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 항쟁 서른 돌을 맞는 이명박 정권의 행태를 보면, MB 집권 2년 3개월 뒤 이 땅의 민주주의, 인권, 언론·표현·양심의 자유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극명하게 보인다. 5.18 광주항쟁을 기리는 30주년인데, 이명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고 총리를 대신 내려 보냈다. 정부가 주관하는 공식 행사 식순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사라져 버렸고, 5.18 유가족 대표의 '5.18 민주화 운동 경과 보고' 순서도 삭제되었다. 게다가 공식 행사 사전 프로그램에 의하면 총리가 기념식장을 퇴장할 때 "노자, 좋구나"로 시작되는 경기도 '방아타령'이 울리게 되어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생겨날까.
5.18 광주 외면한 대통령... '방아타령' 준비했던 정부아마도 5.18 민주항쟁을 옷깃 여미며 되새기는 자세로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 항쟁이니 민주화 운동이니 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이를 폄훼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 문득 2007년 2월, 자신의 정책자문 교수모임인 '바른정책연구원' 주최 조찬 모임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문제의 '빈둥빈둥' 발언이 떠오른다.
"요즘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면 70~80년대 빈둥빈둥 놀면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인데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이 발언과 관련해 70~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지칭하여 '빈둥빈둥' 놀았다고 비아냥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 쪽에서는 "이 전 시장이야말로 독재 권력과 붙어서 정경유착을 통해 자기재산을 불려온 사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민주화 운동, 그 저항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5.18 광주 민주항쟁 30주년을 홀대하는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한 이 정권의 민주 의식, 언론·표현·양심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지는 역설적이게도 광주항쟁 30주년이 되는 날 아침 신문에 보도된,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 보좌관의 한국 인권조사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나온 발언에 잘 집약되어 있었다. 라 뤼 특별 보좌관은 "2008년 촛불 집회 이후 한국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상당히 위축된 것으로 보여 우려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가와 사법제도를 통해 어떤 압박이 가해졌는지, 다양한 의견이 표현되는 기회가 어떻게 차단되었는지, 조목조목 구체적 사례들을 보여줬다.
굳이 라 뤼 특별 보좌관의 입을 빌릴 필요도 없다. 지난 2년 3개월 동안 이 땅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그 많은 죽음과 희생을 치르고 이뤄낸 우리의 민주주의, 인권,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가 어떻게 곤두박질쳤는지, 매일 매일 생활에서 보고 있는 일이다.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현상은 검찰, 경찰, 감사원, 국세청 등 국가의 권력기관이 정치권력을 위해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면서 시민적 권리를 위축시켜 왔다는 점이다. 피의사실 공표죄는 사문화되어 버렸고, 검찰은 이를 비웃으면서 피의사실을 브리핑까지 했다. 감사원, 국세청은 정권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잘 부응했다.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표현의 자유는 가장 심각하게 위협을 받아왔다. 촛불에 참여한 1600명 이상의 시민들이 법적 제재를 당했고, '불법시위 단체'로 통보된 단체가 1840개에 이르렀으며, 이들 단체에 대한 각종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되어 왔다. 시국 선언을 한 전교조 교사들과 전공노 회원들은 해임, 사법 처리 등의 겁박을 당했다.
미네르바, 피디수첩, 한명숙 전 총리 사건 등이 보여주는 정치 검찰의 무리한 공소 제기,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직계 혈족들(엠비 후보 언론 특보 출신)이 장악한 방송과 언론관련 단체들, (수구언론에는 급증한 반면 진보 매체에서는 크게 감소한) 정부와 공기업 광고의 차별적 집행, 비판적 시민단체에 대한 정부 보조금 지급 중단... 민주주의 역류를 보여주는 사례는 꼬리를 문다.
이런 일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명박산성'이며, 그 바닥에 흐르는 것은 오만, 독선, 장벽, 소통부재, 일방주의다. 9.11 이후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그랬다. 그리고 부시는 망했다.
오만 독선 소통부재.... 이미 몰락한 사람이 있다부시 미국 대통령은 9.11 직후 지지율 90%의 고공 행진에서 임기 말 30% 아래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9.11로 흥했다가, 9.11로 망한 셈이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9.11 테러로 비롯된 '국가 위기'를 나라 안팎에서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테러 용의자들을 잡아다가 수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인권 침해 사실이 드러났는가 하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고 이라크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이라크가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거짓을 근거로 이라크를 침공하여 수많은 이라크 시민들이 죽었다. 미군의 피해도 엄청났다.
결국 9.11이라는 국가위기사태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거짓이 저질러지고,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무리한 수사로 인권 침해가 발생하고, 그런 것이 누적되어 끝내는 부시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몰락의 길로 가고 말았던 것이다.
인권 침해사례부터 보자. 9.11 사태 이후 미군에 의한 혹독한 인권 침해 사례들이 속속 폭로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내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학대와 고문, 쿠바의 미 해병기지인 관타나모 특별 수용소내에서 자행된 테러 혐의자에 대한 인권 침해였다.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사건은 이라크 포로들이 미군에 의해서 얼마나 모욕적인 고문과 가혹 행위를 당했는지 그 내용이 담긴 사진이 공개되면서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라크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모욕을 가하는가 하면, 심지어 미국 여군인 린다 잉글랜드 일병은 벌거벗은 이라크인 포로들의 성기에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하기도 했고, 벌거벗은 포로들로 하여금 인간 피라밋을 쌓게 한 뒤 그 앞에서 다른 남자 미군과 함께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는 패륜적 행위까지 보였다.
미국의 수치, 아부 그라이브와 관타나모 수용소
이 사진이 폭로된 뒤 '아부 그라이브'라는 이름은 '미국의 수치'가 되어버렸다. 네오콘으로 이라크 전쟁을 진두지휘한 강경 매파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까지 자신의 임기 5년 중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날이 '최악의 날'이었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이 사건의 추악성을 알 수 있다.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는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의 집권기에는 정적(政敵)에 대한 고문 장소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 다음 사건은 국제법률가들 사이에 '국제법이 실종된 블랙홀'로 불리어진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벌어진 인권 실종사태다. 테러 혐의로 붙잡혀 온 수감자들은 수년 이상 재판도 받지 않고, 변호사의 접근도 금지된 상태에서 혹독한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아프칸과 파키스탄 등에서 잡혀온 알 카에다와 탈레반 관련 테러 피의자들이 이곳으로 이송되어 감금된 것은 2002년 1월 초다. 당시 미국 국방부는 이들이 관타나모 수용소에 도착하는 장면을 사진 찍어 언론에 공개했는데, 쇠줄로 손발을 꽁꽁 묶은 채 무릎을 꿇게 하는 장면이 담긴 이 사진은 이슬람 세계에 반미 감정을 격화시키는 촉발제가 되었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그 뒤에도 계속하여 인권 침해 지적을 받았고, 미국이 제네바 협정에 따른 정당한 포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비난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 상황에서 이들은 '전쟁 포로'가 아니라 '테러 용의자'라며 그러한 비난을 철저히 무시했다. 관타나모 수용소의 인권침해 문제는 2008년 미국 대선 때도 쟁점이 되었으며,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는 자신이 당선되면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와 관타나모 수용소는 부시 임기 동안 인권 침해 논란의 핵심이었고, 또한 이슬람 세계에서 반미 감정을 격화시키는 촉발제가 되었다. 그러나 부시를 비롯한 네오콘의 오만과 일방주의는 이슬람 세계의 그러한 저항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그들의 길을 계속 갔다.
국가위기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면 결국 망한다9.11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 부시의 핵심 전략가인 칼 로브는 공화당 전국위원회 모임에 가서, 민주당은 미국을 안전하게 지킬 수 없는 정당이라고 비판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철저하게 당파적 쟁점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칼 로브는 비열할 정도로 상대를 헐뜯는 전형적인 싸움닭 전략가다. 2000년 공화당 경선 때 존 매케인 후보가 뉴 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예상밖 승리를 하여 기세를 올리자 칼 로브는 그 다음 예비선거 과정에서 매케인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을 무섭게 가했다. 하도 인신공격과 비방이 심하자 매케인 후보는 "도대체 저들의 인신공격의 끝은 어딘가"라고 반문하기까지 했다.
인신공격과 분열적 공작 정치의 달인인 칼 로브는 조지 부시의 정치적 스승이다. 적과 동지를 분명하게 나눠서 치열한 이념 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칼 로브는 한국 정치판에서 보면 걸핏하면 '좌파'로 모는 마녀사냥 전략과도 맥이 닿아 있는 인물이다. 하긴 한국의 수구 기득권 세력이 어디에서 공작 정치를 배워오겠는가.
칼 로브의 분열적 공작 정치는 조지 부시의 대통령 당선에 핵심적 공헌을 했다. 특히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 광기에 휩싸일 때,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네오콘 강경매파들과 함께 핵심 역할을 했다. 조지 부시를 우두머리로 그 아래 포진한 이들 캠프에는 미국과 미국에 동조하지 않는 세계를 '선과 악'으로 나누고, 기독교와 이교도로 이분법으로 나누고, '악의 세력'을 쳐부수기 위해 거짓말 하는 것도, 인권 따위 무시하는 것도 아무 것 아닌 그런 독선, 오만, 일방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칼 로브가 공화당 지도부에 밝힌, '테러와의 전쟁'을 정치화하겠다는 의도는 그 뒤 착실하게 구체화되었다. 부시의 지지율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테러 경보'를 알리는 텔레비전 광고가 쏟아졌다.
2003년 3월, 미군의 이라크 침공이 이뤄지기 전, 이미 미국 국민들의 다수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2002년 초, 딕 체니 부통령은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공언했고, 2002년 새해 연두교서 발표 때 조지 부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이 아프리카로부터 대량의 농축 우라늄을 획득하려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비롯한 부시 행정부의 수뇌부는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에 적극적"이라고 의회에 브리핑했다. 거짓이었다. 이라크 침공은 그렇게 거짓에서 출발했다. 유엔 사찰단이 임무를 모두 완성할 때까지만 기다려 보자는 의견도 묵살되었다.
마침내 미군의 대대적인 이라크 침공이 2003년 3월 21일 시작되었다. 미군의 무시무시한 군사 공격이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해 5월 1일 조지 부시 대통령은 걸프 해역에 있던 에이브러햄 링컨 항공모함에 올라가 '임무 완수'라는 대형 펼침막을 뒤로 한 채 "미국의 군사작전은 완수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때 부시는 70%가 넘는 지지율을 즐겼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 그의 지지율은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임무가 완수되었다던 이라크 침공은 그 뒤 이라크 내전으로 치달으면서 이라크 시민들뿐 아니라 미군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되었고, 이라크 침공은 결국 부시 몰락의 덫이 되고 말았다.
9.11 테러라는 국가 위기상황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세력들의 거짓에 근거한 이라크 침공, 그리고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인권 침해,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부시 자신을 비롯한 그의 핵심 참모들의 오만, 독선, 소통 부재, 일방주의. 그게 바로 부시의 몰락을 불러왔던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건과 관련한 여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 참담한 사건을 이명박 정부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여러 군데서 제기되고 있다. 조지 부시의 예를 보면, 국가위기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단기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는 있었다. 그러나 끝내 그것은 덫이 되고, 몰락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게 역사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