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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 방문 위에 걸려 있는 이 편액은 오세창의 글씨다
 심우장 방문 위에 걸려 있는 이 편액은 오세창의 글씨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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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잊고 살던 옛 친구도 그리운 계절인가보다. 9월 10일 추억여행을 했다. 찾아간 곳이 같은 서울이니 굳이 여행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두 다리가 뻑적지근하게 발품을 팔았으니 여행이란 말을 써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옛 친구의 추억을 더듬어 성북동을 찾은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사십 몇 년 전, 내 젊음이 한창이던 때였지만 삶은 참 팍팍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요즘 시쳇말로 잘 나가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시중은행에서 고급간부로 일하는 아버지 덕분에 학비걱정 안 하고 용돈도 넉넉하게 쓰며 공부하던 친구였다.

성격도 호방하여 가끔 친구들에게 막걸리도 잘 사고 한 마디로 인기가 좋았다. 그 친구가 살던 동네가 바로 성북동이었다. 가끔 친구의 집 한 방에서 뒹굴며 지내기도 했고, 아랫마을에 내려가 막걸리로 속을 풀던 시절이었다. 당시 그의 집은 성북동 오른편 산비탈 언덕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옛 친구의 추억을 더듬어 찾아간 성북동에서 보물을 찾아 헤매다

집은 한옥으로 그다지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마당에서 바라보이는 전망이 시원하고 운치 있는 집이었다. 친구가 살던 시절에는 자주 갔었던 동네였다. 그러나 군대생활을 마치고 그가 미국으로 떠난 후에는 거의 소식이 끊겨 성북동과의 인연도 끊어지고 말았다.

마당에서 바라본 심우장 전경
 마당에서 바라본 심우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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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렸다. 우선 옛 기억을 더듬어 오른편 언덕길로 올라가 보았다. 그러나 기억 속의 거리나 골목은 가물가물 하기만 할 뿐, 도무지 어림할 수도 없었다. 골목길 몇 곳을 더듬다가 내려오고 말았다.

다시 종점으로 내려와 옛 친구의 추억 대신 성북동에 숨겨져 있는 보물 몇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마침 근처에서 만난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심우장과 수연산방을 물었다. 아주머니는 종점 근처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심우장이요? 그게 뭐하는 곳인데요, 중국요리집인가요? 잘 모르겠는데요, 수연산방? 그런 곳이 있었나요?"

아니 이럴 수가? 성북동에 살고 있으면서 심우장도 모르다니, 한용운의 심우장이나 이태준의 수연산방은 성북동이 자랑하는 보물들이 아니었더란 말인가? 그런데 활달한 성격에 지성미까지 있어 보이는 아주머니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길을 잘못 물은 것이다.

우선 실망이 컸다. 그 유명한 심우장을 성북동에 10년 넘게 살고 있으면서 모르다니. 그러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야 바로 옆에 있다 한들 알 턱이 없는 것 아니던가, 규모가 큰 저택이나 빌딩도 아니니, 그러고 보면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십여 년 전 친구가 이 동네에 살고 있어 자주 왔었지만 그때는 별 관심이 없어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마침 버스에서 내린 다른 젊은 아주머니에게 묻자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안내판이 보인다고 한다. 오른편 골목 언덕길로 한참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심우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만해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방안 모습
 만해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방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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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걸어 내려가자 길가에 작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오른편 언덕으로 방향 표시가 되어 있었다. 심우장으로 올라가는 비좁고 가파른 오르막 골목길이 '심우장 길'이었다. 구불구불 가파른 길은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었다. 햇살이 따가웠다. 금방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더듬더듬 올라가자 좁은 골목길 오른편 대문 가운데 문설주에 심우장(尋牛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별로 넓지 않은 마당 건너 맞은편에 관리동이 서 있고 왼편에 단아한 모습의 한옥 한 채가 서 있다. 네 칸짜리 집이었다.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등 돌려 앉혀 북향으로 지은 집

마주보아 맨 왼편 방문 위에 한문자로 '尋牛莊'(심우장)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 33인 중 한 분이었던 위창 오세창 선생이 직접 쓴 글씨다. 세 칸의 방안에 특별한 유물은 없었다. 그렇지만 작고 단아한 방안에서 한용운 선생의 체취가 묻어날 것 같았던 것은 나그네만의 느낌이었을까?

심우장 부엌 모습
 심우장 부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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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소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타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한용운 시 '심우장' 모두-

방안 벽면에 있는 안내문에는 심우장이란 '무상대도를 깨우치기 위한 집'이란 말로 '공부하는 집'이란 뜻이라고 쓰여 있다. 한문자를 그대로 해석한 '소를 찾는 집'이란 말이 주는 불교철학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네 번째 칸은 부엌이었다. 집안을 둘러보고 앞마루에 올라서니 북쪽 산비탈 주택들이 마주 바라보인다. 부자 동네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론 서민주택들도 많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심우장은 북향집이었다.

심우장이 남향이 아니라 북향 산비탈에 그것도 북향으로 앉아 있는 까닭은, 만해선생이 조선총독부를 싫어하여 총독부청사가 있는 남쪽에 등을 돌려 앉혀 집을 지었던 때문이다. 집은 만해가 3·1운동으로 3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성 밖 마을 북장골 골짜기에 새로 지은 집이었다.

앞마당 오른쪽 귀퉁이엔 만해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마치 외발로 서 있는 듯한 모습이 학처럼 고고했던 만해의 기품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보기 싫은 총독부에 등 돌려 집을 세워 햇빛까지 포기한 이 곳 심우장은 결기 있고 꼿꼿한 그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곳이었다.

심우장 주변에 서 있는 집들도 대부분 규모가 작은 한옥들이었다. 심우장을 나서 내려오는 길에도 초가을 햇살이 뜨겁게 내려쬐고 있었다. 큰길로 내려와 지나가는 사람에게 수연산방을 물으니 "찻집 말이지요?" 하며 내려가는 길 건너 아래쪽을 가리킨다.

대문 앞 주차장에서 바라본 수연산방
 대문 앞 주차장에서 바라본 수연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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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길을 건너 내려가면서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지만 수연산방은 보이지 않는다. 개울 건너 찻집처럼 보이는 곳을 찾아들어가니 찻집은 맞는데 수연산방이 아니다. 마침 찻집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물으니 가까운 지점을 손으로 가리킨다.

이태준 문학의 향기를 귀로 듣는 수연산방

그가 가리키는 곳에선 건물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 주차장이 있는 공터 뒤가 수연산방이었다. 그런데 길가 어느 곳에도 쉽게 눈에 뜨이는 안내 표지판이 없으니 찾을 수가 있나. 성북동에서 명소를 찾아가기란 숨바꼭질이나 보물찾기에 비유될 만 했다.

언덕길로 오르는 길가 제법 넓은 주차장 안쪽에 있는 쪽대문 양쪽으로 이어진 담벼락 위에 가지런하게 얹혀 있는 기와담장이 아름답다. 대문간 바로 옆 담장 위에는 붉게 익어가는 대추나무가 따가운 땡볕 아래 초가을을 일깨워주는 풍경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젊은 커플이 안에서 나오다가 비켜선다.

상허(尙虛)선생의 옛집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은은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이 집은 월북 작가인 상허 이태준 선생이 1933년에 지은 대지 120평에 건평 23평의 한옥이었다. 형태는 전면은 팔작지붕이고 후면은 맞배지붕으로 전통적인 우리 한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연산방 안채 내부
 수연산방 안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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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선생은 1933년에 이집을 지어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는 이름을 짓고 1946년까지 살면서 저술생활을 했다. 이 집에서 탄생한 작품이 단편소설 '달밤'과 '돌다리' 중편소설 '코스모스 피는 정원' 장편소설 '황진이'와 '왕자호동' 등이다. 강원도 철원 출생인 상허선생은 휘문고보를 나와 1933년에 박태윤, 김기림, 정지용, 유치진, 이효석 등과 함께 '9인회'를 조직하여 문학창작활동을 한 우리나라 단편 소설의 선구자다.

그는 1945년 해방을 전후한 일제강점기와 혼란기 시절,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다. 그의 간결하고 호소력 있는 문장은 독자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무기력하지만 우리의 전통적 삶을 잘 드러낸 사람냄새가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초기작품 중 하나인 '아무 일도 없소'는 신출내기 기자의 취재에 의해 3·1운동 당시 대동단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망명한 애국지사의 딸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녀는 생계가 어려워 창녀가 되었고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독립지사의 아내가 자결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러한 비극적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꼬집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소'는 다분히 세상에 대한 반어적 인식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따끔한 메시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수연산방 특이한 이름을 가진 문향루
 수연산방 특이한 이름을 가진 문향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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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에서 왼편인 수연산방의 서남쪽에는 행랑채가 있었으나 6·25 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지고 가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본채는 모두 전통찻집 수연산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가옥 안채 뒤쪽에 누마루가 조성되었으며 앞쪽으로 조금 튀어나온 듯한 곳에 문향루(聞香樓)라는 부채 모양의 편액이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문향(聞香)이라면 글자 뜻으로는 '향기를 듣는다'는 뜻이다. 향기를 코로 맡지 않고 귀로 듣다니 참 특이한 이름이지만 여간 멋진 이름이 아니다. 역시 당대 최고의 문사답게 지은 이름이 아니던가, 방안과 누마루 몇 곳에는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혼자인 나그네가 끼어들기는 마땅치 않은 것 같아 발길을 돌렸다.

큰길로 나오자 길가에 '이종석 별장'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종석이라? 아무래도 낯선 이름이다. 그렇지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은 '덕수교회'라는 교회로 들어가는 쪽이 아닌가. 그럼 교회 안에 문화재가 있다는 말이다.

이종석 별장 일각대문과 열십자형 구멍이 뚫린 담벼락
 이종석 별장 일각대문과 열십자형 구멍이 뚫린 담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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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오르막길을 올라 주차장에 이르자 오른편에 고풍스러운 담장 너머로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 한옥이 바라보인다. 담장을 돌아가자 대문이 보였지만 문은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진 채 굳게 잠겨 있다. 그리고 '덕수교회 영성수양관'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마포 강변에서 새우젓 장사로 갑부된 이종석의 별장

대문 바로 앞쪽 바깥마당 한쪽에는 지붕까지 있는 우물도 보존되어 있었다. 이 건물이 바로 1977년에 서울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된 183평의 전통 한옥 '이종석 별장'이었다. 이 집을 세운 이종석은 조선 말기에 마포강변에서 새우젓 장사로 많은 돈을 벌어 갑부가 된 사람이었다.

이 집은 심우장이나 수연산방에 비해 규모가 월등히 컸다. 1900년대에 지어진 이 집은 건평이 29.8평이나 되었다. 우물이 있는 바깥마당 안쪽에는 작은 쪽문이 있었지만 역시 드나들 수 없도록 잠겨 있었다. 대문 안 동북쪽에는 날아갈 듯 처마를 치켜든 안채가 있고 북쪽에는 행랑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담장 위쪽에 열십자 형으로 뚫린 구멍으로 바라본 이 집은 사랑채 비슷한 형태의 안채와 여기에 딸린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북쪽에 안채, 북쪽에 행랑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인 'ㄹ'자 형태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남향집이었다.

담벼락의 열십자형 구멍으로 들여다본 안채 모습
 담벼락의 열십자형 구멍으로 들여다본 안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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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청 옆 누마루에는 일관정이라고 쓴 편액을 걸어놓아 멋진 모습이었다. 추녀에는 댕그랑거리는 풍경을 달아 놓았으며, 회색 전벽돌로 집 주변에 영롱담을 쌓았는데 제법 높직하여 밖에서 넘겨다보기도 쉽지 않았다.

안채로 드나드는 일각대문과 그 바깥마당의 지붕이 있는 우물가 등은 집터 주변의 나무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와 소나무 등과 어우러져 예스러운 멋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

고풍스런 팔작지붕과 추녀마루 끝에서 하늘로 쳐들려 올라간 지붕과 처마도 날아갈 듯 멋스럽다. 그리고 방에서 마루로 통하는 미닫이문 격자무늬 창살도 한옥의 멋스러움을 더해준다.

이 집은 양반가의 살림집이라기보다 별장용 건축의 색다른 면모를 갖춘 집이었다. 따라서 봉건제도가 흔들리던 변화기에 지어진 집으로, 부자이긴 했지만 상인계급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문화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대문밖 바깥마당에 있는 지붕이 있는 우물
 대문밖 바깥마당에 있는 지붕이 있는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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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의 별장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는 큰길까지 뒷산과 별장의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에 묵지근한 피로가 몰려온다. 햇볕 따가운 초가을 한나절이 성북동 골목길을 누비는 동안 지나간 것이다.

옛날에는 성 밖 산골마을이었지만 한때 부자마을로 소문이 자자했던 동네, 오르락내리락 언덕과 골목을 누비며 찾아낸 심우장과, 수연산방 그리고 색깔이 전혀 다른 이종석의 별장까지, 같은 서울에 살면서 40여년 만에 둘러본 성북동에서 발품 팔아 찾아낸 값진 보물 들이었다.


태그:#심우장, #수연산방, #이종석별장, #이승철,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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