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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도시 세종'이라는 대형간판 왼쪽 뒷편으로 첫 마을 사업지의 모습이 안개에 묻혀 희미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 건설이 한창 진행중인 세종시 '행복도시 세종'이라는 대형간판 왼쪽 뒷편으로 첫 마을 사업지의 모습이 안개에 묻혀 희미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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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라지만 한가위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9월 서해안을 강타한 태풍 '곤파스'의 위력 앞에 무기력하게 애지중지 키우던 자식같은 농작물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삶의 터전인 집마저 무참하게 날아가버린 사람들입니다.

긴 연휴탓에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들은 여행은커녕 모두가 즐겁고 풍성하기만 한 추석이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전합니다.

추석 연휴 내내 고향을 찾은 자식들과 함께 밭을 정리하고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며 이들은 한숨 속에 유쾌하지 못한 추석을 보냅니다.

이들과 함께 이번 추석이 반갑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행정중심복합도시(아래 '세종시') 건설지역에 포함되어 보상을 받고 고향을 떠나야 했지만 아직까지도 고향마을을 지키며 쓸쓸한 추석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로 제 고향마을인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 주민들입니다. 우리 마을 이외에 인근 전월산 기슭 양화리 등 세종시에 포함된 몇몇 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를 구성하며 수십년을 같이 살아온 마을사람들의 대다수가 고향을 떠났지만 아직까지도 이들은 풀로 뒤덮인 고향마을에 남아 쓸쓸한 추석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들이 왜 떠나지 못하고 폐허로 변해버린 고향마을에 남아있는 걸까요?  추석을 맞아 고향을 떠난지 2년 반에 고향마을을 찾았습니다.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고향길, 흙먼지 날리던 옛길도 사라지고

'지방행정타운'이라는 간판 뒤로 붉은 선안이 제가 졸업한 금호중학교의 모습입니다. 이 길이 예전 마을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질주하던 길인데 지금은 간판 뒤로 지나갈 수 없게 돌로 막아버렸습니다.
▲ 사라진 옛길 '지방행정타운'이라는 간판 뒤로 붉은 선안이 제가 졸업한 금호중학교의 모습입니다. 이 길이 예전 마을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질주하던 길인데 지금은 간판 뒤로 지나갈 수 없게 돌로 막아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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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추석날 아침. 이른 시간에 차례를 지내고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아침을 먹었습니다. 음복주도 한잔씩 나누어 마시고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차례상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여느 때 같으면 이맘때쯤 집안 형님들이나 이웃들이 각자의 차례를 마치고 우리 집으로 모여들어 함께 술한 잔씩 마시며 정겹게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제각각 뿔뿔이 흩어져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이어서 고향을 떠난 이후로는 명절이 되면 가족들끼리만 명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향마을을 떠나 세종시 인근 지역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터라 가족들과의 아침을 즐긴 뒤 갑자기 고향마을의 모습이 궁금해 곧바로 고향마을로 향했습니다.

2년여 만에 찾는 고향길이었지만 왠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예전에 먼지를 날리며 하루에 7번 정도 운행하던 버스길도 사라졌고, 이맘때 쯤이면 황금들녘을 자랑하던 들판도 흙으로 뒤덮여진 터라 더욱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예전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려는데 그 길은 이미 큰 돌로 막혀있고, '지방행정타운'이라는 대형 간판 하나가 길을 막아섰습니다. 대형간판 뒤로는 제가 졸업한 중학교가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한 채 변함없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길지 않은 세월 동안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린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왼쪽 뒤로 보이는 산이 전월산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 어린시절 물장구치며 놀던 금강입니다. 아직까지 4대강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듯 옛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 전월산과 금강 왼쪽 뒤로 보이는 산이 전월산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 어린시절 물장구치며 놀던 금강입니다. 아직까지 4대강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듯 옛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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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차를 돌려 다른 길을 물색하고 있던 중 또 다른 차 한 대가 금강변을 따라 새로 조성된 도로를 달려 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저 길이 새로난 길이구나'하는 생각에 그 차를 따라갔습니다.

조금은 변했지만 아직까지는 4대강 사업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의 생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금강의 모습을 감상하며 고향마을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습니다.

마을입구에 서 있는 표지석과 표지석을 둘러싸고 있는 호박잎. 마을 앞에 펼쳐진 황금들녘도 그대로인데 마을 안은 폐허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 꿋꿋이 서 있는 마을 표지석 마을입구에 서 있는 표지석과 표지석을 둘러싸고 있는 호박잎. 마을 앞에 펼쳐진 황금들녘도 그대로인데 마을 안은 폐허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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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고향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고향의 황금들녘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어릴 적부터 모내기를 하고 추수를 했던 우리 논이 눈앞으로 스쳐지나가고 마을 진입로에 들어서자 '반곡리'라고 선명하게 적힌 표지석이 아직까지도 고향마을의 상징처럼 꿋꿋이 마을 입구를 지키고 서 있습니다.

폐허로 변한 고향마을..."이거 정말 씁쓸하구만"

붉은 락카로 적힌 숫자가 의문을 더하고 있는 가운데 아직까지 형채를 유지하고 있는 폐가. 이러한 폐가때문에 고향마을은 더욱 음산하게 느껴집니다.
▲ 폐가에 적힌 숫자의 의미는? 붉은 락카로 적힌 숫자가 의문을 더하고 있는 가운데 아직까지 형채를 유지하고 있는 폐가. 이러한 폐가때문에 고향마을은 더욱 음산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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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을진입로에 들어서 고향집에 가는 심정으로 차분하게 차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향사람들이 떠난 마을길은 어른키만한 풀들이 길을 뒤덮어 차 두 대가 지나던 길이 소로길로 변해 있었습니다. 아직 마을에는 4~5가구의 고향분들이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그런지 고향마을은 점점 온기없는 마을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마을안에 들어서자 아직까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집들이 눈에 들어왔고, 마을버스가 종점에 도착해서 버스를 돌리던 마을의 광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예전 학교에 등교하기 위해 책가방을 메고 재잘재잘대던 마을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인적은커녕 개짖는 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옛날 웅장한 교회종소리를 울리며 새벽을 알렸던 교회터. 지금은 건물은 사라지고 나팔꽃과 잡초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 풀로 뒤덮인 옜 교회터 그 옛날 웅장한 교회종소리를 울리며 새벽을 알렸던 교회터. 지금은 건물은 사라지고 나팔꽃과 잡초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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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슈퍼(일명 '연쇄점')는 건물 외관만 남은 채 텅 비어 있고, 새벽녘 잠을 깨우던 교회의 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교회터에는 나팔꽃만이 외로이 앞마당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씁쓸함을 뒤로 하고 소로길을 따라 옛 집터로 향했습니다. 옆집과 윗집은 아직까지도 이웃들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처럼 멀쩡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사를 나간 후 단 며칠만에 무너져버린 시골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곳에는 무성한 풀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커다란 열매를 맺은 호박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집은 사라지고 지금은 무성한 잡초와 어머니께서 심은 감나무만이 집터를 꿋꿋이 지키고 있습니다.
▲ 집터를 외롭게 지키고 있는 감나무 집은 사라지고 지금은 무성한 잡초와 어머니께서 심은 감나무만이 집터를 꿋꿋이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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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집터 부근에는 이사하면서 안타깝게 생각했던 돌아가신 어머니가 심어놓은 감나무가 열매를 맺은 채 마치 시골집의 수호신처럼 외롭게 홀로 지키고 서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마치 어머니의 분신을 보는 듯 감도 만져보고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는 잎사귀도 조심스럽게 매만져 보았습니다. 정성껏 나무를 심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서요.

폐허속에서 들려온 인기척, 고향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이웃들

이웃집 형 아들이 집터를 보기 위해 마을을 찾은 저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기척이 끊긴 지 이미 오래돼 아이도 반가운 모양입니다. 아이 뒤로 수십채의 가옥이 있었지만 지금은 풀로 뒤덮여 있습니다.
▲ 오랜만에 만난 이웃 이웃집 형 아들이 집터를 보기 위해 마을을 찾은 저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기척이 끊긴 지 이미 오래돼 아이도 반가운 모양입니다. 아이 뒤로 수십채의 가옥이 있었지만 지금은 풀로 뒤덮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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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에 빠져 집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시골집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을 즈음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바로 윗집에 살고 있는 이웃이었습니다. 이웃집 마당에는 추석명절을 맞아 찾은 이웃집 형들과 자녀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던 형들인지라 부자간의 달콤한 대화에 꺼리낌없이 끼어들었습니다.

"추석 쇠러 오셨시유? 오랜만이네요."
"너는 이사갔다면서 웬일이여?"
"차례 지내고 어떻게 변했나 잠깐 들렸시유."
"아부지는 잘 계시고? 우리도 여기 나가야 되는데... 엄니가 나가랄 때까지 계신다고 해서."
"밤에는 무섭겄시유. 다 이사가서 개 짖는 소리도 안들리는데."
"집에서만 있다가 가는거지 뭐. 마을에 한 댓집(다섯집) 남은 거 같던데."


이웃집 형들과의 오랜만의 회포는 안타까움과 더한 채 별다른 대화없이 싱겁게 끝났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작별의 인사를 한 뒤 다시 마을을 돌고 있는데 이미 마을을 떠났지만 자신들의 옛 집터에서 부지런히 호박잎을 따고 있는 아주머니들을 만났습니다.

"안녕하셨시유. 웬일이시래유?"
"호박잎따러 왔지. 아직까지 친척이 여기 살기두하구."


폐허가 된 마을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주민 중 산 바로 아래에 살고 있는 아저씨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산 아래는 더 무서울 법 한데 농사를 짓느라 아직까지 살고 있는 듯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들은 그 아저씨가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고향인 것도 있지만 보상금을 얼마 받지 못해 이사할 돈도 없고 또 이사를 한다 해도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나중에 정 갈 곳이 없으면 도시에 살고 있는 자식에게 갈 것이라는 말도 전했습니다.

'다들 이사할 정도의 충분한 보상금을 받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셨구나'하는 생각에 씁쓸함이 밀려왔습니다.

단순히 고향마을에서 이사를 떠난 후 옛 집터를 보기 위한 의도로 찾은 마을이었건만 아직까지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웃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먼저 고향을 떠난 미안함과 함께 이런저런 사정으로 폐허로 변해버린 마을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이웃들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듬성듬성보이는 흉가에 풀로 무성하게 뒤덮인 고향마을을 뒤로 하고 나오는 길. 세종시 건설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고향마을을 생각하니 갑자기 밀려오는 서운감과 함께 마치 이번 고향 방문길이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느낌에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또한, 추석 연휴에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중장비가 바삐 움직이며 세종시 건설은 착착 진행되고 있지만 이주할 돈이 없어 아직까지도 고향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쓸쓸한 명절을 보내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씁쓸하기만 합니다.


태그:#반곡리, #세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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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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