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비릉에 방문하였을 때 유적지 팻말 중 가까운 곳에 구산동고분군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사실 애초에 답사 기획안을 짤 때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막상 답사를 와서 보니 거리도 가깝기 때문에 가볼까란 고민을 하였다. 차후에도 이런 식으로 근거리에 있는 유적지를 방문해서 살펴보기로 한 후, 간단하게 길을 물어보기로 하였다. 일단 수로왕비릉의 입구 쪽에 있는 안내원에게 가서 구산동고분군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아. 그렇게 멀진 않아요. 저쪽 골목으로 쭈욱 올라가시면 됩니다."라는 간단한 설명과 가까우니 부담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그 설명에 따라 천천히 구산동고분군을 향해 나아갔다. 마침 내비게이션에도 구산동고분군이 표시되어 어렵잖게 찾아 갈 수 있었다.
구산동고분군은 자그마한 언덕에 있었다. 작은 놀이터 옆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가파른 계단이었다. 계단 위로 올라가자 전망이 탁 트이면서 공터가 보이는데, 바위들을 넘어 고분처럼 보이는 봉분과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바로 구산동고분군이었다.
그런데 애초의 표지판에는 '구산동고분군'이라 적혀져 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김해 구산동 백운대 고분'이라는 조금 다른 이름으로 적혀 있었다. 애초에 고분 뒤에 '군(群)'이 붙으면 여러 개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 되는데, 정작 이곳에는 고분이 1기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나름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단순해 보이는 문화재 이름에 복잡한 사연이...
현재 김해 구산동고분군(龜山洞古墳群)은 사적 제 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총 4기의 고분으로 이뤄졌는데 크게 보면 고분군이 2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구산동의 고분군과 대성동의 고분군으로 나눠지는데, 우리가 온 곳은 이 중에서도 대성동에 있는 고분, 즉 백운대 고분이었다. 둘은 300여m가 떨어져있기에 사실 같은 고분군으로 묶기엔 약간 어중간한 면도 있다.
구산동의 고분군은 수로왕비릉 뒤편에 있으며 2기가 있는데, 그 중 1기는 일제 강점기인 1919년에 학술적인 발굴을 거쳤고 당시 사적 제 109호 삼산리고분(三山里古墳)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광복 후 1963년에 다시 사적 75호로 개정되고 명칭 또한 구산동고분군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성동에 있는 고분, 즉 백운대 고분은 그 때도 도굴된 무덤 1기가 있다고 보고되었는데 근처에 이와 비슷한 유구가 더 있으리라 생각되어 구릉지 일대 약 3000평을 추가로 사적 제 75호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1997년 3월 부경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시굴조사가 이뤄졌고, 애초에 보고된 백운대 고분 외에 별다른 유구가 없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23일부터 7월 30일까지 발굴조사를 하게 되어 이 고분의 성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앞선 예상과는 달리 별다른 유적이 더 이상 조사되지 않아 사적에서 해제되게 되었다. 대신 경상남도 기념물 223호로 지정되었다.
즉 수로왕비릉의 뒤쪽에 있는 2기의 고분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었었지만 둘이 약간의 거리차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따로 있는 무덤처럼 느껴진다. 백운대 고분은 말 그대로 백운대라고 하는 구릉에 단독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김해 구산동 백운대 고분'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행정구역상으로는 대성동에 있기에 명칭의 비애가 참 얄궂게 느껴진다. 하긴 안동 신세동칠층전탑도 알고 보면 법흥동에 있는데도 애초 문화재 기재의 오류 때문에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지 않던가?
도굴된 고분, 하지만 다행히 남아 있는 건 남아있더라
김해지역에서 구산동고분군, 즉 백운대고분은 좀 독특한 존재이다. 바로 봉토분, 즉 흙으로 봉분을 쌓아 올린 무덤이기 때문이다. 이게 뭐가 특별하냐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지만 금관가야시대의 다수 무덤들은 봉토분이라기보다도 목관묘나 목곽묘, 즉 나무널을 써서 무덤을 만든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따로 흙을 쌓는, 즉 봉분을 쓰지 않는다. 가락국 왕실의 무덤이라 추측되는 대성동고분군이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가야시대 무덤의 변천과정을 본다면 구산동고분군의 무덤형식은 대성동고분군의 그것에 비하여 좀 더 시대가 떨어진다. 그 시기를 주로 6세기 말엽으로 잡는데, 금관가야의 멸망이 532년, 즉 6세기 초라는 점에서 이미 금관가야시대가 아닌 신라시대의 무덤인 셈이다. 무덤은 발굴 이전부터 도굴되어 그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 때문에 유구가 부분적으로 노출된 상황이었다.
이 백운대고분의 구조를 고고학에서는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 즉 굴식돌방무덤이라고 부른다. 횡혈식석실묘란 돌을 쌓아 방처럼 만들어 놓고 통로를 만들어 시신을 넣을 수 있게 한 무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반 대에 이르러 주로 보이고 또 널리 유행하게 된다.
이 백운대고분은 횡혈식석실묘 주위에 호석을 둘러 무덤의 구역을 표시하였다. 이때 호석을 2줄로 둘렀는데, 안쪽의 호석은 주석실과 부장석곽 1기를 감싸고 있으며, 바깥쪽의 호석은 부장석곽 1기를 감싸고 있다.
부장석곽이라는 것은 피장자, 즉 무덤의 주인이 쓰던 물건들이나 저승에서 사용할 물건들을 따로 보관하는 유구이다. 이러한 물건들을 흔히 부장품, 혹은 껴묻거리라고 하는데 가야에서는 이렇게 무덤 외에 따로 보관을 하는 부곽을 만들어 놓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도 부장석곽이라는 존재는 이 백운대 고분이 대표적이다.
유물들은 총 58점이 발견되어 도굴된 고분 치고는 많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주종을 이루는 것은 역시 토기로서 총 44점이 발견되었다. 토기들의 양식을 따져 보았을 때 6세기 후기나 말엽 정도의 유물로 보인다. 또한 무기나 농공구가 포함된 철기가 11점, 금동제 장신구가 3점이 발견되었다.
가야 고도를 신라 무덤이 바라보는 이유는?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고분의 주인은 신라인이다. 하지만 완전한 신라인이라고 보기엔 가야적인 색채가 더러 남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무덤의 주인을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으로, 그리고 신라의 신하로서 당시의 김해를 다스린 사람이라고 보기도 한다.
금관가야는 대가야와는 달리 신라에게 항복함으로써 나라를 바쳤다. 그래서 금관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의 귀족으로 인정되었으며, 또한 신라의 정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무력이나 김서현, 김유신과 같은 인물이다. 최근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에서 김서현과 김유신이 등장하는데,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뻘 되는 인물이다.
이 백운대고분의 주인 또한 김무력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추측된다. 김무력은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신라 정계에 진출하여 관산성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그 입지를 다졌지만, 이 무덤의 주인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그랬듯이 김해의 땅을 다스리면서 살았으리라.
백운대고분의 입지는 그야말로 김해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이다. 등 뒤로는 가야시대의 산성으로 알려진 분산성이 있으며 가까이에 수로왕비릉과 구지봉이 있다. 그리고 대성동고분군이나 수로왕릉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추측컨대 사후에 자신이 다스리던 가야의 땅을 죽어서까지 내내 보고 싶었기에 일부러 백운대에 무덤을 써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단독분, 즉 홀로 있는 무덤은 그에 대한 세력이 별로 없거나 아니면 피장자의 요청에 의하여 일부러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무덤 또한 후자의 경우로 생각하여 죽어서도 가야의 땅을 바라보고, 또한 가야를 위해 살던 자신을 위안하고자 이곳에 무덤을 쓴 게 아닐까? 젊은 날 이 백운대에 올라 가야를 바라보던 망자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덧붙이는 글 | 구산동고분군 중 주로 백운대고분을 답사한 내용을 써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