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마당은 물론 지붕까지 온통 새빨간 고추로 뒤덮인 집
 마당은 물론 지붕까지 온통 새빨간 고추로 뒤덮인 집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저 지붕 좀 봐? 빨간색 기와지붕인 줄 알았더니 고추를 널어 놨잖아?"
"마당도 지붕도 온통 새빨간 고추로 뒤덮였구먼."

무더위 속에 슬며시 다가온 가을이 거기 있었습니다. 빨간색 기와지붕으로 착각할 정도로 빈틈없이 지붕을 뒤덮은 새빨간 고추들과 마당 멍석 위에 널려 있는 고추들, 그리고 골짜기에 피어난 갈대꽃과 사찰 마당에 널려 있는 도토리에도 가을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가을맞이 산행으로 넘은 북한산

"오늘은 북한산을 넘어 가을맞이 하러 가는 거야."
"산 넘어 가을맞이?"
"응, 저 산 넘어 어디쯤 가을이 오고 있을 것 같아서."

일행이 웬 생뚱맞은 얘기냐는 듯 얼굴을 빤히 쳐다봅니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진달래능선 입구에서였습니다. 전날부터 해맑았던 날씨가 이날도 좋았습니다. 9월 첫날 화요등산은 북한산으로 정했습니다. 전날인 8월의 마지막 날 북한산 위 하늘에 저녁놀이 곱게 물든 풍경을 보며 불현듯 저 산을 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곧바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우이동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북한산을 찾았습니다. 산을 넘어 어디로 내려갈 것인지는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산만 넘으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았지요, 우이동 버스종점에서 내려 도선사로 가는 골짜기를 걸어 올라가다가 왼편 능선 샛길로 빠졌습니다.

이 능선이 바로 대동문으로 오르는 진달래 능선입니다. 진달래 능선길에서 바라본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습니다. 골짜기 건너편 풍경이어서 가깝기도 했지만 쨍하고 맑은 날씨 때문이었지요.

해충의 공격으로 말라 죽어가는 참나무
 해충의 공격으로 말라 죽어가는 참나무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능선길을 걸으며 북한산성 대동문이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걸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을 쉬었는데도 대동문이 있는 고갯마루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능선길은 숲길이었지만 강렬한 햇살이 나무 그늘을 헤집고 들어와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진달래 능선인데 진달래나무는 별로 보이지 않고 벌레 먹은 참나무들만 많구먼."

일행이 지적하는 말을 듣고 살펴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능선 이름에 걸맞게 진달래를 많이 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해충이 파고들어 밖으로 내뿜은 하얀 가루를 뒤집어 쓴 참나무 줄기들이 안타까운 모습이기도 했지요.

나무그늘 밑에서 쉴 때면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지만 산길을 오르노라니 더운 땀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대동문 못 미쳐 골짜기에 졸졸 흘러내리는 약수터 샘물은 '부적격'이라는 검사 표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설마 죽기야 하랴' 하는 맘으로 그냥 한 모금 마시고 대동문으로 들어섰습니다.

대동문도 그 사이 심한 몸살을 앓았는지 치료받고 있는 중이었지요, 성벽은 물론 문루 주변에 얼기설기 세워진 보수공사용 쇠막대와 패널들이 어지러운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안으로 들어서자 풍경이 싹 바뀌었습니다.

북한산 대동문 쉼터에 사는 길강아지 누렁이

넓은 공터는 군데군데 둘러 앉아 점심을 먹는 등산객들 모습이 소풍 나온 어린이들 같았지요.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눈길을 붙잡는 것이 있었습니다. 체구가 크지 않고 자그마한 강아지 한 마리였습니다.

북한산 대동문 쉼터에서 길강아지로 살아가는 누렁이
 북한산 대동문 쉼터에서 길강아지로 살아가는 누렁이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털빛이 노르스름한 강아지는 사람들이 둘러 앉아 점심을 먹는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심을 먹던 등산객들이 던져주는 밥이며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등산객들이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음식이 조금씩이어서 강아지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음식을 얻어먹고 있었지요,

우리들도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점심 도시락을 펴놓았습니다. 밥을 몇 숟갈 먹었을 때 예의 강아지가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녀석은 아주 가까이 접근하지 않고 3~4미터 쯤 떨어진 거리에 서서 우리들을 넌지시 바라보다가 눈빛이 마주치면 슬쩍 고개를 돌리곤 했습니다.

녀석은 아직 조금 어려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얼굴도 눈빛도 아주 순한 모습이 여간 귀여운 녀석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반찬과 정상주 안주로 먹고 있던 장조림 몇 점과 메추리알을 집어 앞으로 던져 주었지요. 그러나 녀석은 선뜻 다가서지 않았습니다.

강아지에게 와서 먹으라고 손짓을 하자 조심조심 다가와 얼른 물고 물러섰습니다. 강아지는 사람들이 던져 주는 음식을 얻어먹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녀석은 우리들이 던져 준 묵은 김치도 먹었습니다.

우리들에게서 그렇게 몇 점의 음식을 얻어먹은 강아지는 근처에서 다른 여성등산객들이 음식을 던져주자 그쪽으로 옮겨갔습니다. 귀엽게 생긴 누렁이 강아지는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얻어먹고 있었습니다.

"저 누렁이 주인 없는 강아지야, 이곳에서 등산객들이 나눠주는 음식을 얻어먹고 사는 길강아지가 분명한 것 같아."

"네, 맞습니다. 저 강아지 이곳에 나타 난지 꽤 오래됐습니다. 집 나온 강아진가 봐요?"

우리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근처에서 도시락을 먹던 다른 등산객이 하는 말이었습니다. 누렁이는 대동문에 눌러 앉아 살아가는 길강아지였습니다. 도봉산과 북한산 일대에 길고양이가 많은 것은 전부터 많이 봐서 알고 있었지만 길강아지는 처음이었습니다.

나무 한 줄기에 딱따구리 구멍이 여섯 개, 딱따구리 아파트?

귀엽게 생긴 누렁이가 길강아지로 산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대동문 쉼터에서 점심을 먹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무작정 내리막길로 나섰습니다. 어젯밤 붉은 노을이 곱게 타던 하늘은 마냥 높고 푸르기만 했습니다.

나무 한 줄기에 딱따구리 구멍(붉은 색 점선 안)이 여섯개나 있는 ' 딱따구리 아파트 나무'
 나무 한 줄기에 딱따구리 구멍(붉은 색 점선 안)이 여섯개나 있는 ' 딱따구리 아파트 나무'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내리막길 골짜기엔 맑은 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있어서 시원한 풍경이었습니다. 길 양쪽엔 숲이 우거져 밝은 햇살 속에서도 어두컴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길을 조금 내려가다가 일행이 갑자기 멈추어 섰습니다.

"저 나무 좀 봐? 저거 딱따구리 구멍들 아니야? 그런데 나무 한 줄기에 구멍이 도대체 몇 개야?"

일행이 발견한 나무는 양쪽으로 뻗어 올라간 두 줄기 가지가 부러져 버린 Y자 형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한줄기 나무에 동그랗게 뚫린 딱따구리 구멍이 6개나 뚫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위쪽에 세 개, 조금 방향을 바꿔 중간에 한 개, 그리고 또 방향을 조금 바꿔 그 아래쪽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나무 한줄기에 여섯 개의 딱따구리 구멍이 뚫려 있는 나무는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저 나무는 딱따구리 아파트네, 6층짜리 딱따구리 아파트"

일행을 말을 듣고 보니 정말 6층짜리 아파트였습니다. 딱따구리가 부리로 쪼아 구멍을 뚫어 만든 6층짜리 아파트, 그런데 조금 이상하기도 했지요, 우거진 숲속엔 수많은 나무들이 있는데 왜 하필 한 그루의 나무에만 그렇게 많은 구멍을 뚫어 보금자리를 만들었을까요?

갈대 숲에 들어 '가을남자'가 된 일행 서상규씨
 갈대 숲에 들어 '가을남자'가 된 일행 서상규씨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조금 더 내려가자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왼쪽으로 향한 길과 그냥 아래쪽으로 뻗어 내린 길이었지요, 앞장 선 일행은 그냥 아래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자 골짜기에 흐르는 물이 수량도 더 많아지고 길가엔 꽃을 피운 갈대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사진 한 장 찍어줘?"
일행이 갑자기 갈대숲 앞에 섰습니다. 대동문 고개를 넘어 골짜기 길을 걸으며 친구는 어느새 가을을 느끼고 있었나 봅니다. 우거진 갈대꽃들이 친구를 가을남자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 지역이 북한산성 행궁터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조금 더 아래쪽은 옛 산영루라는 누각이 있던 곳이었고, 위쪽엔 작은 암자 아래 몇 개의 오래된 비석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습니다. 골짜기 새하얀 바위 위에는 초가을을 느끼러 나온 등산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가는 여름을 배웅하는 풍경이었지요.

길가의 집 지붕을 뒤덮은 빨간 고추와 절마당에 널어놓은 도토리도 가을 풍경

골짜기 길가에 세워져 있는 정자에 들어 잠깐 땀을 들이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길가에 음식점들이 많아졌습니다. 골짜기 이곳저곳에 만들어 놓은 손님맞이 자리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요.

그래도 골짜기엔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오른편에 불쑥 솟아오른 바위산에 내려쬐는 햇빛이 찬란하게 밝았습니다. 한 여름의 왠지 끈적끈적한 느낌의 햇볕이 아니라 건조하고 투명한 햇빛이 분명 가을빛이었습니다.

절 마당에서 말리고 있는 도토리
 절 마당에서 말리고 있는 도토리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길가에 서있는 민가처럼 보이는 절 마당에 펴놓은 비닐자리 위에는 도토리가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이 골짜기 어디에선가 주워온 도토리들일 것입니다. 어느 집 마당에서도 더 많은 도토리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도토리는 청설모와 다람쥐들의 겨울 양식인데 사람들이 모두 주워 말리는 모습이 썩 좋아보이진 않습니다.

"어! 저 집 좀 봐? 지붕이 온통 빨간색이네, 저거 고추를 지붕 위에 널어 말리는 것 아녀?"

양쪽에 음식점들이 둘러서있는 제법 넓은 공터 바깥쪽 개울가에 있는 집이었습니다. 작고 아담한 집 지붕이 온통 새빨갰습니다. 마당에도 넓은 자리를 펴놓고 고추를 말리고 있었는데 지붕 위까지 온통 새빨간 모습이 장관이었습니다.

"이제 가을은 가을인가벼, 그런데 가을색이 온통 새빨간 고추로 물들었구먼, 그래서 가을맞이 하러 북한산을 넘자고 했구먼?"

북한산 골짜기에 찾아든 가을은 온통 밝고, 맑고, 그리고 새빨간 색이었습니다. 맑고 투명한 하늘을 이고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는 등산객들의 옷 색깔도 표정도 투명하고 밝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북한산 골짜기, #가을맞이, #대동문, #이승철, #새빨간 고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이 기자의 최신기사100白, BACK, #100에 담긴 의미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