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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치러진 총선 결과,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이 나오지 않아 호주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지난 21일 치러진 총선 결과,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이 나오지 않아 호주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 시드니모닝헤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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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치러진 2010년 연방총선 결과를 놓고 호주가 몹시 어수선하게 돌아가고 있다.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없어서 차기 정부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국은 한순간에 교착상태로 빠져들었고, 부득이 줄리아 길라드 현 총리가 과도내각을 이끌어야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호주 경제계는 이런 정치상황의 불안이 호주달러의 가치하락과 주식시장의 약화를 불러올 것으로 예상하면서 바짝 긴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재집권이 예상됐던 노동당이 발표한 사업계획의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해외투자자들이 주춤거리는 등 호주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호주 언론들은 "총선으로 인한 혼란이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호주가 채택하고 있는 우선순위투표제도가 그 이유 중의 하나로 꼽힌다. 후보자 전원에게 우선순위를 주는 시스템이라서 끝까지 카운트를 해주다보면 최종 개표결과가 열흘 후쯤에나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것.

한편 21일 오후 6시, 투표 종료와 동시에 22일 02시(동부시간)까지 78.1%의 개표가 진행됐지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나오지 않자 호주선관위(AEC)는 개표를 일시 중단했다가 23일 오전에 재개했다. 부재자 투표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우편투표(투표일 발송까지 유효)를 우선순위에 따라 분배하기 위해 장기전에 들어가려는 속셈이었다.

호주 총선이 치러진 지난 21일, 시드니 시민들이 후보들의 홍보 피켓이 세워진 길을 따라 투표장으로 향하고 있다.
 호주 총선이 치러진 지난 21일, 시드니 시민들이 후보들의 홍보 피켓이 세워진 길을 따라 투표장으로 향하고 있다.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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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만에 다시 경험하게 된 '헝 의회'

23일 오후 현재, 호주국영 abc방송이 보도한 각 정당의 당선 예상 숫자는 하원의원 총 150석 중에서 현 집권당인 노동당이 73석, 자유-국민연합당(이하 연합당) 73석으로 똑같고, 녹색당 1석, 무소속 3석 등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집계를 해야 최종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의석이 4석이나 된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는 호주는 반수가 넘는 의석수인 76석을 차지해야 집권할 수 있다. 그 숫자를 호주 언론에서는 '매직넘버 76'이라고 부른다. 현재 노동당은 매직넘버에서 -6석, 연합당은 -4석의 상태다. 자력으로 차기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한 것. 이런 상태의 의회를 '헝 의회(Hung Parliament)'라고 부른다.

의회를 안정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다수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국정이 불안하게 운영된다는 의미에서 'Hung(천정에 대롱대롱 매달렸다는 뜻)'이라는 부정적인 말이 생겨났다. 그런 연유로, 호주 언론은 '헝 의회'를 언급할 때 소수정부(Minority Government), 또는 소수의회(Minority Parliament)라는 용어를 동시에 사용한다.

호주는 1940년 이후 70년 만에 '헝 의회'를 경험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국민들한테는 용어 자체가 생경할 수밖에 없다. <채널9>에서 긴급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헝 의회'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시청자가 40%에 불과했다. 그러자 많은 언론에서 '헝 의회'를 소개하는 코너를 마련했다.

한편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어느 정당으로의 연정구성이 더 정당한가?"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노동당이라는 답변이 56%, 연합당이라는 답변이 44%로 나왔다.

갑작스런 총리 교체를 내부 쿠데타로 묘사한 호주 언론
 갑작스런 총리 교체를 내부 쿠데타로 묘사한 호주 언론
ⓒ 데일리텔레그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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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 정당, 매직넘버 76석을 향한 안간힘

지난 6월, 호주 헌정사상 첫 번째에 해당되는 정치 쿠데타가 발생했다. 2007년 총선에서 전국적인 '노동당 선풍'을 일으키면서, 5기 연속집권을 노리던 존 하워드 정부를 상대로 압승을 이끌어낸 캐빈 러드 전 총리를 노동당 내부의 '무혈 쿠데타'로 실각시킨 것.

집권 2년 동안 70%대의 높은 지지율을 자랑하던 러드의 인기가 40%대로 내려갔다는 게 쿠데타의 이유였다. 그 결과 호주 최초의 여자 총리인 줄리아 길라드 현 총리가 전면에 나섰고, 허니문 덕으로 노동당 지지도가 다시 올라갔지만 '반짝 효과'에 그치고 말았다.

허니문 기간 안에 총선을 실시해서 재집권에 성공하겠다는 계획으로 2년 9개월 만에 조기총선을 결행했지만 기존 의석 14석을 잃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호주 역사상 최초로 집권 1기의 총리를 축출한 노동당의 처사가 국민정서를 자극해서 거센 '역풍'을 맞은 것.

그 결과 집권에 필요한 '매직 넘버' 76석에도 못 미치는 초라한 성적을 거둔 후에 서둘러서 녹색당 당선자와 무소속 당선자 영입작전에 나섰다. 줄리아 길라드 총리는 21일 밤의 연설 도중에 무소속 당선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당선 축하를 건네서 은연중에 그들을 영입하겠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토니 애보트 연합당 당수도 당선사례 연설을 통해서 "득표수에서 연합당보다 40만 표나 적게 얻은 노동당은 차기 정부를 구성할 정당성을 잃었다"면서 "무소속 당선자들과 대화를 나눌 예정"이라고 밝혀서 차기 정부 구성하겠다는 의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지난 21일 치러진 호주 총선 결과 무소속 의원 4명이 차기 정권을 결정할 것이라고 보도한 호주 언론.
 지난 21일 치러진 호주 총선 결과 무소속 의원 4명이 차기 정권을 결정할 것이라고 보도한 호주 언론.
ⓒ 데일리텔레그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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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선택권 틀어쥔 무소속 의원들 '상한가'

호주 언론들은 2010년 연방총선에서 가장 크게 승리한 정당으로 녹색당으로 꼽았고, 가장 크게 패배한 정당으로 노동당을 지목했다. 한편 연합당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려서 당내 분위기가 무척 고무된 상태다. 특히 호주 정치역사에서 집권 1기의 정당을 상대로 승리를 이끌어낸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호주국영 abc-TV 선거분석가 앤토니 그린은 "노동당이 득표율에서 -5.4%를 기록한 반면, 연합당은 +1.8%를 기록했고 녹색당은 +3.8%를 기록했다"면서 "2007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획득했던 표가 연합당과 녹색당으로 옮겨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22일자 <데일리텔레그래프>는 "세 명의 무소속 당선자들이 진정한 승자"라면서 '무소속의 날'이라는 1면 헤드라인을 뽑았다. 세 명이 자력으로 집권할 수 없는 양대 정당의 '킹메이커' 역할을 맡게 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두 당이 영입경쟁을 벌이면서 세 사람 모두 상한가를 기록하는 중이라고 판단한 것.

이를 두고 <채널9>의 정치평론가 로리 오크는 "총선 1차 개표가 끝난 다음에 갖는 여야 대표연설을 들어보니, 국민을 상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세 명의 무소속 당선자를 향해서 연설하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장관직 정도는 따논 당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셋 중의 한명인 롭 오크쇼트 당선자는 "장관직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이어서 "대부분의 정당이 정권창출과 집권에만 골몰하는 정치결사체라서, 국가발전에 기여하기보다는 당리당략을 좇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런 기회에 지역구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고 국가의 미래를 함께 고뇌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총선 결과에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봅 브라운 녹색당 당수.
 총선 결과에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봅 브라운 녹색당 당수.
ⓒ abc-TV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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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신기록 양산한 2010 총선

이번 총선에서 녹색당이 기록한 득표율 11.5%는 호주 역사상 소수정당이 얻은 가장 높은 득표율이다. <채널7>의 정치평론가 그래함 리차드슨은 "녹색당의 약진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수치"라면서 "새롭게 투표권을 행사하는 젊은 층이 환경문제에 큰 관심을 보인 결과"라고 분석했다.

뿐만 아니라, 녹색당은 최초의 하원의원 아담 반트를 당선시키는 개가도 함께 올렸다.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사례는 있지만 총선에서 당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울러 녹색당은 9명의 상원의원이 당선되어 상원의 캐스팅보트를 쥐는 소득도 얻었다. 사정이 이쯤 되자 봅 브라운 녹색당 당수는 "녹색당 사태(Green Slide)"라며 환호했다.

최초의 호주원주민 애버리진 하원의원 캔 와이아트가 당선된 것도 신기록이다. 그동안 애버리진 상원의원은 여러 명 있었지만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사례는 없었다. 토니 애보트 연합당 당수는 "최초의 애버리진 하원의원이 자유당에서 배출되어 더 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퀸즐랜드 북부 출신의 스무 살 청년이 하원에 진출하는 새로운 기록도 작성됐다. 와이아트 로이 당선자는 "20대 초반의 유권자가 다수를 차지하는데 그 연령층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없어서 출마했다"면서 "선거운동 기간에 몰랐던 것을 많이 배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국사를 논의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한 달 안에 재선거 치러질 수도

호주선관위(AEC)는 "2010년 연방총선의 최종 개표상황은 열흘 후쯤에나 나올 것"이라고 발표했다. 특히 4개 지역구는 표차가 크지 않아서 우선순위투표의 배분이 끝나면 당락이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호주 주요 언론들은 선관위의 중간집계를 근거로 개략적인 개표결과를 예상해서 발표하고 있다.

그 결과 자력으로 과반수를 넘길 수 있는 정당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 상태다. 결국 녹색당 당선자 1명과 무소속 당선자 3명을 영입해서 소수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는데 벌써부터 정국이 불안정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특히 무소속 의원들은 개성이 강해서 집권당의 법안 통과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런 우려의 목소리를 들은 롭 오크쇼트 당선자는 "소수 정부가 향후 3년 동안 안정적인 정치를 펴나갈 수 있도록 세 명의 무소속 당선자가 힘을 모을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그러나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호주는 다음 토요일에 투표장으로 가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년을 뒤돌아보면, 노동당 정부는 G20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국제금융위기를 벗어나는 가시적인 성과를 올린 바 있다. 그러나 집권 2년 만에 자중지란을 일으키면서 집권 1기가 끝나기도 전에 국민의 외면을 받게 됐다. 이를 두고 소설가 봅 엘리스는 "어느 정당이든 국민의 선택을 받아서 집권했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곧바로 심판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역대 노동당 리더들의 연설문을 써준 경력을 지닌 저명한 작가다.


태그:#호주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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