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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의정활동으로 '국감베스트'로 선정되기도 한 국회의원이 자신에게 부정적인 보도가 나오자 "지금껏 쌓아올린 좋은 평가가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고, 정치공세에 휘말려 명예가 더욱 훼손될 가능성마저 있으며, 도덕성에도 상당한 흠집이 생겼다"고 주장하며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으나, 재판부는 오히려 '머슴'을 거론하며 호되게 질타했다.

 

지금껏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가 나오면 의례적으로 허위보도라고 발끈하며 명예훼손을 이유로 언론사와 기자를 상대로 소송을 내기 일쑤였다. 왜냐하면 언론보도에 대응하지 않으면 사실로 인식될 것을 우려한 것이고, 나아가 언론보도를 위축시킬 수 있는 거액의 소송을 내는 것은 자신의 몸값(?)을 과시하며 섣불리 건드리지 말라고 우회적으로 엄포를 놓기 위함이다.

 

그럴 경우 법원은 통상 언론보도가 진실인지, 공공의 이익이나 이해에 관한 것인지, 또 언급된 사실이 진실하지 않다고 해도 진실이라고 믿은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는지를 따져 명예훼손죄나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만 판단해 온 점에 비춰 보면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런데 서울남부지법 민사9단독 송명호 판사는 과거 정부에서 핵심실세였던 현역 국회의원A씨가 "허위보도를 진실인 것처럼 보도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한 지역방송사와 기자 등을 상대로 낸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고위공직자가 언론을 상대로 소송을 남발하면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 있다"며 원고 패소 판결한 것으로 5일 확인됐다.

 

이번 판결이 눈길을 끄는 것은 고위공직자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가 나오면 기자회견이나 반론 및 정정보도 청구, 언론중재위원회 등을 통해 바로잡을 창구가 있음에도 기계적으로 남발하는 무분별한 소송 행태에 대해 재판부가 꼬집으며 국회의원에게 일침을 가했기 때문이다.

 

먼저 사건의 요지는 한 지역방송사는 2008년 10월 뉴스 프로그램을 통해 "검찰이 사학재단 실소유자 S씨로부터 DJ정권의 핵심 실세인 A의원 측에 3000만 원을 건넸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A의원은 "성실한 의정활동으로 '국감베스트'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허위보도를 한 피고들의 불법행위로 지금껏 쌓아올린 좋은 평가가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고, 정치공세에 휘말려 명예가 더더욱 훼손될 가능성마저 있으며, 국민의 표로 심판받는 국회의원에게는 도덕성은 가장 중요한 덕목인데 이미 상당한 흠집이 생겼다"며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것.

 

하지만 송 판사는 오히려 A의원을 비롯한 '묻지마' 소송을 남발하는 공위공직자들에게 "자신에게 긍정적인 보도가 나올 때는 혜택을 누리다가, 부정적인 보도가 나올 때는 민ㆍ형사 소송으로 언론사에 압박을 가한다"며 경종을 울리는 판결문을 제시해 주목을 끈다.

 

송 판사가 A의원을 어떻게 질타하고, 언론사에 대해서도 어떻게 쓴소리를 냈는지 '명품 판결문'을 자세히 짚어본다.

 

"역사적으로 공복이 주인을 상대로 고소하거나 재판을 걸 생각도 못 해"

 

송명호 판사는 먼저 "공무원을 공복(公僕)이라고 부르듯이, 공무원은 국민을 주인으로 모시는 종이고 머슴이며 노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도 노비신분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명예가 훼손당했다는 이유로 주인이나 시민들을 상대로 고소하거나 재판을 걸 생각도 하지 못했다"며 "만일 종이나 머슴에게 명예스러운 일이 유일하게 있다면, 그것은 '일 잘 하는 종, 충성스런 머슴, 사심 없이 일하는 종' 등의 소리를 듣는 일일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덧붙여 "즉 공무원의 명예는 공무원이 일한 결과에 대해 국민이 인정해주고 칭찬해 줄 때에만 비로소 외부로부터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공무원의 신분으로부터 처음부터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공무원에게 다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며 "그러므로 공무원에게는 애당초 본인이 나서서 보호하고 지켜야 할 명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어갔다.

 

또 "물론 공무원도 언론매체의 왜곡된 보도 때문에 억울한 오해를 받을 수 있으나, 현행법은 정정보도나 반론보도 청구라는 제도를 누구에게나 열어놓고 있으므로, 공무원도 언론보도로 인해 오해를 받았다면, 이러한 제도를 통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할 수 있지만, 거기서 그치는 것이 공복의식(公僕意識)에 투철한 공직자가 취할 도리"라며 오해와 억울함을 푸는 정도에서 벗어나 소송으로 가는 행태를 질타했다.

 

송 판사는 "원고는 국회위원으로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일하는 지위에 있다"며 "이러한 정무직 고위공무원이 명예훼손을 주장하며 언론매체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원고 본인을 위해서나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배척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민주주의가 발달된 선진국일수록 명예훼손 소송이나 형사고소가 공직자를 감시하는 언론의 기능을 크게 위축시킨다는 인식 하에 공직자가 명예훼손 관련법을 이용하는 행위를 가능한 제한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인 반면, 민주주의의 덜 발달된 나라일수록 명예훼손 관련법은 공직자의 부조리에 대한 공개적인 논란과 정당한 비판을 막는 수단으로 남용돼 온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고액소송 누적은 공직자 감시의지 위축시켜 민주주의 후퇴현상 일어나

 

그는 "원고는 보도가 나온 지 불과 2일 후에 소송을 제기했는데, 피고들이 고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한 것 자체만으로도 공직자에 대한 감시의지는 위축될 수밖에 없고, 실제로 해당 기자가 법조기자 업무를 그만 두고 다른 취재업무를 하게 되는 인사조치가 내부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피고들의 공직자에 대한 감시의지는 위축됐다"며 "이러한 과정들이 합쳐지고 누적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후퇴현상이 일어나게 된다"고 상기시켰다.

 

송 판사는 "게다가 원고는 헌법이 보장하는 면책특권 등 일반 국민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발언권한 등을 부여받은 국회의원으로서, 일반 국민에 비해 언론매체에 대한 접근이나 이용 측면에서도 훨씬 수월한 입장"이라며 "즉 원고는 손쉽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가질 수도 있고, 신문에 글을 투고하거나 방송매체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피력할 수도 있다"고 꼬집었다.

 

송 판사는 특히 "원고가 지금껏 쌓아올린 좋은 평가라는 것이 존재했다면, 그러한 사회적 명성은 다분히 언론매체의 도움이나 활용을 통해 형성된 측면이 크다"며 "그런데 언론매체를 통해 긍정적인 보도가 나올 때는 그 혜택을 그대로 누리다가, 부정적인 보도가 나올 때는 곧바로 민사재판이나 형사고소를 통해 언론매체에 압박을 가한다면, 향후 어느 언론매체이든 원고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를 조심하게 되는 것과 아울러 긍정적인 보도도 일체 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해갈 것"이라고 A의원에게 일침을 가했다.

 

또 "이렇게 공직자에 의해 제기되는 명예훼손 관련 소송들이나 형사고소들이 누적되고, 이러한 청구나 고소들이 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참된 정치인과 거짓된 정치인을 구별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들이 흘러나오는 언론매체의 통로가 막히게 되고, 이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언론사에도 쓴소리... 정론직필 주문

 

송명호 판사는 정직하고 올곧은 언론보도의 책임성을 지적하며 쓴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권위의식을 버리고 진실보도라는 언론의 임무에 충실하는 태도들이 축적될 때, 언론에 대해 '책임 없는 제4의 권력'이라는 비판이 국민들의 입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될 것"이라며 "법원이 언론의 면책범위를 과감하게 넓히는 방향의 판결을 해나가기를 주저하게 되는 이유 중에는 무책임한 언론을 방조하고 조장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결국 언론권이 가지는 보호가치의 정도는 개별 언론이 구체적 사안에서 진실보도 책임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감당하고 있는가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수 있고, 상업적 동기나 정치적 편향성이나 권위의식 등에 의해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려는 언론일수록 그 언론권의 보호가치는 현저히 줄어들게 될 수밖에 없다"고 충고했다.

 

이와 함께 "공직자에 관한 언론보도가 명예훼손이 되는지 명예권을 둘러싼 보호영역권주장과 언론사의 언론권을 둘러싼 보호영역권주장이 서로 대립되고 엇갈릴 경우, 원칙적으로 언론매체가 보도한 내용이 공적인 영역에 관한 경우에는 사적인 영역에 관한 경우에 비해 언론권의 보호영역권이 더 넓어지도록 경계선을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언론매체가 보도한 내용이 공직자의 도덕성ㆍ청렴성이나 그 업무처리가 정당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여부와 관련된 경우에는 공직자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라는 언론기능의 보호영역권이 좁아지게 만드는 경계선을 함부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공직자의 명예에 대한 보호영역은 본질적으로 매우 좁을 수밖에 없고, 공직자에 대한 감시나 견제기능은 언론의 매우 중요한 기능이기 때문이라는 게 송 판사의 판단이다.

 

송 판사는 "다만 공직자에 대한 감시나 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언론보도가 악의적인 면을 가지거나, 아주 과도하게 공격하는 면을 가질 경우에는 언론기능의 보호영역권의 범위가 좁아지도록 경계선을 잡을 수밖에 없다"며 "의적이거나 아주 과도하게 공격적인 면을 가진 언론보도는 본질적으로 진실을 왜곡하기 마련이고, 진실을 왜곡하는 언론보도는 보호할 가치가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언론의 정론직필을 주문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송명호, #명예훼손, #언론사, #언론보도, #손해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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