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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국사를 살피던 공간이다
▲ 양화당 인조가 국사를 살피던 공간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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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명부의 수장은 중전이다. 빈과 후궁을 비롯한 하위 여관(女官)은 품계가 있지만 중전은 품계가 없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중전은 내명부의 우두머리다. 소현세자의 생모 인열왕후가 승하한 후 입궁한 계비는 21세, 소용 조씨는 31세다. 나이도 많고 궁에 들어온 경력도 오래지만 내명부는 장유유서가 통하지 않는 위계질서다. 왕비와 후궁은 계품이 다르다.

중전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것이 소용 조씨다. 눈에 가시 같은 왕비를 경덕궁으로 내쫓았으니 구궁궁궐은 소용 조씨 차지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더 바랄 나위 없다. 나이가 많고 품계가 높은 세자빈이 버티고 있지만 그는 지아비 없는 과부요 꽁지 빠진 닭이다. 소용 조씨가 인조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전하! 왜 이리 잠을 이루지 못하십니까?"
"법과 원칙이냐? 바꾸는 것이 좋으냐? 그것이 문제로다."
"법과 원칙도 중요하지만 시세에 따라 수정하는 것이 실리에 맞는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똑바로 가는 길이 낭떠러지라면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다. 허나, 절벽에 떨어지는 것이 틀림없는데도 원칙대로 가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아 걱정이다."
"이 나라는 전하의 나라입니다. 전하께서 하시는 일을 감히 누가 반대한단 말씀입니까?"
"국본을 바로 세워야 하는데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하나같이 반대하고 있다."
"세자를 불러왔으면 세워야지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세자라 했느냐?"
"네 그렇습니다. 전하."
"세자는 죽었는데 누굴 말하느냐?"
"소현은 죽었지만 봉림이 돌아왔지 않습니까?"
소의 조씨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급거 귀국하라는 부왕의 특명을 받고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왔지만 궐 밖 사가에 머물고 있었다. 세자책봉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당돌하구나."
"밀어 붙여야 합니다."
"믿을 만한 신하가 없어서 걱정이구나."
임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소첩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소용 조씨가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네가 무슨 힘으로 날 도운단 말이냐?"
"그렇게 쳐다보시면 민망하옵니다."
실눈을 뜨고 임금을 쳐다보던 조씨가 더욱 깊게 품속을 파고들었다.

소용 조씨에게는 김자점이 있다. 병자호란 초기. 서북방면군 도원수 직에 있으면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목을 쳐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으나 강화도에 귀양 간 것으로 구명해준 것이 소용 조씨다. 강화도에서 귀양살이 하던 김자점을 유배에서 벗어나게 하여 귀양지 유수에 앉힌 것이 소용 조씨였으며 훈련대장, 호위대장에 쾌속 승진하는 뒷배가 소용조씨였다. 김자점은 생명의 은인 소용조씨에게 충성을 다 바쳤고 소용 조씨는 김자점을 주구처럼 부렸다.

법과 원칙은 싫다, 돌아가고 싶다

봉림대군에게 뜻을 두고 있다는 의중을 몇몇 심복들에게 밝혔지만 심드렁했다. 봉림대군에 대한 신분 정리를 하지 못하여 권력 내부에서 혼란이 있었다는 것을 자각한 인조가 당상, 육경과 판윤, 양사의 장관을 불러들였다.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서봉, 영중추부사 심열, 낙흥부원군 김자점, 판중추부사 이경여, 우찬성 이덕형, 이조판서 이경석, 예조판서 이식, 호조판서 정태화, 병조판서 구인후, 공조판서 이시백, 판윤 허휘, 좌참찬 김수현, 우참찬 김육, 부제학 이목, 대사간 여이징 등 열여섯 명이 입시했다.

"원손이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경들의 뜻은 어떤가?"
임금이 좌중을 휘둘러보았으나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전하께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니 신들은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영의정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국사가 위태로우니 만일 내가 죽고 나면 어린 임금으로서는 나랏일을 담당할 수 없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대군들 가운데서 후사를 세우고자 한다."

"전하의 하교는 종묘사직의 대계를 위하시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신들은 두렵고 의혹스러워서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김류가 몸을 사렸다.

"옛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태자가 없으면 태손으로 이었으니 이것이 곧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상도(常道)를 어기고 권도(權道)를 행하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닌 듯합니다."
좌의정 홍서봉이 원칙론을 내세웠다.

"태평한 세상에는 반드시 장성한 세자가 있었다. 허나, 오늘날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좌의정의 말이 신의 뜻과 부합됩니다. 전하께서 비록 사소한 병환이 있으시기는 하나 아직 춘추가 한창이시고 원손이 비록 미약하기는 하나 이미 10세에 이르렀습니다. 예로부터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은 경우가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종통은 매우 중대한 것이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영중추부사 심열이 홍서봉의 의견에 동조했다.

"신의 뜻도 좌상과 같습니다."
이덕형이 합류했다.

"홍서봉과 이덕형 두 대신의 말은 모두가 경상(經常)의 도리이므로 신은 두 대신의 뜻을 옳게 여깁니다."
공조판서 이시백이 원칙론에 지지를 표했다.

"신의 소견도 좌상과 다름이 없습니다. 대를 이은 맏자식이 계통을 잇는 것은 고금의 떳떳한 법이니 떳떳한 법 이외에 다른 계책을 쓸 일이 없습니다. 떳떳한 법을 지키면 어려운 때를 당하더라도 나라를 보전할 수 있지만 권도를 쓰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아 환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판중추부사 이경여가 백성 불복종을 거론했다.

"세조께서 원손에게 자리를 전하지 않고 둘째 아들 해양대군에게 전하였는데도 당시 조신들의 이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조신들이 모두 불충한 자들이었단 말인가? 권도를 행해서 중도를 얻는 것이 바로 인심을 진정시키는 도리인데 무슨 소란해질 걱정이 있단 말인가?"
임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조의 큰아드님이 동궁에 계시다가 정축년에 승하하시고 둘째 아드님 해양대군이 무자년(1468)에 계통을 이었습니다. 훗날 왕위에 오른 자을산군의 나이는 12세였고 월산대군은 나이가 더 많았는데도 세조께서 왕세자를 이렇게 세우신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김자점을 힐끗 쳐다본 김류가 머리를 조아렸다.

"월산대군은 자질이 총명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당시 성종의 나이도 10세가 넘었던가?"

"성종께서 덕종이 승하하시던 정축년에 탄생하였으므로 세조가 승하하시던 무자년에 이르러 12세가 됩니다."

"서열로 말하자면 세자로 세워야 할 사람이 월산대군이었으나 일에는 때에 따라 변통하는 것이 있으므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상도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면 세조께서 왜 월산대군에게 전하지 않고 해양대군에게 전했겠으며 만일 장유(長幼)의 차례로 말한다면 예종이 어째서 월산대군을 그만두고 성종을 세웠겠는가?"

"세조 시대에는 국가가 무사하였는데도 상도에 위배되는 이런 거조가 있었으니 대성인의 처사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현명한 이를 가리는 데서 나온 것이라 여겨집니다."
김류가 두 손을 모았다.

"나 역시 순서에 따라 전하는 것이 순리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허나, 오늘날의 형세가 반드시 나이 찬 임금이 있는 다음에야 막중한 종사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하의 뜻은 종사의 대계를 위하심이니 오직 성상의 결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구인후가 맞장구를 쳤다.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가 동궁에 있다가 1457년 승하했다. 당시 월산대군도 어렸고 자을산군(성종)은 막 태어났다. 그래서 곧바로 그해 12월에 해양대군(예종)을 세자로 책봉하고 명나라에 주청자문(奏請咨文)을 보냈다. 그 자문에 '전 세자 장(暲)의 동모제 황(晄)이 현재 나이 9세인데 나라 사람들이 그를 후사로 세우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해양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책봉된 지 12년째인 무자년에 세조가 승하하였다.

그런데 김류는 '세조가 승하할 때 성종의 나이 12세이고 월산대군은 더 많았는데도 오히려 예종을 후사로 삼았다'라고 한 것은 김류가 예종의 세자 책봉이 성종이 막 태어나던 해에 있었음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거짓 모른 체하고 '성종이 12세이고 월산대군의 나이가 더 많다'는 것을 강조하여 마치 선왕의 세대에도 이미 장성한 원손을 세우지 않고 차자(次子)에게 후사를 전한 사실이 있었던 것처럼 논점을 유도한 것이다.


태그:#인조, #김류, #김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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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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