폭등하고 있다는 것도 무조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게 다일까? 이런 논리들만으로 채솟값 폭등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논리가 충분한 설득력을 얻으려면 기상 이변이 있었던 해에는 어김없이 배춧값이 이렇게 올랐어야 한다. 하지만 내 기억으론 이제껏 배추 한 포기가 1만5000원이 넘었다는 소릴 들어보지 못했다. 비단 배춧값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과 2개에 5천 원, 파 한단에 6천 원, 무 하나에 4천 원.

배춧값 폭등의 원인을 섣불리 4대강 문제와 연결하고 싶지는 않다. 박병석 민주당 의원은 농민단체의 주장으로 채소재배 면적 20% 감소, 국토해양부 자료로 16% 감소되었다고 했다. 정부에서는 4대강 사업으로 줄어든 채소 경작지가 2.2%로 가격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한다.

16일 오후 부산광역시 사상구 낙동강 하구 삼락둔치에서 '4대강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예정인 가운데, 농민들이 수확을 포기한 채소밭 부근에서 굴삭기가 땅을 파헤치고 있다.
 16일 오후 부산광역시 사상구 낙동강 하구 삼락둔치에서 '4대강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예정인 가운데, 농민들이 수확을 포기한 채소밭 부근에서 굴삭기가 땅을 파헤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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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현재 채소 재배면적이 얼마나 줄었느냐가 아니다. 앞으로 점점 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줄어드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농지가 줄어들면 농사를 짓는 농민이 감소할 것이고, 따라서 사회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부는 너무나 태연하게 '채소 경작지의 2.2%만 줄어들었기 때문에 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면서 날씨와 하늘탓만 하고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고사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웃음꺼리가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어떤 정부도 '농업'을 국가의 기반 산업으로 생각하고 국민의 최소한 먹을거리라도 확보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관광용 도로를 낸다고 하면, 당연히 농지는 보상비 몇 푼에 내어 놓아야 했다. 지자체들마저도 앞 다투어 온천 개발이나 수입 사업을 내세워 농지를 잠식했다. 세계적 식량전쟁에 대비하여 최소한의 자급기반이라도 갖추어야 한다는 논리는, 차 한대 팔면 이익이 얼마인데 쌀값, 과일값 때문에 개방에 딴지를 거냐고 몰아 붙였다.

이런 정책이 몇 십 년 동안 계속됐다. 그 결과 농지는 더 이상 농사를 지어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농민의 자본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그나마 남아 있는 농민들도 '올해는 어떤 작물을 해야 농약값이라도 건질 수 있을 것인가' 점 치듯이 파종 품목을 선택해왔다. 잘 선택하면 그나마 농약값을 갚고 돈 좀 만지지만, 실패하는 이들은 풍성한 배추밭을 갈아엎고 쪽박을 차는 일을 반복해서 겪는다. 이게 농촌의 현실이다. 도시 서민들의 먹을거리 시장은 이렇게 취약한 농업 기반 위에서 형성되어 왔다.

약발 안 먹히는 물가 정책... 정부의 자기 반성이 우선

배추값 폭등을 의식한 이명박 대통령이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를 식단에 올리라고 발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배추 1포기가 8,800원에 양배추 1통은 9,480원에 팔리고 있다.
▲ '배추'보다 비싼 '양배추' 배추값 폭등을 의식한 이명박 대통령이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를 식단에 올리라고 발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배추 1포기가 8,800원에 양배추 1통은 9,480원에 팔리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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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으로 줄어든 채소 재배면적이 얼마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또 폭등하는 채소값이 4대강 탓인지, 날씨탓인지 판단하는 것도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됐든 정부의 물가관리 능력은 후한 점수를 받기 어렵다. 날씨탓으로 배춧값이 오른 거라는 정부의 발표도 책임면피용으로 생각하는 국민이 많다.

정부의 물가 대책이 나올 때마다 물가는 오히려 오른다며, 급조된 물가 대책 좀 그만 내어 놓으라는 볼멘소리도 많다. 정부의 물가 정책이 이런 식이라면 약발이 먹힐리도, 서민의 호응을 받기도 힘들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앞으로 닥칠 김장철에 대비한 뽀족한 대안이 없다는 데 있다. 자칫, 김장 없는 겨울철이 되는 게 아니냐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무와 파, 배추 같은 채소류를 공장에서 밤새 기계 돌려 찍어낼 수는 없으니, 하루아침에 특별한 대책을 내놓는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정부는 물가가 언론의 관심사가 될 때마다 모든 것을 일거에 해결할 것처럼 처방을 내놨다. 그러나 그것은 임기응변식 땜질 처방이었고 물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거나 더 높게 뛰어 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관저 주방장에게 배춧값 폭등을 고려해 자신의 식탁에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를 내놓으라고 지시한 것으로 30일 알려졌다. 농식품부 제2차관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김치 한 포기 덜 담그자"는 제안을 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오죽 절박했으면 이런 코미디 같은 일들이 벌어질까'란 생각도 들지만, 배춧값이나 양배춧값이나 오르긴 매한가지다. 언론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지자 '실물 경제를 제대로 알고나 있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농식품부 차관의 '김치 한 포기 덜 담그자'는 제안도 그렇다. 배춧값이 폭락하면 배추 더 먹기 운동을 벌이고, 돼지고기값이 떨어지면 돼지고기가 쇠고기보다 좋다고 홍보하더니…. 배춧값이 오르니, 이제 조금만 먹자고 한다. 농식품부 차관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서민들은 김장 담그는 양을 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관료라는 분이 방송에 나와 이것 먹어라, 저것 줄여라 하는 것은 그리 보기 좋지 않다. 유신시대 '혼식 장려 운동'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물가 대책이 항상 이런 식으로 즉흥적이니 효과가 있을리 만무한 것 아닌가? 날이 갈수록 물가는 치솟고 정부의 고강도 처방이 약발이 먹혀들지 않는 형국. 정부는 이쯤에서 생색내기식 물가정책 전반을 다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우선 정부의 자기 반성이 먼저다. 물가가 들썩일 때마다 '국제 유가탓' '환율탓' '날씨탓'으로 책임을 모면하려는 정부는 반성을 해야 한다. 처방의 주체는 누가 뭐래도 정부다. 정부가 물가 폭등 요인을 밖에서만 찾으려 한다면 물가 정책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억지로 가격을 맞추지 말고, 국민의 이해 구해라

배추값 폭등으로 인해 포장김치 공급이 원활하지 않는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 대형마트 포장김치 코너에 '업체측 공급사정으로 인해 1인당 1박스만 판매한다'는 안내문이 붙여 있다.
 배추값 폭등으로 인해 포장김치 공급이 원활하지 않는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 대형마트 포장김치 코너에 '업체측 공급사정으로 인해 1인당 1박스만 판매한다'는 안내문이 붙여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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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춧값 폭등 사태만 해도 그렇다. 4대강 사업으로 인한 경작지 감소가 배춧값 폭등의 요인이 될 수 없다고 강변하기보다는, 고온과 폭우로 인한 작황 부진에 경작지 감소가 얼마나 배춧값을 끌어 올리데 영향을 줬는가를 면밀히 분석해서 대안을 마련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또 현재 농업기반이 대한민국의 식량안보를 책임질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비록 효과가 금방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이런 근본적 인식의 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물가는 항상 불안하고 농민이나 도시서민들은 항상 폭등과 폭락의 널뛰기에 고통당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물가정책은 이렇게 할 테니까 따라 오라는 식이어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작황이 좋지 않아 배춧값이 오를 수밖에 없는 사정이면 나중에 나올 물량까지 끌어내어 가격을 맞추기보다는, 당장은 비난을 받더라도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편이 나은 정책일 수 있다.

추석 전 대형마트 배추 세일 때 남들이 버리고 간 배추 겉잎을 모으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매일 폐지를 주우러 다녀 안면이 있던 할머니는 배추 겉잎을 모아 겉절이를 해 드실 거라며 남들이 버리고 간 배추 겉잎을 비닐에 담고 있었다. 정부가 물가에 대한 단기적인 처방을 내어 놓는다면 우선 이런 분들에게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시세로는 김장을 엄두도 내지 못할 이런 사람들. 이 사람들의 겨울나기에 정부는 무엇을 해줄 것인가가 물가정책의 목적이 돼야 하지 않을까?


태그:#채솟값, #물가 정책, #4대강, #서민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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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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