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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인데 4000만원밖에 못 모았어요.'

얼마 전 우연히 들어간 한 사이트 게시판에서 본 글이다. 나도 내일모레면 서른인데, 이 글을 보고 부럽기보단 약간의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 아, 난 저 아래 댓글로 '나이 서른인데 100만원도 못 모았어요'라고 달아야 하나…. 한참동안 머리를 이렇게도 굴려보고 저렇게도 굴려보다가 결국 치밀었던 울화를 곱게 접은 뒤 슬며시 그 사이트 창을 닫고 나왔다.

여기서 잠깐. 내 상황을 모르고 '뭐야, 얜, 나이 서른 되도록 100만원도 못 모았단 말야? 대체 뭘 하고 산 거야?'라고 속으로 욕하고 계실 분들을 위해 짧은 설명을 덧붙인다.

나도 한때 꼬박꼬박(은 아니긴 했지만) 월급을 받았던 그 이름도 당당한! '직.장.인'이었다. 대학에서 4년 동안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졸업과 동시에 한 방송국에 취직도 했었다. 방송국에서 일할 당시 많은 선배들에게 눈치 빠르고 열심히 일하는 후배로, '촉망받는' A급 조연출로 불렸었다.

촉.망.받.는 조연출, 학업에 뛰어들다

스무 살 때 난, 서른 살이 되면 '카리스마' 넘치는 커리어우먼이 돼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진은 KBS 드라마 <열혈장사꾼>의 한 장면.
 스무 살 때 난, 서른 살이 되면 '카리스마' 넘치는 커리어우먼이 돼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진은 KBS 드라마 <열혈장사꾼>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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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들 조연출이 하는 일이 뭔지는 알겠지만, 안 되는 일 없이 뭐든지 되게 해야 하는 게 조연출 아닌가. '없는 것도 만들어내야 한다'는 정신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당시 일했던 방송국은 인천에 있었는데, 집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방송국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한 번은 방송국 냉장고에 넣어둔 삼각김밥을 먹고 극심한 장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열심히 일했다.

방송국에서 일할 땐 엑스트라가 모자라면 엑스트라가 되기도 했고, 담당하는 프로그램 예고를 만들기도 했고 프로그램의 일부분을 편집하기도 하면서 연출가의 꿈을 키워갔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오마이뉴스> 방송팀에서 6개월간 일하게 됐고, 그때도 여러 현장을 오가며 많은 경험을 했다. 사실 포털사이트에 내 이름을 치면 나오는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뿌듯하다(잘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렇다. 난 이런 사람이었다. 근데 왜 지금은 빈털터리냐고(사실 빈털터리는 아니다. 아직 내 통장엔 잔고 100만원이 있으니까!)? 3년 전 진로를 급선회해 다시 학생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쯤에서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촉.망.받.는'이라더니, 왜?'라고.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세상이란 게 나만 잘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나도 잘하고, 주변 환경도 어느 정도 받쳐줘야, 일이 잘 풀린다. 그때는 그랬다. 방송일이 즐겁긴 했지만, 밝은 미래를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학생이 되기로 했다.

20대에 10년동안 '공부'를 해야 한다더니...

누가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 나이에 다시 공부할 생각을 하다니…'라고 말이다. 그랬다. 머리가 굳어 공부가 힘든 것도 힘든 건데, 그때까지 누리고 있던 모든 것(다달이 나오는 월급과 보너스, 사내커플에 대한 로망?)을 눈물을 삼키며 포기해야 했다.

물론 다시 학교로 돌아가선 '20대 후반'이란 나이에 맞지 않는 철없는 짓들도 좀 했다. 학교 간다고 집을 나서서는 조조영화를 보러 간 적도 있고, 수업 땡땡이 치고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한 시간 동안 걸은 적도 있다. 어쩌면 '고딩'들도 잘 하지 않는 그런 '유치한' 짓들을 서른을 코앞에 두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늦은 '사춘기'를 보내고 있을 쯤,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이 엄습했고 그 불안은 '열공'으로 이어졌다. 내가 그때 왜 그렇게 돌변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낙오자'라는 낙인이 두려웠을 수도.

여하튼 그 공부라는 것, 생각보단 해볼 만했다. 나이가 들어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고, 한 번 볼 것 두 번 봐야 하는 크나큰 단점이 있긴 했지만 책의 내용과 인생을 접목 시켜 이해하려고 했더니, 어렵지 않았다. 어렸을 때처럼 무조건 억지로 외우기보단 쉽게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게 먹혀든 것 같다.

누군가는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했지만, 나이 든 내가 겪어본 결과 제일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니까 되더라'라는 경험은(사실 짧은 시간에 많을 일을 겪은 나에게 이젠 모든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10년 동안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주를 가진 나에게 조금은 희망이 된 것 같고 앞으로 내가 어디선가 '열공'의 기운이 필요할 때 도움이 된 듯하다.

물론 젊은 피들의 그 총총한 눈빛과 지칠 대로 지쳐 퀭해진 내 눈빛을 비교해보고 있노라면,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혹시 나같이 나이 서른 가까이에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한 번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적극 강추다.

서른, 다시 '면접'보러 갑니다

서른 살을 앞둔 지금, 고등학교 때처럼 다시 '열공'을 하고 있다. 사진은 KBS 드라마 <눈의여왕>의 한 장면.
 서른 살을 앞둔 지금, 고등학교 때처럼 다시 '열공'을 하고 있다. 사진은 KBS 드라마 <눈의여왕>의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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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20대 절반 이상을 '공부'와 함께한 나지만, 나라고 서른 살 그 즈음의 여성들이 하는 '결혼'에 대한 고민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스무 살적 난 서른 살이 되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알콩달콩' 한 가정을 꾸리며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 '카리스마'넘치는 삶은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지금까지도 누구나 뛰어들 수밖에 없다는 그 취업대란 차에 올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결혼은커녕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하기도 힘든 게 내 현실이다.

친구들은 모였다하면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난 아직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지금 나는 결혼을 생각하기에 앞서 내 앞날이 더 걱정이다. 고등학생들도 수능이 끝난 이 시기에 난 수능에 버금가는 국가고시를 대비해야 하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자기소개서를 써야하고 면접 준비를 해야 한다. 사실 많이 두렵다. 그렇다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힘들게 두, 세 걸음 다가갔는데 이제서 포기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른 살을 고작 한 달여 남긴 지금, 난 3년 전 내가 한 선택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내 선택에 '모험'이라며 좋은 의미를 더해주기도 했고, 누군가는 '헛 짓'이라며 비웃기도 했지만, 누가 뭐래도 난 내 선택이 옳았음을 믿는다.

며칠 후 면접을 보러 간다. 엄청 떨리고 긴장된다. 수차례 낙방의 쓴맛을 보고나서 맞은 기회라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사실 내가 붙을지 떨어질지는 알 수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도 난 최선을 다 할 거다. 이제는 더 이상 기회를 그냥 놓치지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으니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고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객관적 잣대로, 혹 누군가는 내 20대에 '실패'라는 낙인을 찍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노력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늦은 출발이긴 하지만 주춤거리다 아직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 찾지 못한 이들보다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자부한다. 늦고 빠르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나에게 온 기회에 어떻게 반응하고 선택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내 스물아홉의 결론이다.

나에게 서른은 기회의 시작이고 경춘고속도로의 휴게소 같은 충전의 시간이 될 것이다. 내가 겪어온 작은 부분, 부분들이 모여 내 인생에 더 큰 시너지를 낼 그날을 기대하며 새로운 서른을 시작해 봐야겠다.


태그:#서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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