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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표지 사진
▲ 개인적인 체험 개인적인 체험, 표지 사진
ⓒ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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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에 오에 겐자부로가 낸 <개인적 체험>. 이미 나온 지 한 세대가 넘어 고전 축에 넣어야 할 오래된 책이 되었다. 이 책을 내가 다시 읽으려 했던 것은 오에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이 책의 소재와 줄거리가 상당히 흥미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공동체적 삶보다는 개인적인 삶에 더 치중한다고 느끼면서 나는 겐자부로의 작품을 떠올렸다.

겐자부로는 사회적 약자의 삶과 고통을 '나'의 그것으로 여기며 '나'의 삶과 연관지어 살아가는 것에 대해 '공생(共生)'이라고 표현한다(280 쪽). 겐자부로가 이 작품을 낸 1960년대는 일본 시민들이 물질적인 풍요에 젖어들면서 정치적 무관심을 나타내던 때였다. 전쟁 후 일본 사회에서 시민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서로 힘을 모으고 나름대로 정치의식을 보여주었지만, 1950년대 중반부터는, 공생이나 정치 참여보다는 는 개인적인 삶에 더 관심을 보였다.

"분명히 이건 나 개인에게 한정된,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이야.(204 쪽)"라는 버드의 발언에서 보듯 이 소설은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개인적인'이라는 말은 1960년대 일본의 사회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불문학을 공부한 오에가 실존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까닭도 있겠으나,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이라는 표현에서 개인이라는 단위와 공생이라는 말을 겐자부로가 이 소설에서 의도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주인공 버드는 장애아를 낳으면서부터 그 아기와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려는 집요하고도 오랜 계획을 실현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대학을 같이 다녔던 히미코와 불륜 관계를 이어간다. 이는 일탈이며, 장애아인 신생아와 산모인 아내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몰지각하고 염치없는 행위이다. 그는 가장으로서 이들 두 사람에게 무책임하다는 건, 그가 학원에서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공생에는 치명적인 이런 일탈과 무책임한 삶과,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과 삶을 대비시켜 보여주면서 주인공 버드의 심리적 갈등상황을 겐자부로는 세심하게 살핀다. 재미있는 것은 버드가 일탈행위를 이어가면서도 가족과 아기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라든가, 개인의 선택권은 자기 자신에게 있으며,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실존주의의 시각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공생의 문제에서 개인이 언제나 자유로울 순 없다. 공생과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대비되는 개념일 수 없으며, 이 둘은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이 둘을 대비시킴으로써 주인공 버드의 심리적인 갈등과 그 변화를 극적으로 전개해 간다.

버드의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과 갈등을 통해, 겐자부로는 또한 고통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인가에 대해서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자신이 장애아를 둔 탓에 버드가 겪은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고 치명적인가를 이 소설 전체에서 실감나게 겐자부로는 묘사하고 있다. 겐자부로는 버드의 심리 상태를 이렇게 그려낸다.

"생각하는 일이라곤 그의 아기의 죽음에 관해서뿐이었다. 그는 명백히 지속적인 퇴행현상 속에 있었다(199쪽)."

아무리 장애아라 하지만 자신의 아기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이성을 가진 부모로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겐자부로가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공포감이 버드를 사로잡았다(273 쪽)."고 묘사한 데서도 버드의 고통을 읽어낼 수 있다.

버드의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과 일탈행위는 정치적인 일에 무관심해지는 것으로 이어진다. 버드는 히미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후르시초프가 핵실험을 재개했다고 한다면 충격을 받아 마땅할 텐데 나는 텔레비전을 줄곧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질 못했네(201쪽)." "내 신경이 온통 아기 문제에 쏠려 있어서 다른 것에는 반응하지 않게 되어 버린 느낌이야(201쪽)." 버드의 그런 모습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개인이 아프거나 지나치게 어려운 일로 압박을 받으면 그 개인은 으레 '자기중심'의 삶을 하게 된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경우에도, 개인적인 문제 또한 사회나 공동체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문제와 같이 풀어가는 것이 좋다고 바랄 수는 있을 것이다.

겐자부로는 그렇게 살았다. 그는 정말로 이겨내기 어려운, 큰 아들 히카리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극도로 '개인적인' 삶에 매몰되지 않고 공동체 관련 정치/사회 문제나 생명/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오고 있다. 그의 경우, 절대약자인 자신의 자녀문제로 해서 다른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과, 평화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버드는 결국 일탈과 무책임을 벗고 절대약자인 아기와 공생의 길로 간다. 이는 두 개의 애스터리스크(**) 이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부분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버드의 회심 내용이 나오지 않더라도 이 소설은 충분히 텍스트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그 자체로만 본다면 더 흥미로운 결말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겐자부로는 "나름대로 젊은 작가로서 필연성이 있어서였다고, 바로 그 때문에 비판을 각오하고 구상을 관철시켰던 것이라고 지금도 나는 그런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282 쪽)."고 말한다.

1964년 겐자부로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고민과 질문,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 사회에서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사회에서 '개인들'이 물질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삶에 '나'만의 문제 해결에 매몰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성원들이 '개인적인' 어려움을 통해 사회적 약자에게, 생명/평화 운동에 오히려 더 관심을 갖게 된다면 좋겠다.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절박하겠지만, 그것만을 위해 사회적 안전망이나 인권처럼, 인간에게 필요한 다른 가치들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인적인 체험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을유문화사(2009)


태그:#사회적 약자, #사회적 안전망, #개인적인 삶, #다른 이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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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이 사물을 올바로 담아낼 때까지, 사물들을 올바로 이끌어 낼 때까지 말과 처절하게 대면하려 한다. 말과 싸워서, 세상과 싸워서, 자신과 싸워서 지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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