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경긴 줄 알았더니...

'아! 뭐야! 벌써 했잖아!'

페루축구협회에서 다운 받은 리그일정에는 분명 4월 26일 일요일로 예정된 리마 연고의 페루 명문 구단 우니베르시타리오(Universitario)와 CNI의 경기가 이미 24일 금요일에 치러졌던 것이다. 내가 도착한 날짜는 25일 토요일 오후.

마추피추를 방문한 그 감동이 가시기도 전에 쿠스코에서 페루의 수도, 이 곳 리마로 서둘러 이동해 왔건만 경기시각을 확인하기 위해 방문한 우니베르시타리오의 홈페이지에는 내가 원했던 경기시각이 아닌 경기결과가 떡 하니 게시되어 있었다. 바뀐 일정을 확인했더라도 보기 힘든 경기였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우니베르시타리오와 함께 페루의 양대 명문으로 꼽히는 또 다른 리마 연고의 클럽 알리안자 리마(Alianza Lima)의 일정을 확인하니 이번 주는 원정경기를 치르는 주말이었다. (두 팀의 통산 리그 우승 횟수 합이 전체의 50%를 넘는다.)

약간의 허탈함과 동시에 왠지 모를 해방감 같은 것도 든다. 마치 어린 시절, 내일까지 해야 될 숙제를 안 해도 된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 그런 기분.

'내일은 그냥 리마 시내 구경이나 실컷 해야겠다.'

여행 가이드북 리마 페이지를 몇 장 넘겨보다 역시나 다른 도시들과 비슷한 시내 구조에 비슷한 볼거리임을 확인하고 책을 덮고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잠을 청했다.

남미 여행 한 달째, 하지만 여전히 헤매는 나

다음 날.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서둘러 세면과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늘 할 일을 메모한다. '배낭 한 가득 쌓인 빨랫감부터 세탁소에 맡기고, 한국인 슈퍼마켓을 찾아가 라면도 몇 개 구입하고...' 그렇게 메모지 한 장 가득 할 것과 볼 곳 등으로 채우고 아침 9시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유난히 가벼운 발걸음, 그렇게 곧 장 숙소 근교의 리마 해안으로 향했다.

버스타고 15분 정도 거리라니 충분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긴다. 30분... 1시간...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여전히 난 도심의 한복판을 걸어가고 있었다. 빨랫감으로 가득 찬 가방으로 어깨는 슬슬 아파오고 그제서야 '이 길이 맞나?' 하며 스스로를 의심해 본다. 혹시나 해서 지나가던 행인에게 물어보니 역시나 난 반대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내가 싫어지는 그런 기분. 무슨 자신감일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길을 따라온 것은. 거기다 오늘은 일요일. 가톨릭 신자가 전체 인구의 90% 이상인 남미의 일요일은 예배를 드리러 가는 날이라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는다. 세탁소도, 심지어 한국인 슈퍼마켓까지도...

그렇게 아침부터 꼬여버린 일정에 무거운 가방까지 매고 오후 늦게까지 힘겹게 시내 구경을 마치고 숙소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과 가까워 마지막에 들르기로 한 페루 국립 경기장 '에스타디오 나시오날(Estadio Nacional)'로 향했다.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의 전경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의 전경 ⓒ 장호광


환한 하늘처럼 모두에게 열린 짙은 하늘빛 경기장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은 1952년 지어져 지금까지 페루에서 개최된 여러 국제대회와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 경기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45,000석 규모의 종합경기장이다.

보통의 회색빛 콘크리트 외관이 아닌 짙은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진 경기장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경기가 없는 일요일 늦은 오후의 경기장. 아무도 없는 조용한 그 곳을 생각했지만 막상 도착하니 경기장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경기장 주변에는 미니 축구장과 농구코트가 설치되어 있어 주말 오후 운동을 즐기러 온 여러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은 것이다. 거기다 자전거, 스케이드 보드 그리고 롤러스케이트 등의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들까지 더해져 경기장 주변은 활기찬 기운이 가득했다.

 경기장 옆에 자리한 미니축구장에서 축구를 즐기는 모습

경기장 옆에 자리한 미니축구장에서 축구를 즐기는 모습 ⓒ 장호광


10대 소녀부터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 아저씨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농구며 축구를 즐기는 모습이 일요일 오후의 여유로움과 너무도 어울렸다. 좀 더 다가가니 종합경기장이지만 경기장 내부의 한 켠에 실내체육관이 함께 설치되어 있어 그 곳에서 배구를 하는 여성들의 고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농구를 즐기는 소녀들

농구를 즐기는 소녀들 ⓒ 장호광


그리고 한 쪽에는 나이 어린 꼬마들이 한데 어울려 테니스 공 같은 자그마한 공을 차며 이리저리 뛰놀고 있었다. 아무 걱정 없이 방과 후, 어김없이 동네 친구들과 뛰놀던 내 어린 시절 그 때처럼 입가에 한가득 웃음을 머금고 뛰노는 페루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니 새삼 '우리나라의 어린이들도 이렇게 맘껏 뛰어 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맘껏 뛰놀던 페루 아이들의 모습

맘껏 뛰놀던 페루 아이들의 모습 ⓒ 장호광


 전통과 역사가 함께 숨쉬는 국립경기장

보통의 경기장들이 경기장 관리 차원에서 경기가 없는 날은 굳게 철문을 걸어 잠그고 일반인들의 접근조차 금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게 경기장 바로 옆에 이러한 체육 시설을 설치해 대중에 개방하는 모습이 '국립경기장'이라는 이름답게 공익성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경기장 한켠에 자리한 태권도장

경기장 한켠에 자리한 태권도장 ⓒ 장호광


여기저기서 한창 진행 중인 축구시합도 지켜보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니 경기장의 외벽에는 칸칸이 월계수로 장식된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는 역대 페루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이름으로 그 모습이 화려하진 않지만 당시 선수들의 굵은 땀방울이 경기장에 스며든 듯한 느낌으로 경기장을 수놓고 있었다.  

 경기장 외벽에 장식된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이름들

경기장 외벽에 장식된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이름들 ⓒ 장호광


도심에 자리한 경기장의 지리적 요인도 있겠지만 주말 오후 많은 이들이 찾아와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경기장은 우리나라의 그것보다 더욱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우리의 경기장도 좀 더 대중에 개방되어 다양한 방향으로 활용 될 수 있는 진정한 공공시설로 자리하길 바라며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리마 국립경기장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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