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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찢는 폭음이 천지를 흔들었다. 제이크(Jake Diliberto)가 동료들과 함께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을 순찰하던 중 로켓포 공격을 당했다. 제이크는 차에서 튕겨 나와 땅바닥에 쓰러졌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머리통을 울렸다. 겨우 정신을 차리자, 쓰러져 있는 동료들이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총소리가 계속 이어졌고, 제이크는 본능적으로 총부터 더듬어 찾았다. 한두 걸음 거리에 떨어져 있는 총까지 기어가는 순간이 영원처럼 길었다. 총을 붙잡고 서둘러 총구를 돌렸다.

 

9·11 테러 직후, 제이크(Rethink Afghanistan 공동 설립자)는 대서양과 지중해를 담당하는 미 '26해병원정단'에 배속되어 이라크로 파병됐다. 할아버지는 1차 대전에, 아버지는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참전용사 집안이다. 갑작스런 9·11 테러는 제이크의 애국심을 요동치게 했고, 테러를 응징하겠다며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주저 없이 참여하게 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제이크는 그가 다니던 교회의 격려와 축복 속에 전장으로 떠났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하기 시작해 2003년 이라크로 근무지를 옮기고 그해 말 전역했다.

 

정보 수집 및 정찰이 제이크의 임무 중 하나였다. 이라크의 적 후방에 침투해 들어가 정보를 수집했다. 정보를 얻으려면 친구를 만들어야 했고, 이라크 주민들과 어울리게 됐다. 러샤라는 8살짜리 여자아이와도 그렇게 가까워지게 됐다. 제이크는 러샤의 집에 들러 가족들과도 자주 시간을 보냈다. 러샤의 가족들이 문화적으로 무슬림이었지만,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동방정교회)이었기에 한층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었고, 그들로부터 많은 정보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제이크가 순찰 도중 공격을 받았던 그 순간, 그를 공격했던 사람들 틈에 러샤의 아버지가 있었다. 제이크의 총구는 러샤의 아버지를 향하고 있었다. 불과 몇 초였지만, 시간이 멈춘 듯했다. 전쟁터가 제아무리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폭력이 충동질하는 곳이라지만, 친구를 쏠 순 없는 일이었다. 제이크는 총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미군 장갑차가 러샤의 아버지를 향해 불을 뿜었다. 러샤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러샤의 오빠인 아크무드가 뛰쳐나와 아버지가 들고 있던 총을 들었다. 아크무드가 제이크를 알아보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크무드 역시 제이크를 겨눴지만, 서로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이윽고 다른 미군 저격수가 쏜 총알이 아크무드의 몸을 관통했다. 그는 아버지의 주검 곁에 맥없이 쓰러졌다.

 

"군대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만든다. 나는 총을 쏘도록 끊임없이 훈련받았지만, 그 순간 총을 쏠 수 없었다. 그들이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적이 아니라 친구였다. 하지만 러샤의 어린 오빠는 내 눈 앞에서 죽어갔다. 이것이야말로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국가주의'에 대해 회개한 전쟁 지지자

 

풀러신학교에 재학 중인 제이크를 학교 앞 커피숍에서 만났다. 불거진 눈시울과 가늘게 떨리던 제이크의 손에서 당시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때 그 사건은 신앙과도 같았던 '정당한 전쟁'에 대한 제이크의 확고한 신념에 균열을 가져왔다. 그 균열은 여러 물음을 만들어냈다. 왜 우리는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눠야 했는가, 그들이 우리를 향해 공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를 따르도록 훈련받아야 할 그리스도인이 사람을 죽이도록 강요받는 전쟁터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눠야 하는가. 

 

제이크는 그 질문을 마음 한구석에 묻어 둔 채, 제대 후 일리노이주립대학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전공 수업에서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 '테러리즘'에 대한 심판이라는 데 동의하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중동의 평화',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갖가지 수식어를 내걸었지만, 이라크 전쟁은 이미 명분 없는 '더러운 전쟁'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쟁 지지자였던 제이크는 분노했다. 국가를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억압받는 이라크 민중의 자유를 위해서 죽음의 공포와 씨름했던 자신의 수고마저 조롱당하는 것 같았다. 수업 시간에 전쟁에 대해 토론이 벌어질 때마다 제이크는 다른 학생들과의 또 한 번의 외로운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런 제이크를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 자말 나사르 교수(정치학과)다. 그는 제이크를 만나 자신의 강의를 더 들어보라고 제안했다. 수업에 참석하기만 해도 학점을 후하게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도 달았다. 그는 자말 교수의 '비폭력 정치', '국제 분쟁과 안정', '중동 정치'를 수강했다. 수업을 듣는 1년 반 동안 이라크에서 생겼던 '신념의 균열'은 더 크게 벌어졌다.

 

제이크는 겉으로는 '국제 평화'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패권과 이익을 위해 전쟁을 저질러온 미국 정부의 추악한 이면과 직면하게 됐다. 군산복합체와 석유 재벌들과 정부의 밀월 관계가 전쟁과 군비 증강을 부추겼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도 그 연장선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됐다.

 

졸업을 앞둔 제이크는 자말 교수와 함께 몇 달간 팔레스타인 지역에 머무를 기회가 생겼다. 보수적인 무슬림 가정에서 지내면서 그들과 깊이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이전까지 그에게 팔레스타인은 9·11테러 직후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하던 사람들이었고,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직접 만나본 그들은 달랐다.

 

"그들은 나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우리 교회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르쳐주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지원하고, 무슬림을 홀대하지만 이 사람들은 나를 지극 정성으로 대접해주었다. 진정 예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인종·민족·관점·종교가 다르지만, 함께 평화를 누릴 수 있었고 내 삶이 새롭게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때의 경험이 자신을 회개하도록 만들었다고 제이크는 고백했다. 자신의 우상이 다름 아닌 '국가주의'였음을 깨달았다. 국가주의는 근본주의 신앙과 결합해 극단적인 증오와 폭력을 정당화했고, 자신을 전쟁이라는 추악한 체제에 뛰어들게 만들었다는 것도.

 

비폭력이라는 빛으로 폭력이라는 어두움을 몰아내야

 

팔레스타인에서 돌아온 제이크는 자신의 '회심기'를 그가 다니던 교회 리더들과 나눴다. 그가 군 입대를 결심하자 참전을 지지하며 기도해주었고, 사지에서 돌아오자 파트타임 사역자로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던 교회는 제이크의 뜻밖의 고백에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다'는 해고 통지로 답을 대신했다.

 

제이크는 "신학적인 위기"였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외눈박이 괴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고, 그에게 익숙했던 교회가 생경하게 다가왔다. 제이크는 대학 졸업 후 풀러 신학교 목회학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자신 안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고민을 얼기설기 엮어가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졸업할 무렵, 제이크는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의 변화를 새로운 운동으로 만들어갔다. 현재는 몇몇 전역 군인들과 함께 'Rethink Afghanistan'이라는 단체를 만든 제이크는 활발한 반전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워싱턴을 방문해 의원들을 만나면서 미국의 대외 정책을 재고해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군사적 접근으로 인한 실패를 인정하고, 총체적인 대안을 마련해, 비군사적 방법으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제이크는 지난 8년 동안 미국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를 벌여왔지만, 폭력과 불안정함만 가중될 뿐이라며, 무력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두움으로 어두움을 없앨 수 없듯, 폭력으로 폭력을 멈출 수 없다. 비폭력이라는 빛으로 폭력이라는 어두움을 몰아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주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반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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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갈등전환센터 센터장 (서울시 이웃분쟁조정센터 조정위원, 기상청 갈등관리 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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