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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 수도 청두(成都)의 톈푸(天府)광장에 있는 마오쩌둥(毛澤東) 동상 앞에서 벌어지는 분수공연을 바라보는 캄 출신의 티베트인 가족. 올해로 티베트가 중국의 완전한 지배를 받은 지 50주년이 되었다.
 쓰촨성 수도 청두(成都)의 톈푸(天府)광장에 있는 마오쩌둥(毛澤東) 동상 앞에서 벌어지는 분수공연을 바라보는 캄 출신의 티베트인 가족. 올해로 티베트가 중국의 완전한 지배를 받은 지 50주년이 되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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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3월 10일 티베트의 수도 라싸(拉薩). 달라이 라마 14세가 중국군 사령관의 초대로 창극 관람을 위해 군영에 불러간다는 소식이 퍼졌다. 2000여 명의 티베트인들은 노부링카궁 주변에 몰려들어 달라이 라마가 공연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중국이 공연을 핑계로 달라이 라마를 베이징으로 납치해 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1950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 이후 티베트 동부 캄과 암도에서는 영향력 있는 승려가 중국의 문화 공연에 초대됐다가 실종되는 일이 빈번했다. "한족을 몰아내자", "티베트 독립"을 외치던 시위대는 중국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맞서 무장 투쟁에 나섰다.

크고 작은 무장 충돌이 이어지자, 달라이 라마는 결단을 내렸다. 양자 간의 참극을 막기 위해 망명을 결정한 것이었다. 3월 17일 밤 달라이 라마는 80여 명의 호위단을 이끌고 몰래 노부링카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자신이 거주하던 포탈라궁과 사랑하는 티베트인들을 뒤로 한 채 인도로 향했다.

티베트를 등진 사람은 달라이 라마 뿐만이 아니었다.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 이후 수개월 사이 8만 명의 티베트인들도 히말라야산맥을 넘었다. 3월 28일 중국정부는 형식적이나마 존재했던 티베트정부를 해체하고, 시짱(西藏)자치구를 설립했다.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인들은 4월 29일 인도 북부 무수리에 티베트망명정부(정식 명칭 '티베트중앙행정부')를 수립했다.

인도로 망명한 지 50년이 되는 달라이 라마 14세. 눈물을 머금고 조국을 떠나야 했던 20대 청년은 어느덧 고희를 훌쩍 넘긴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인도로 망명한 지 50년이 되는 달라이 라마 14세. 눈물을 머금고 조국을 떠나야 했던 20대 청년은 어느덧 고희를 훌쩍 넘긴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 뉴스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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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봉기 50주년... 장갑차와 저격수까지 배치된 '준계엄'의 티베트

3월 10일은 티베트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반세기 전 발생한 무장투쟁은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으로 이어졌고,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직접 통치로 결말났다. 티베트는 나라와 지도자를 잃었다. 중국은 티베트의 반란(?)을 평정하여 민주개혁을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3·1운동과 유사한 3·10 무장봉기는 티베트 현대사에서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50년이 지난 현재, 티베트에는 폭풍 전야와 같은 긴장의 나날이 지속되고 있다. 라싸를 비롯해 칭하이(靑海)성, 간쑤(甘肅)성, 쓰촨(四川)성 등의 티베트인 거주 지역은 외국인과 외지인 출입이 전면 봉쇄됐다. 중국정부는 주요 도시에 장갑차와 저격수까지 동원한 채 무장병력을 배치했다.

중국이 티베트인 거주지를 원천봉쇄한 이유는 과거에도 3·10 무장봉기 기념일을 전후해 독립시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1989년 3월 5일, 1만여 명의 티베트인들은 라싸 인민광장에서 티베트 국기인 설산사자(雪山獅子)기를 흔들며 독립시위를 벌였다. 티베트인들은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거세게 저항했지만, 기관총과 화염방사기까지 난사하는 중국군에 의해 진압 당했다. 적어도 250여 명이 사망한 당시 독립시위를 진압한 주역이 바로 현 중국 국가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였다.

지난해 3월 14일에도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독립시위는 라싸 뿐 아니라 티베트인 거주지 전역에서 벌어졌다.

중국정부는 1959년에 티베트의 봉건적 농노제를 종식시키고 민주개혁을 시작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1959년에 티베트의 봉건적 농노제를 종식시키고 민주개혁을 시작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 중국신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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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다져진 티베트 독립정신

시짱자치구로 불리는 티베트 본토는 면적 122만㎢, 인구 277만 명이다. 여기에 칭하이성과 간쑤성 남부로 찢겨나간 암도, 쓰촨성 서부와 윈난(雲南)성 서북부로 나누어진 캄을 더하면 면적 250만㎢, 인구 541만 명으로 늘어난다. 영토로만 따지면 중국 전체 면적의 1/5에 해당한다.

티베트는 평균 해발이 3000m 이상으로 드넓은 고산 초원과 산맥을 간직해 세계의 지붕으로 불린다. 높은 해발로 공기가 희박하지만, 버마·인도·부탄·네팔·파키스탄 등과 접해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풍부한 광물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이 침공하기 전 티베트는 자연친화적인 불교국가로 독자적인 사회체제와 문화예술을 발전시켜왔다.

원나라와 청나라 시기 티베트는 중국의 간접 지배를 받았었다. 특히 1720년 티베트에서 몽골 세력을 몰아내고 티베트 전역을 장악한 청조의 통제는 강력했다. 청조는 티베트 내 청군을 주둔시키고 주장대신(駐藏大臣)을 두어 티베트의 내정을 간섭했다.

1792년에는 금병추첨제도(주장대신이 달라이 라마의 전생자로 추정되는 아이의 이름과 생년을 금병 속에 있는 상아 편을 뽑아 후대 달라이 라마를 정하는 의식)를 도입했다. 캄은 쓰촨성 관할 하에 두어 직접 통치했고 참도(昌都) 서쪽 땅만 달라이 라마의 관할로 인정했다. 이렇듯 청조는 티베트를 포함하는 제국 체제를 완성시켰다. 18세기 청나라의 판도는 오늘날 중국정부와 중국인의 영토 인식 기준이 되고 있다.

19세기 중반까지 티베트는 정치적으로 청나라에 예속됐지만, 종교적으로는 무한한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청에 복속된 다른 소수민족 거주지와 달리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가 통치하는 정교일치체제가 유지됐다. 티베트인들도 자신을 청나라의 피정복민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청 황제를 '문수보살 대황제'라고 불렸지만, 티베트 불교를 수호하는 불교적 개념이 강했다.

서구 제국주의가 중국에 밀어닥친 19세기 말에는 티베트의 독립성이 더욱 강화됐다. 1888년과 1904년 티베트를 침략한 영국군에 맞서 항전을 벌인 것은 오직 티베트인들이었다. 티베트 주둔 청군은 영국의 침략을 방관했고, 주장대신은 티베트인의 항전을 막기까지 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 달라이 라마 13세와 티베트인들은 완전한 독립국을 향한 행보에 적극 나섰다. 1911년 신해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달라이 라마 13세는 주장대신을 비롯한 모든 한족과 중국군을 티베트에서 추방시켰다. 1912년에는 티베트군이 캄의 중심지인 리탕(理塘)을 함락하고, 캄과 암도 각지에서는 중국에 반대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1917년에는 티베트군이 중국군을 몰아내고 진사강(金沙江) 주변 지역과 참도를 점령했다. 1930년부터 1932년 동안에도 티베트군과 중국 군벌세력 간에 수차례에 걸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 시기 티베트는 중국의 행정권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독립국가였다. 1934년 중국 국민당 정부가 라싸에 몽장(蒙藏)위원회 티베트사무소를 설치했지만, 티베트의 독립적 지위를 훼손하지는 못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던 윈난(雲南)성 샹그릴라의 간덴 쑴첼링사(松贊林寺). 1980년대 말부터 꾸준히 벌어진 사원 복원 사업 덕분에 상처를 아물었지만 파괴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던 윈난(雲南)성 샹그릴라의 간덴 쑴첼링사(松贊林寺). 1980년대 말부터 꾸준히 벌어진 사원 복원 사업 덕분에 상처를 아물었지만 파괴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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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부의 변심... 1950년, 티베트의 평화가 깨지다

독립국으로 입지를 굳혀가던 티베트의 평화가 깨진 것은 1950년이다.

1월 중국 사회주의정부는 티베트가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라며 티베트에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낼 것이라고 선언했다. 10월 4만 명의 중국군은 티베트에 대한 전면 침공을 개시했다. 티베트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수십 년간 전투로 단련된 인민해방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참도 전투에서만 티베트군 5700명이 죽고 2000여 명이 투항했다.

결국 티베트정부는 무력 대결을 포기하고 1951년 5월 중국정부와 '티베트의 평화 해방에 관한 협의 17조'를 체결했다. '17조'는 티베트를 독립국가가 아닌 민족자치를 시행하는 중국의 한 지방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중국정부도 '티베트 고유의 정치사회제도를 강제로 바꾸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티베트에 '특별한 지위'를 인정한다는 중국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중국은 티베트를 쪼개서 암도와 캄을 중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1954년에는 티베트에 대한 경영을 공고화하기 위해 촨짱(川藏)공로와 칭짱(靑藏)공로를 개통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강압적인 토지개혁과 식량징발을 추진했다.

중국정부에 비협조적인 승려에 대한 강제 환속과 사찰 파괴까지 자행했다. 중국의 속박과 탄압이 이어지자, 1957년부터 캄에서는 크고 작은 게릴라 투쟁이 발생했다. 1959년 3·10 봉기 이전까지 티베트 전역에서는 8만여 명의 민병대가 조직되어 중국에 대항했다. 3·10 봉기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중국의 야만적 지배에 대한 분노의 항쟁이었다.

1959년을 기점으로 달라이 라마를 지도자로 하는 티베트는 존재하지 않게 됐다. 직접 통치로 전환한 중국의 티베트 경영은 가혹했다. 게릴라와 시위자에 대한 처형, 게릴라 근거지로 낙인찍은 티베트 사원의 파괴, 티베트인에 대한 노동봉사와 사상개조의 실시 등 티베트를 폭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1965년부터 티베트에서 실시된 인민공사화 사업은 농민과 유목민을 기아에 빠지게 해,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남아있던 티베트 문화의 명맥까지 앗아갔다. 그해 8월 조캉사원(大昭寺)에 난입한 홍위병은 파괴의 극한을 보여주었다. 티베트 본토에 있던 6259개 불교사원 중 네댓 개만 남긴 채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중국은 티베트인의 종교 활동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문화생활까지 전면 금지시켰다. 1951년부터 1978년까지 죽어간 티베트인은 적어도 100만 명이 넘는다.

1980년 중국은 티베트인에게 종교 활동을 다시 허용했지만 억압과 탄압의 고삐는 늦추지 않고 있다. 티베트 사원의 정원은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라마승에게는 사회주의와 중국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사상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한족의 티베트 이주도 꾸준히 추진돼 암도와 캄에서는 한족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티베트 수도인 라싸에서조차 한족의 인구 비율은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 2006년 7월 개통한 칭짱철도는 한족의 티베트 본토 이주를 더욱 가속화하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2일 중국정부는 <티베트 민주개혁 50년>이라는 백서를 통해, "티베트 봉기 진압 후 티베트에 번영을 가져왔고 100만여 명의 농노를 해방시켜 사상 최고의 발전 시기를 구현했다"고 주장했다. 백서에는 중국이 저지른 파괴와 약탈은 단 한 줄도 없었다.

모든 티베트 불교 최대 종파 겔룩파(Gelukpa) 사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총카파(宗喀巴) 상과 1989년 입적한 판첸 라마 10세 사진.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티베트인에게 해와 달 같은 존재다.
 모든 티베트 불교 최대 종파 겔룩파(Gelukpa) 사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총카파(宗喀巴) 상과 1989년 입적한 판첸 라마 10세 사진.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티베트인에게 해와 달 같은 존재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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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로 간 달라이 라마, 불투명한 '망명정부'

1959년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 14세는 8만 명의 티베트인과 함께 다람살라에 '작은 라싸'를 건설했다. 50년이 지난 현재 인도에만 10만여 명의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고 네팔과 부탄에도 3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독립군 티베트 정부의 연장선상에서 티베트 본토 복귀를 목표로 하고 있다. 망명정부는 달라이 라마를 국가원수로 하여, 사법기관인 망명 티베트 최고사법위원회와 입법기관인 망명 티베트 대표자의회, 행정기관인 카샥으로 나뉘어 있다.

과거 티베트 사회가 철저한 계급사회로 봉건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점을 반성해, 망명정부는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다. 인도에서 태어난 티베트인 2,3세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언어, 역사, 문화, 종교 등 티베트 전통문화 보존에도 힘쓰고 있다.

다람살라에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티베트 커뮤니티와 전통문화는 중국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금도 본토의 티베트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달라이 라마를 찾아 히말라야산맥을 넘고 있다. 중국이 통치하는 티베트에서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지지 않자, 위험을 무릅쓰고 어린 자식을 다람살라로 보낸 부모도 적지 않다.

기자가 윈난성에서 만난 롱부치린(37)도 17살 때 부모의 권유로 인도로 갔다. 롱부치린은 "델리에서 대학을 마친 뒤 8년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역사를 공부하면서 봉사활동을 했다"면서 "다람살라에는 중국에서 넘어와서 공부하는 본토 출신 티베트인을 위한 학교가 수십 곳에 달한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중국으로 되돌아 와 티베트 청소년에게 티베트식 전통교육을 보급하는 데 힘쓰고 있다.

다람살라가 티베트 전통문화의 메카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앞날은 그리 밝지 않다. 인도와 중국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대하는 인도정부의 태도가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1월 6일 뉴델리에서 열린 인도 안보회의에서 다람살라가 속한 히마찰프라데시주의 두마러 주지사는 "망명 티베트인들이 사회적 불안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일부 망명 티베트인들이 집이 없어 거주지가 일정하지 않고 생계수단도 확실하지 않아 치안과 사회 관리에서 두통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 실제로 2만여 명의 망명 티베트인들은 다람살라 일대에서 행상, 구걸 등으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인도 사회 일각에서는 티베트 망명정부와 티베트인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새해 기원법회 기간인 몬람을 맞아 칭하이성의 쿰붐 사원(塔爾寺)을 찾은 티베트인들. 문혁 기간 중 티베트들은 기초적인 종교활동과 문화생활조차 박탈당해야만 했다.
 새해 기원법회 기간인 몬람을 맞아 칭하이성의 쿰붐 사원(塔爾寺)을 찾은 티베트인들. 문혁 기간 중 티베트들은 기초적인 종교활동과 문화생활조차 박탈당해야만 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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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봄은 다시 올 수 있을까

달라이 라마도 점점 입지가 좁아지는 국제 정세 속에 고심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1979년 독립노선을 포기한 뒤 중국정부와 협상하면서 고도의 자치권을 요구하고 있다. 즉 시짱자치구에 과거 티베트 영토였던 암도와 캄을 묶어 자치구를 설정해 달라는 것이다. 작년 3월에 일어난 유혈사태 속에서도 티베트 대표자의회는 11월 긴급회의에서 70%의 찬성으로 달라이 라마의 자치 및 비폭력 노선을 지지했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유화노선에도 중국정부는 강경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에게 티베트 독립을 포기해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베이징에 거주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지목한 치에키 니마를 억류하고 기알첸 노르부를 판첸 라마 11세로 내세운 것처럼 차기 달라이 라마를 직접 지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늘어가는 한족 이주로 빈부격차와 민족갈등이 증폭되는 티베트 본토,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강경파의 압박 속에 비폭력 투쟁과 자치노선을 견지하는 티베트 망명정부, 막강한 중국의 경제력에 입 다문 국제사회, 달라이 라마의 사후를 노리며 시간만 끄는 중국정부. 암울한 현실 속에 티베트의 긴장을 거둬갈 봄은 언제쯤 올 것인가.

주인 잃은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 달라이 라마는 하루빨리 자신의 궁전으로 되돌아 갈 날을 고대하고 있다.
 주인 잃은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 달라이 라마는 하루빨리 자신의 궁전으로 되돌아 갈 날을 고대하고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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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티베트, #3.10 봉기 50주년, #달라이 라마, #중국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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