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조선에 전해진 영화는 신기하고도 매력적인 볼거리이자 자본과 결탁한 근대적인 매체였다. 신문화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근대화의 살아 움직이는 교재였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던 일본인들에게 선전의 수단이었다. 공교롭게도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던 시기에 영화산업이 시작되었기에 조선영화인들은 일제에 협력하고 한편으로는 저항하면서 식민지 조선영화의 토대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에는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서 영화계를 이끌었다. 이들 식민지 조선영화인을 살피고 되새기는 것은 지난했던 현대사를 이 땅의 영화인들이 어떻게 통과해 왔는지를 가늠해 보는 영화사 이면의 기록이다. <기자 주>

 영사기사 출신으로 단성사 운영자가 된 박정현

영사기사 출신으로 단성사 운영자가 된 박정현 ⓒ 한상언

프린트 벌수제한이 폐지된 1994년 이전만 해도 개봉영화는 소위 일류극장이라고 하는 시내의 개봉관에서만 볼 수 있었다. 지금이야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주요한 흥행영화가 처음 상영된 장소라는 의미는 극장의 위상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래서 <겨울여자>(김호선 연출, 1977), <장군의 아들>(임권택 연출, 1991), <서편제>(임권택 연출, 1993) 등 역대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갱신한 영화를 개봉했던 단성사는 오랫동안 한국영화의 메카로 불렸다.

단성사는 1907년 설립되어 100년의 역사를 훌쩍 넘겼다. 식민지시기 단성사는 단순한 극장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30년대 초반까지 변사의 목소리에 따라 일본인극장, 조선인극장으로 나뉘었던 경성의 극장가에서 단성사는 조선인 극장의 대표였다.

단성사 말고도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우미관과 화려한 시설의 조선극장이 존재했지만 그 역할은 조선인을 상대로 한 활동사진 상영에 한정되었다. 반면 단성사의 경우 혁신단, 신극좌, 신무대 등 일부 극단을 극장 전속으로 두어 운영했고, 금강키네마, 원방각사 등 방계 영화회사에 운영자금을 투입하여 영화제작에 나서는 등 우리영화를 상영한 것 이상의 역할을 담당했다.

단성사의 전성기는 1920년대였다. 광무대를 운영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1918년부터는 단성사까지 운영하게 된 박승필이 단성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32년 그가 사망하자 단성사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윤백남이 신문에 조사를 발표했을 정도로 흥행계의 존경받는 원로였다.

활동사진관 운영경험이 일천했던 박승필이 단성사의 전성기를 이끌 수 있었던 데에는 최초의 영사기사이자, 우리 영화 최초의 프로듀서이기도 했던 박정현의 도움이 컸다. 그는 박승필 사후 단성사를 이끌었고 일본의 거대 자본 앞에 고군분투하다 단성사와 함께 몰락한 인물이었다.

지금 그의 이름은 한국영화사 속에 간단히 언급될 뿐이다. 이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사라졌지만 망각의 늪으로 쓸려 들어간 그의 인생은 기억될 만한 것이다. 이에 그에 관한 작은 흔적들을 찾아 살피고 더듬어 그의 일생을 복원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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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은 1886년 음력 2월 7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한때 함흥군수까지 지냈으나 정현이 3살 되던 해에 사망했다.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형수와 어머니와의 불화로 어머니와 함께 분가한 이후로는 찢어지는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어려서부터 온갖 궂은일을 해야 했는데 담배를 좋아하던 어머니를 위해 6살 무렵 담배목판을 열어 담배장사를 하기도 했다. 이후 은방의 심부름꾼, 약국의 점원 등으로 유년기를 보냈다.

어렵던 유년시절을 지나 청년이 된 박정현은 1910년 고등연예관이 설립되자 영사기사로 입사한다. 고등연예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개관 당시 영사기사로는 아오모리현(靑森縣) 출신의 나까무라 쇼타로(中村初太郞)가 있었다. 일본인 영사기사 밑에서 영사기술을 배운 박정현은 주로 고등연예관의 출장영사와 지방순회 영사 등에 나섰다. 순회영사대(순업대)는 활동사진관이 없는 지방을 순회하는 영업방식으로 회계, 영사기사, 변사 등 10명 정도가 한팀이 되었다. 박정현은 훗날 스타변사가 되는 서상호와 짝이 되어 주로 남선지역을 순회했다.

1912년 관철동에 활동사진관인 우미관이 만들어지면서 박정현은 서상호와 함께 고등연예관에서 우미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미관은 경성에서 조선인 관객을 상대로 한 유일한 활동사진관이었다. 박정현은 우미관의 영사기사 주임, 서상호는 변사주임으로 활동했다. 경성의 20만 조선인 관객을 독점하고 있던 이 시기가 우미관의 전성기였다. 

1917년 일본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조선에 건너와 고리대금업으로 거부가 된 다무라 요시지로(田村義次郞)가 김연영이 소유하고 있던 단성사를 매수한다. 다무라는 당시 일본인 활동사진관인 황금관과 박승필이 운영하던 광무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단성사를 조선인 활동사진관으로 전용하기로 한 다무라는 광무대를 운영하고 있던 박승필에게 단성사의 운영을 맡긴다. 다무라에게서 운영권을 획득한 박승필은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다시 짓고 1918년 12월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재개관한다.

활동사진관 운영 경험이 일천한 박승필이 단성사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경험자가 필요했다. 박승필은 우미관 영사기사인 박정현과 인기변사 서상호에게 동업을 제의한다. 이 둘은 박승필에게서 전무취체역을 보장받고 우미관에서 단성사로 자리를 옮겼다. 우미관의 중요한 두 축이 빠짐으로써 우미관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는다. 우미관을 대신해 단성사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단성사 개관 이후 아편중독에 빠진 서상호는 곧 단성사와 작별하게 되지만 박정현은 단성사의 지배인으로 실질적으로 활동사진관 운영을 책임졌다. 박정현은 운영자 박승필을 도와 일본의 영화회사인 곳카츠(國活)와 미국의 영화사인 유니버셜사 등과 특약을 맺고 우수한 활동사진 필름을 상영했다. 이어 일본인 활동사진관에서 유행하던 연쇄극을 제작하기 위해 경영난에 빠져 해산 위기에 있던 김도산의 신극좌와 임성구의 혁신단을 단성사 전속 극단으로 끌어드려 1919년 10월 27일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제작했다.

1921년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조선극장이 탄생하지만 여전히 조선인 극장의 대표는 단성사였다. 그러던 1923년 황금관을 운영했던 하야가와 고슈(早川孤舟)가 조선총독부에서 개최한 부업공진회에 맞춰 활동사진 <춘향전>을 제작한다. 하야가와는 1910년대 일본의 메이저 영화회사인 텐카츠(天活)의 조선대리점을 운영하며 또 다른 일본의 메이저 영화회사인 니카츠(日活) 영화를 조선에 배급했던 닛다 고이치(新田耕市)와 함께 조선영화계를 양분하던 영화계 거물이었다.

단성사에서 개봉된 하야가와 고슈의 <춘향전>은 부업공진회를 구경하기 위해 경성으로 올라온 조선인 관객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원이라는 평소 입장료의 수배가 넘는 비싼 입장료를 받았음에도 관객은 연일 매진이었다. 단성사에서는 <춘향전>의 엄청난 성공에 자극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24년 박정현은 극영화 제작을 구상한다. 때마침 우미관 영사기사 시절 박정현의 조수를 하던 이필우가 일본 데이코쿠(帝國)키네마에서 촬영기사로 활동하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에 돌아와 있었다. 박정현은 이필우를 만나 영화촬영 계획을 이야기하고 함께 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단성사 운영자 박승필의 설득에 나섰다. 박승필은 검증되지 않은 촬영기사를 믿고 선뜻 거액을 지원할 의사가 없었다. 박정현의 거듭된 설득으로 박승필은 우선 비용이 적게 드는 동아일보 주최 전선여자정구대회의 촬영을 맡긴 후 그 결과를 보고 영화제작을 할지 말지 생각해 보자고 했다.

이필우는 카메라를 빌려 정구대회의 촬영을 했다. 그날 밤 촬영된 필름을 현상하고 다음날 아침에 프린트로 만들어서 촬영된 필름을 박승필에게 보여주었다. 촬영은 성공이었다. 촬영된 필름을 본 박승필은 극영화 제작에 자금을 투자할 것을 결정한다.

 1924년 9월 5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장화홍련전>의 광고. '단성사 박승필연예부고심대작', '기회를 잃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보인다.

1924년 9월 5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장화홍련전>의 광고. '단성사 박승필연예부고심대작', '기회를 잃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보인다. ⓒ 한상언


이로써 박정현의 주도로 극영화 제작이 시작되었다. 제목은 <장화홍련전>. 감독 박정현, 촬영 이필우, 각색 김영환, 자막 김학근이었다. 박정현의 직책은 감독이었지만 연출이 아니라 제작을 책임지는 프로듀서의 역할이었다. 실제 연출은 단성사에서 검열관련 업무를 보던 이구영이 맡았다. 스태프들이 모여 시나리오 낭독을 시작했다.

이구영이 김영환이 쓴 시나리오를 낭독하면 김영환이 중간 중간 이야기를 보충했다. 이야기가 완성되자 배역을 정했다. 장쇠 역과 사또 역에는 단성사의 변사 최병룡과 우정식이 맡았고, 장화와 홍련 역에는 광무대에서 활동하던 김옥희와 김설자, 그 외 배역 역시 단성사 직원들이 나누어 맡았다.

스태프와 배역이 결정되자 촬영이 시작되었다. 로케이션은 시외 영도사로 정했다. 지금의 고려대 근처에 위치한 개운사이다. 절 한 귀퉁이를 세내어 촬영을 했다. 혹서기여서 배우들의 분장이 땀에 흘러내리는 등 쉽지 않은 촬영이었지만 단성사 영화팀은 박정현의 지도로 3주 만에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최종 완성된 필름은 총 8권 분량으로 영사시간만 2시간가량이었다.

1924년 9월 5일 <장화홍련전>이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설명은 단성사의 인기변사이자 <장화홍련전>의 시나리오를 쓴 김영환이 맡았다. 단성사에서는 평소 10전하던 관람료를 50전으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관객으로 인해 이례적으로 평일 주야로 2회 상영에 9일간 장기 상영했다. 당시 활동사진관에서는 5일마다 필름을 교체했으며 일요일에만 주야 2회 상영일 뿐, 평일은 야간 1회 상영이 전부였다.

박정현이 제작을 책임진 <장화홍련전>은 서양영화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을 받긴 했지만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특히 이 작품은 자본에서 스태프, 배우에 이르기까지 순조선인의 힘으로 제작된 최초의 영화라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2부 이어집니다.

단성사 박정현 박승필 장화홍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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