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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에서 사진기가 고장이 나 버렸다.  둘째날 저녁부터 다음날 휴가 마지막까지 사진으로 담지 못하고 대신 마음으로 풍경을 담아왔다.)

지리산 능선을 닮은 섬진강
▲ 섬진강 지리산 능선을 닮은 섬진강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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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더위는 연속이다. 오늘은 휴가의 마지막날, 아침을 지어 먹고 차 한잔을 마시는 여유를 부린다.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철수 준비다. 텐트를 칠 때는 몰랐는데 철수를 하려고 보니 이것 저것 잡다한 것들이 많기도 많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지고 왔는데도 그렇다.

피아골을 빠져나와 본격적으로 섬진강변으로 향한다. 강변에 드문 드문 박힌 사람들, 재첩을 잡는 중이다. 넓은 모래밭에 햇볕이 가득하다. 인정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는 땡볕 아래를 감당하지 못하겠어서 굳이 사양하는데 딸아이랑 남편은 ' 그 유명한 섬진강 재첩'을 잡겠다고 강변의 모래밭을 가로지른다.

지리산 속에서 사흘동안 행복했었다
▲ 지리산 지리산 속에서 사흘동안 행복했었다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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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녀석과 나는 강변을 바라보는 곳에 조성된 하동송림에 들었다.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서 이곳은 땡볕에 노출된 세상과는 다른 신선이 사는 장소같다. 송림사이를 한바퀴 돌아나오니 작은 서가가 보인다. 아무나 책을 빌려 읽어도 된단다. 송림공원안, 작은 도서관이다. 기증한 책들이라 옛날 책들이 많다. 그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박경리씨 토지. 조금 전에 지나온 하동의 악양들판을 지나오며 안 그래도 토지 얘길 했던 차다.

나는 가벼운 에세이집을 고른다. 천양희씨의 에세이집을 들고 송림 사이 벤치에 눕는다. 소나무 사이를 거쳐온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고 싶어서다. 이번 휴가 중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듯 하다. 두 손 가득 재첩을 그러안고 의기양양하게 들어선 딸아이가 올 때까지 그렇게 송림에 누워 책을 읽었다.

어디든 지리산 능선이 장엄하게 펼쳐지고
▲ 능선 어디든 지리산 능선이 장엄하게 펼쳐지고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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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섬진강변을 따라 악양 들판을 거쳐 간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그곳에, 최참판댁은 이미 유명 관광지다. 날이 더운데도 불구하고 최참판댁으로 향하는 차량들이 제법 많다.
관광지로 조성된 곳이 그러하듯 주차장서부터 참판댁으로 꾸며 놓은 주변을 어찌나 포장을 잘해놓았는지 시골인데도 불구하고 흙을 밟기가 어려웠다.

더위가 확 몰려온다.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그만 싹 가셔서 악양들판이나 한바퀴 돌자고
마음을 바꾼다. 악양들판을 바라보는 어딘가 박남준 시인님도 사신다는데 시인의 집이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며 너른 들판 가득 푸른 벼들이 넘실거리는 하동의 그 풍요로운 동네를 한바퀴 돌아나온다.  

지리산 성삼재 가는 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 어느 지점에 청보리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마치 인상좋은 사람을 만난 듯한 식당의 간판이 발길을 붙잡아서였다. 그냥 시골의 작은 식당이었는데 보리밥이 깔끔했다.

지리산 능선위로 펼쳐진 푸른하늘
▲ 푸른 하늘 지리산 능선위로 펼쳐진 푸른하늘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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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하나를 더 추가시키는데 정식으로 시키는 밥과 똑 같은 양푼에 넉넉한 밥이어서 '공기 하나 추가'의 가격이 심히 궁금했다. 계산을 하고보니 추가한 공기밥 가격을 받지 않았다. '그건, 그냥 드시라고...' 계산하던 아가씨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한다. 작지만 이런 인정을 받는 건 참 기분좋은 일이다.

지리산 성삼재까지 차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한 일인가, 아닌가. 차라리 다음 기회를 빌리더라도 이런 방법은 결코 옳은 일은 아닌듯 싶지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오늘은 자동차의 힘을 빌린다.

산을 오르는 일은 산의 리듬을 느끼는 일이다. 자동차의 힘을 빌려 아무 느낌 없이 아무런 고통없이 그렇게 쉽게 다가가는 일이 아니다. 그 곳까지 차로 왔으니 작은 예를 차리는 의미로 노고단까지 걷기로 한다.

늦게 핀 연꽃 한송이
▲ 연꽃 늦게 핀 연꽃 한송이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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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볕이 뜨겁게 내리는 지리산 정상의 한 능선인, 성삼재에도 부지런히 사람들이 오간다. 등에 무거운 배낭을 지고 가는 사람은 분명 능선종주를 목적으로 오르는 이들일 것이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는 남편의 눈에 부러움이 잔뜩 실린다. 산을 좋아하는 우리가 아직 못해본 게 지리산 종주다. 언젠가는 반드시 지리산 곳곳을 두발로 직접 걸어보리라!

오늘은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걷는 걸로 위안을 삼는다. 노고단 가는 길은 거의 임도 수준이다. 산 정상능선이 이렇게 넓게 뚫린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더 많이 와서 걸으라고? 길이 좁으면 사람들이 걷지 못하는가. 산길은 좁을수록 더 산길다운데 산 속에 뚫린 너른 길을 걷자니 대체 이곳이 깊은 산중이 맞는가 싶어진다.

덕분에 오가는 이들은 많은데 저 무작위로 쏟아지는 땡볕을 피할 길이 요원하다. 그냥 내리는 대로 햇볕의 세례를 받으며 길을 걷는다. 더위에 지친 나머지 얼마 되지도 않는 그 길이 마냥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지리산이라는 산의 특색을 느낄 만한 거리를 찾지 못한다. 다만, 정상 능선 중간 중간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계곡이 흐른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노고단에 닿았다. 돌탑까지는 입산금지여서 노고단 대피소까지다. 지리산의 장엄한 능선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장소다. 온통 짙은 초록의 산 능선이 온 시야를 가로 막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장엄하다.

성삼재에서 구비 구비 지리산 고개를 돌아나와 이번 휴가 일정을 실상사에서 마감 짓기로 한다. 실상사 하면 '불교환경연대'를 이끌어 가시는 수경스님 생각도 나고 실상사 주지로 계시는 도법 스님도 떠오르는 곳이다.

너무도 손쉽게 노고단을 올랐는데도 사실은 더위에 매우 지친 상태라 실상사를 가는 길마저 버겁게 느껴질 무렵이었는데 실상사로 가는 시골길에 들어서 그만 정신이 번쩍 든다.
시골스러운 너무도 시골다운 길이 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석장승(다리 앞쪽에 한기, 다리 건너 3기, 그렇게 도합 3기의 석장승이 서 있다)이 어서 오란듯이 퉁방울만한 눈으로 우릴 맞는다.

다리를 건너니 본격적인 시골길. 오른쪽으론 연꽃밭이 이어진다. 절정기를 지난 연밭엔 백련이 몇 송이 피어 처연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이 아름다움을 누가 와서 봐주어야 할 거 같은 고요한 연꽃밭. 그러나 주변은 적적함을 느낄 정도로 고요하다. 그 고요한 길을 걸어 실상사에 닿는다. 이어지는 연꽃밭 맞은 편에는 사과밭이 펼쳐져 가을에 사과가 익으면 단풍만큼 예쁘겠다 싶다.

실상사는 내가 생각했던 거보다 더 소박해서 정겹다. 누구나 들어와 부처님 전에 무릎 꿇고 넋두리를 하고 가면 좋을 만한 그런 절이다. 천년고찰이라는데 딱히, 어떤 권위도 느껴지지 않은 천상, 조금 전에 걸어왔던 시골스러운 길을 닮은 너무도 편안한 느낌의 절이다.

그리 넓지 않은 경내를 한바퀴 돌아보면서 사찰 안에 심어진 다양한 나무들을 만난다. 제각각 다른 나무들은 이름표를 달고 있어서 나무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 주었다. 마치 그것이 실상사에 온 목적이라도 되는 듯. 단청을 하지 않은 대웅전 건물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종무소 옆으로 무성히 핀 봉숭아꽃은 눈에도 담고 꽃도 몇 송이 따서 왔다.

전날 쌍계사에 그렇게 봉숭아가 만발해서 몇 송이 따서 온 걸 실상사 봉숭아꽃이랑 섞어 그날 밤 딸아이와 함께 손톱에 꽃물을 들였다. 꽃물이 진하고 고왔다.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쌍계사와 실상사가 내 손톱에 와서 그렇게 고운 빛으로 들어 앉았다. 봉숭아꽃물 든 손톱을 바라볼 때마다 쌍계사와 실상사 뿐만 아니라 피아골 주변의 모든 것들이 꽃물만큼 선명하게 떠오른다. 심지어 찜통같던 그 더위마저도!

덧붙이는 글 | 사진기는 고장 났지만 휴가 마지막 일정까지 소화하고 보니 돌아다닌 곳이 적지 않다.



태그:#하동송림, #노고단, #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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