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한테 예의를 지키는 일이란 어렵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누군가한테는 예의를 지키는 일이 삶이기 때문에 아주 마땅할 뿐 아니라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누군가한테는 예의를 지키는 일이 삶이 아닌 겉치레와 인사치레이기 때문에 몹시 번거로울 뿐 아니라 힘듭니다.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진 일요일 낮나절, 이웃동네인 송림4동 마실을 하다가 지난주에는 보이지 않던 '스프레이 낙서'가 잔뜩 뿌려져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골목마실을 하는 동안 손가락이 얼어붙어 시리디시렸는데, 스프레이 낙서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동안 가슴은 훨씬 얼어붙으며 시리디시립니다.
이 나라 공무원과 개발업자는 오래도록 고향동네로 삼으며 뿌리내린 사람들 터전을 '오로지 아파트 재개발'로 강제수용하면서 고작 이런 예의밖에 보여줄 수 없었을까요? 아니, 공무원으로서는 행정처리를, 개발업자로서는 더 빠른 일처리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동네를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혀도 될까요?
헐어야 하는 집이라면 헐어야겠지요. 그런데 동네 재개발을 하는 이 흐름에서도 '이사를 안 간 집'은 어김없이 있습니다. 옮길 데가 없어서 못 가는 사람이 있고, 고향을 떠나기 아쉬워 못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짧으면 며칠, 길면 몇 주, 더 길면 몇 달인데, 딸아들 키워 내고 온 젊음과 늙음을 치러낸 삶자리에서 하루아침에 내몰면서 그토록 살내음 배어 있는 보금자리에 이런 볼꼴사나운 스프레이 낙서질을 해대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니, '위'에서 이렇게 하라고 시켰다 할지라도 이렇게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사람들 가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는 집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는 집입니다. 내 어버이가 사는 집이며, 내 동무가 사는 집입니다. 집은 한낱 재산이 아닙니다. 집은 우리 땀방울과 눈물방울이 어리며 웃음과 손때가 깃든 쉼터입니다.
돈만 섬기거나 우러르는 이 땅에서 예의를 찾기란 어렵겠지만, 어렵다고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이음고리를 우리 스스로 놓아 버리면 누구보다도 이렇게 살내음 짙은 보금자리를 망가뜨리는 사람들 마음바탕이 함께 망가지는 일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돈은 얼마쯤 벌겠지만 마음은 잃어버립니다. 돈을 얼마쯤 움켜쥐면서 부자에 가까워진다지만 사랑을 놓아 버렸기에 메마르고 차디찬 사람으로 굴러떨어집니다. 돈으로 온갖 놀음놀이를 즐기거나 자가용을 장만하거나 나라밖 여행을 즐길 수 있다지만 너그러움과 넉넉함하고 멀어지면서 구슬프고 애처로운 허수아비가 되고 맙니다.
답답한 가슴에 응어리가 쌓이는데, 햇볕 잘 드는 골목 한켠에서 이 겨울에도 꽃송이를 떨구지 않는 가냘프고 작은 꽃송이를 들여다보니 조금씩 누그러집니다. 이 나라에서 사람은 언제쯤 맑은 무지개 넋을 건사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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