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형제>, <아바타>를 깨다

 

영화 <의형제> <아바타>를 이긴 <의형제>

▲ 영화 <의형제> <아바타>를 이긴 <의형제> ⓒ 쇼박스

지난 연휴, 한국영화 <의형제>가 할리우드 영화 <아바타>를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지난 연말부터 두 달 동안 독주를 하며 기존 외화 흥행기록은 물론 천 만 관객을 넘어 한국 흥행기록 1위까지 위협하던 <아바타>가 한국영화 <의형제>에게 가까스로 밀린 것이다. 이에 배급사는 난리법석이다. <아바타>를 이긴 <의형제>, 한국영화의 구원자 <의형제> 등 그 카피부터가 유치 찬란 그 자체다.

 

솔직히 갓 개봉한 영화가 개봉한 지 두 달이나 된 영화를 앞선 사실을 이렇게 호들갑 떨며 선전해야 되는가 싶지만 너른 마음으로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어쨌든 그 대상이 현재 맹렬한 기세로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우려는 영화 <아바타> 아니던가. 조그마한 구실이라도 찾아서 영화를 홍보해야 하는 이들에겐 최고의 호재일 수밖에.

 

게다가 영화 <의형제>는 말 만들기에도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얼핏 봐도 한국이니까 만들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유일무이한 분단국가에서 분단 그 자체를 소재로 만든 한국 영화.

 

지금까지 남북한의 특수한 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대부분 흥행한 전례를 떠올린다면 어쩌면 <아바타>를 제친 <의형제>의 흥행은 예상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분단을 바탕으로 송강호의 물오른 연기와 강동원의 눈부신 미모가 만나는데 어찌 실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직접 본 <의형제>는 생각 외였다. 비록 영화는 간첩과 전직 국정원 직원 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지만, 남북한의 특수한 관계에 주목하기보다는 2010년 대한민국 내부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 분단 소재 영화 분단과 연기 달인, 꽃미남의 만남

▲ 남북 분단 소재 영화 분단과 연기 달인, 꽃미남의 만남 ⓒ 쇼박스

 

물론 영화는 분단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이 사회에 이미 일그러진 모습으로 고정사실화 되어있는 하나의 조건일 뿐이었다. 통일된 한반도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채, 교과서에서 통일의 정당성을 배우는 세대들이 대부분인 이 시대에 이제 분단은 극복해야할 비정상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시대적 제약인 것이다.

 

영화는 그와 같은 맥락에서 간첩이란 존재에 주목한다. 무력이든 평화적이든 곧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절과 달리 분단이 고착화 되어버린 시대의 간첩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의 전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남과 북의 경계인에 가깝다. 그리고 감독은 그 간첩을 통해 지금 이 사회를 읽고자 한다. 항상 그렇듯이 경계인은 그 사회의 모순이 점철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대한민국을 해하는 불순한 세력이라기보다, 베트남 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서의 간첩. 과연 감독은 그 간첩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 시대의 간첩 경계인에 가까운 그들

▲ 이 시대의 간첩 경계인에 가까운 그들 ⓒ 쇼박스

 

경계인이 본 대한민국

 

강동원이 분한 송지원은 남한 내부에 잠입하여 당의 지시를 기다리는 전형적인 북한 공작원이다. 그는 북한에서 정치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이며, 조국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교과서와 다른 대한민국의 실상을 보더라도 조국을 배반하지 않는 그런 간첩이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개인과 달리 비정한 조국은 끝내 그를 버린다. 물론 그가 조국을 배신했다는 오해가 선행되기는 하지만,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는 시대에 그는 북한에게도 부담스러운 존재임에 분명하다.

 

국가의 배신. 어쩌면 이는 그 어느 곳보다 국가주의가 강한 한반도의 공통된 비극인지도 모른다. 분단으로 인해 남북한 공히 국가주의, 전체주의적 성격이 강한만큼 각 개인이 국가의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희생되어 온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는 송지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이한규(송강호 분)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남한의 국정원 직원으로서 교육받은 대로 빨갱이를 잡으려 최선을 다 하지만, 작전에 실패한 이후 시대 분위기에 맞물려 퇴출당하게 된다. 그러나 국정원에서 젊음을 다 바친 그에게는 가족도, 돈도 남아 있지 않다. 결국 국정원에서 배운 기술(?)을 살려 먹고 사는 수밖에.

 

조국으로부터 버림당하고 모든 걸 잃게 된 송지원. 자신의 과거를 송두리째 날릴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지원은 한규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등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끝가지 노력하지만 헛수고에 불과하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국가의 그것과 동일시하지만 이데올로기가 옅어져 버린 시대에 그와 같은 행위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만난 그들 2010년 대한민국의 이방인이 된 그들

▲ 다시 만난 그들 2010년 대한민국의 이방인이 된 그들 ⓒ 쇼박스

 

결국 지원은 2010년 대한민국의 이방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비록 한국인과 같은 외향에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자신의 과거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그는 이 사회의 그림자일 뿐이다. 따라서 그가 베트남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먹고 자며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단일민족신화로 똘똘 뭉쳐 나와 다른 이방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약한 자들끼리라도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경계인이 바라보는 2010년 대한민국 사회. 그 비루한 사회의 이면은 지원의 시선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남의 돈 가져다가 내 행복 찾는 건 죄가 아니라'는 자본주의 안에서 한낱 돈 몇 푼에 치환당하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사람들. 영화에서는 그 중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을 주목하지만, 어디 이 사회에서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한 두 명이겠는가.

 

의형제의 의미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타인의 피눈물쯤이야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천박한 사회. 그러나 영화는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비록 서로를 의심하며, 남을 밟아야 하는 구조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애가 피어날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당장 제목부터가 '의형제'라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영화에 매력을 느낀 건 제목 때문이었다. 의형제라는 단어의 매력. 비록 혹자는 70년대 풍이라고 빈정대지만 어린 시절 홍콩영화를 열심히 봤거나 동양 고전을 많이 접했던 이들에게 의형제라는 단어는 매우 친숙한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다.

 

우애를 쌓기 시작하는 그들 지난한 과정

▲ 우애를 쌓기 시작하는 그들 지난한 과정 ⓒ 쇼박스

 

피 대신 의를 나눈 형제로서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사나이들. 호형호제가 예부터 어디 쉬운 일이던가. 삼국지 도원결의에서 보듯 하늘에 제를 올리고 서로 피를 나눠마셔야 가능한 만큼 어려운 관계.

 

따라서 한규와 지원이 서로에게 형제애를 느끼게 되는 과정은 지난하기 짝이 없다. 비록 동병상련을 느끼는 사이지만, 둘 사이의 골은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사회구조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바, 마음을 터놓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원을 잡아 한 방을 벌려는 한규와, 한규를 볼모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지원의 기묘한 동거.

 

그러나 결국 둘은 마음을 터놓는다.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물었듯이, 한규는 지원에게 "요즘은 이북에서도 제사 지낸다지?"라고 물으며 그 사이의 간격이 없어졌음을 그렇게 덤덤하게 털어놓는다. 이제 자기를 형이라고 부르라며, 자신에게 칼을 휘두르는 지원의 속마음을 꿰뚫는 한규.

 

이후 벌어지는 그림자의 재등장과 사건들의 연속은 그들의 끈끈한 우애를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가족의 안위만이 삶의 이유가 되어버린 그들에게 서로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맙다. 비록 의심에서 시작된 사이지만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만큼 끈끈한 사이가 된 것이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만큼 아끼는 관계.

 

어쩌면 이 둘의 관계는 2010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독이 제안하는 이상적인 인간관계인지도 모른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인간적으로 대하는 관계야말로 다민족국가로 변해가는 우리 사회가 택해야 할 덕목인 것이다.

 

의형제가 된 그들 호형호제가 어디 그리 쉬운가

▲ 의형제가 된 그들 호형호제가 어디 그리 쉬운가 ⓒ 쇼박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영화를 보자면 영화에서 베트남 이주노동자나 베트남 신부들이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제3국 이주노동자들에게 행해지는 차별의 근거가 많은 부분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에 근거했음을 상기할 때, 결국 우리가 의형제의 우애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영화는 남북 분단을 소재로 삼음으로써 의형제의 외연을 넓혀 나간다. 물론 영화 속 의형제란 표면적으로 한규와 지원과의 관계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곧 '우리'와 이주노동자들, 더 나아가 남북한과의 관계까지 포괄한다. 우리는 항상 남북을 이야기하면서 한 핏줄, 한민족, 단일민족임을 강조하지만 분단 후 50년이 지난 지금 남과 북은 실상 서로 남남일 뿐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은 오히려 의형제 관계에 가까운 것이다. 맹목적으로 같은 핏줄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가치와 같은 이상을 공유함으로써 서로 간의 의리를 챙겨가는 관계.

 

현재 영화 <의형제>는 순항 중이다. 좀 더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 이 시대를 고민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2.26 19:13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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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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