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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복날의 손수레 13

 

"어서 오세요."

그 여자는 선호와 정민을 발견하고는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쩜, 순대가 너무 맛있어 보이네요."

정인이 덕담을 건넸다.

 

"들어가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20평쯤 되어 보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그런데 빈 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손님이 가득 차 있었다.

 

"올라갈까?"

 

두 사람이 앉은뱅이 자리로 올라가 앉자, 예쁘장한 20대 여자가 물병과 물컵 두 개를 상 위에 가져다 놓고는 물었다.

 

"뭐 드려요?"

"감자탕 주세요."

"2인분 드려요."

"예."

 

메뉴표를 보니 감자탕 값이 1인분에 4000원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그리고 괄호 안에 '2인분 이상 드세요'라고 씌어져 있었다.

 

"2인분 이상 먹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참 싸네요."

"그렇지? 다른 감자탕 집에선 작은 거 하나 시키면 적어도 1만 5000원은 줘야 먹을 수 있지."

 

잠시 후에 감자탕이 나왔는데, 살이 듬뿍 붙은 뼈와 감자가 가득했고, 그 위엔 콩나물과 쑥갓이 듬뿍 얹어져 있었다. 젊은 여자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올려놓고서 말했다.

 

"맛있게 드세요."

"예. 내가 감자바위 사람인데, 감자가 많으니까 참 좋네요."

 

선호가 그렇게 덕담을 했다. 두 사람은 펄펄 끓는 큰 냄비 안으로 국자를 분주하게 움직이며 맛있게 먹었다. 청주를 곁들여 마셨다. 건더기가 없이 국물만 남았을 때는 볶음밥까지 추가로 시켜 먹었다. 그렇게 배를 불린 두 사람은, 다소 어둑해진 시장통을 빠져나가 선호가 사는 빌라로 올라갔다.

 

선호는 정인에게 커피를 한 잔 타주었다. 그런데 정인은 뜻밖에도, 커피를 마시며 한 가지 사정을 털어놓았다.

 

"선호씨, 200만 빌릴 수 없어요?"

 

정인은 신용카드 빚이 늘어나 그것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고 있다고 했다. 사실은 친구가 화장품 가게를 낸다고 해서 현금서비스를 받아 빌려준 건데, 친구가 자기를 속이고 달아났다고 했다. 그래서 부모님한테 들킬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선호는 여유 있게 가진 돈이 10만원도 없었다. 사자마자 값이 떨이지는 집을 사는 데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인중개사 말로는 면제된다고 했던 취득세 때문에 애를 먹었다. 구청 담당부서에서는 선호가 첫 입주자가 아니기 때문에 면제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첫 입주자이지만,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지으려는 세대의 인원수를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에 건물주와 가까운 지인(知人)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류상 두 번째 입주자로 처리되기 때문에 취득세를 3개월로 분할해서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한두 푼이 아쉬운 처지에서 정인을 도와줄 200만원이라는 돈이 생겨날 턱이 없었다.

 

선호와 동암역 앞에서 생맥주를 마시다 그날 밤늦게 서울로 돌아간 정인은, "전철은 동대문에서 끊어졌는데, 선호씨가 준 차비로 택시를 타고 안암동까지 잘 돌아왔다"는 마지막 전화를 남긴 채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때는 휴대폰이 아주 비싼 시절이라 정인은 호출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호출기에 전화번호를 입력해 놓아도 도무지 연락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따금은 둥글고 밝게, 이따금은 가늘고 처량하게 먼 하늘에 떠올라 있는 달을 바라보며 선호는 생각했다. 달은 어떤 모습이건 매일같이 사라졌다가도 매일 또 돌아오지만, 정인은 그날 이후로 목소리조차 7년 넘도록 보내오지 않았다. 사람이란 그런 것인가. 전기가 끊어지지 않는 한은 가로등마저 사라졌다가도 매일같이 때가 되면 돌아오건만, 사람이란 그렇지 않은 것인가.

 

'200만원 못해준 게 그렇게 섭섭했나 보군.'

 

그런 한편으론, 명문 S대 경제학과 교수라고 자칭하는 누군가가 자꾸 자기에게 프러포즈를 한다고 했는데, 아마 그 사람한테서 금전의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선호는 생각했었다.

 

그렇게 헤어지게 된 정인을 떠올리던 선호는, 생각이 현실로 돌아오자 현관 바로 안쪽에 쌓아둔 신문더미와 책더미를 문 밖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자꾸 누군가가 자기를 엿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무 꾸러미쯤 문 밖에 모두 쌓아놓은 다음에, 이번엔 양 손에 신문이며 책 꾸러미를 들고 4층 계단을 힘겹게 내려가 리어카에다 실었다. 다시 올라가려는데, 누군가가 계단에서 신문 꾸러미를 들고 내려오고 있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2004년 말에 초고를 써놓고 PC 안에 묻어두었던 소설입니다만,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그 시절의 세상 이야기와 최근의 달라진 세상 모습을 고려하여 많은 부분 보충하고 개작해 가며 연재한 뒤에 출간하려고 합니다. 선호의 눈을 통해, 가난하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질 것입니다. 이 소설은 실화 자체가 아니라, 소중한 우리 삶의 여러 실화를 모델로 한 서사성 있는 창작입니다.


태그:#모래마을, #모래내고개, #모래내시장, #구월시장, #취득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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