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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카메라로는 7형제봉을 잡을 수 없다

 

 

청법대에서 신선대를 향해 걷다 보면 왼쪽으로 우리가 올라온 장암리 시어동이 내려다보인다. 그 너머로 화양천이 이룬 들판이 남북으로 이어지고 그 뒤로 청화산이 우뚝 솟아 있다. 청화산은 지난 가을에 지나온 바 있다. 오른쪽으로는 법주사에서 주능선으로 이어지는 골짜기가 펼쳐진다.

 

청법대에서 신선대까지는 앞으로 보는 경치보다 뒤로 돌아보는 경치가 더 멋있다. 그것은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앞쪽 능선은 바위가 적고 완만한 데 비해 관음봉까지 이어지는 뒤쪽 능선은 암봉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암봉 중 백미는 가까이 있는 청법대이다. 청법대 오른쪽으로 보이는 3형제봉은 가까이 있어서인지 바위의 균열까지도 선명히 보인다.

 

 

발길을 재촉하며 신선대를 향하다 또 다시 돌아보니 전망이 더욱 넓어져 청법대 오른쪽으로 7형제봉이 나타난다. 그런데 좌우 폭이 넓어 내 카메라로는 그 경치를 다 잡을 수가 없다. 청법대 왼쪽으로는 문장대를 지나 관음봉까지 올망졸망 암봉들이 이어진다. 아직 2월인지라 나뭇잎들은 회갈색이다. 그러나 흰색의 상고대가 아직 남아있어 그 대비가 괜찮은 편이다. 

 

신선대 휴게소에서 쉬어가기

 

신선대에 도착하니 10시 40분쯤 되었다. 이곳에는 속리산을 찾는 산꾼들이 쉬어가는 휴게소가 있다. 신선대 주점으로도 불리는 이곳을 산꾼들은 그냥 지나치지를 못한다. 부자가 휴게소를 운영하는데 오늘은 아들이 근무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유명한 음식이 당귀막걸리이다.

 

 

이 화백이 이곳에 와서 그냥 갈 수 없다며 젊은 주인에게 당귀막걸리를 시킨다. 그러면서 주인에게 이런 저런 말을 시킨다. 이 집 주소는 어떻게 되며, 세금은 어떻게 내는 건지 등. 젊은 주인은 이곳의 주소는 보은군이고 생활권도 보은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세금은 상주에 낸다고 말한다. 아마 술을 화북에서 떼어 오기 때문인 것 같다.

 

화북면은 행정구역상 상주시에 속하지만 물길이 대부분 한강 수계이기 때문에 생활권이 보은군과 괴산군에 속한다. 특히 밤재의 서쪽인 중벌리와 운흥리, 눌재의 북쪽 입석리는 말까지도 충청도이다. 현재 행정구역을 개편한다고 하는데 이번 기회에 물길과 산길 같은 세부적인 부분까지도 고려했으면 좋겠다.

 

 

주문 후 바로 막걸리와 어묵이 나온다. 당귀막걸리는 보통 막걸리에 당귀를 넣어 가공한 것으로 약간 단듯하면서도 한약 냄새가 난다. 먹기는 괜찮은 편이다. 시원한 막걸리에 뜨끈한 어묵 국물이 잘 어울린다. 모두 한 잔씩 하고 밖으로 나온다. 밖에는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이곳 속리산을 여러 번 찾은 연제환 선생이 그 개가 열다섯 살은 될 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주 노인네 개다. 개의 수명이 15년, 길어야 20년이기 때문이다. 15년 동안이나 주인을 따라 이곳 신선대를 오르내린 저 개는 말 그대로 속리산의 산 증인이다. 이제는 개에게 보살 칭호라도 하나 붙여주어야겠다. 신선보살 정도면 어떨까? 

 

입석대

 

 

신선대에서 입석대로 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하다. 그리고 길 양쪽으로 조릿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대나무도 키가 큰 것은 남부지방에서만 자라지만 키가 작은 조릿대는 중부지방에서도 잘 자란다. 조릿대 위로 교목들이 있는데 이 나무들은 아직도 하얀 상고대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런데 기온이 올라가면서 그 상고대들이 후두둑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 바람에 길이 하얗게 변한다. 시각적 청각적으로 느낌이 참 좋다.

 

조금 있다 경업대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쪽 아래로 400m를 가면 경업대가 나온다. 경업대는 임경업 장군이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무예를 익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임경업은 충주 사람으로 속리산 경업대에서 독보대사로부터 무예를 배웠다고 한다. 경업대 바로 앞에 뜀금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뛰어넘으며 훈련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힘과 자신이 배운 무예의 완성을 증명하기 위해 큰 돌을 세우니 그것이 입석대라고 한다. 한 마디로 과장이고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다. 그러나 그러한 스토리텔링이 또한 우리를 즐겁게 한다. 요즘 문화와 관광을 이야기하면서 스토리텔링을 모르면 문외한 취급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만든 이야기꾼은 현대적 의미의 스토리텔러이다.

 

입석대에는 오를 수가 없다. 돌이 마치 비석처럼 수직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입석대를 제대로 보려면 경업대에서 올려다보거나 천왕봉 쪽으로 가다 뒤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입석대의 웅장한 모습을 입석대를 지난 주능선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은 눈높이에서 보아 그런지 그렇게 웅장하지는 않다. 오히려 이곳에서 바라보는 상고암 쪽 풍경이 시원하다.   

 

 

비로봉 넘기

 

 

비로봉은 상고암 뒤에 있는 암봉이다. 그러나 속리산 주능선 상에서는 비로봉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언제 넘었는지 모르게 비로봉을 지나가게 된다. 오히려 이들 바위틈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의 생명력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또 비로봉 건너편에 있는 바위들이 특이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승천하려고 애쓰는 용처럼 머리를 하늘로 향해 치켜들고 있다.

 

비로봉을 지나 조금 있다 상고석문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것을 천왕봉으로 가는 문이라 해서 천왕석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문을 지나자 옆 벽에 석이버섯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송이, 능이, 석이 하는 그 버섯이다. 석이버섯은 돌에 붙어 자라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함께 하던 윤석위 선생이 저거 따다 먹으려면 물에 불려 돌가루를 떼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습한 쪽 돌에는 솔이끼가 잔뜩 붙어 있다. 윤선생이 확대경을 갖다 대자 솔이끼 속에서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무슨 바다 속 풍경 같다. 윤선생은 아무리 작은 세계, 아무리 작은 생명체에도 우주가 들어있다고 말한다. 상당히 철학적이면서도 생물학적인 표현이다. 오늘 솔이끼에서 생명의 신비를 다시 한 번 느껴본다.

 

천왕봉 오르기

 

 

이제 천왕봉에 오르기 위해서는 주능선을 한 번 내려갔다 올라가야 한다. 지나온 능선을 돌아보니 암봉이 쭈삣쭈삣 솟아 있다. 앞으로 갈 천왕봉 쪽은 바위들이 보이지 않고 평탄한 오르막으로 되어 있다.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는 오르막 길 평평한 곳에서 식사를 한다. 보통 천왕봉 오르기 전에 있는 헬기장이 식당인데 이번에는 여기서 하자고 박연수 대장이 제안을 한다.

 

밥을 먹고 나서 우리는 마지막 힘을 내서 천왕봉으로 향한다. 사실 속리산은 정상이 1057m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산은 아니다. 특히 천왕봉은 오르내림이 없는 완만한 경사라서 끈기만 있으면 오를 수 있다. 잠시 후 우리는 헬기장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점심을 먹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누가 옆에서 천왕봉 가든이라고 우스개소리를 한다.

 

 

이곳은 또한 속리산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걸어온 길 뿐만 아니라 묘봉 상학봉에서 관음봉 문장대를 거쳐 청법대 입석대에 이르는 산줄기까지 보인다. 이곳에서 천왕봉까지는 10분 정도 거리다. 천왕봉은 삼각형 모양의 꼭지점으로 평범한 모습이다. 속리산의 정상으로는 아쉬운 감이 있다.

 

천왕봉 정상에 오르니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정상의 모습을 제대로 사진 찍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정상 표지석이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어 정상이라는 느낌도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에 서서 문장대 쪽을 바라보니 그 장쾌한 파노라마가 가히 일품이다. 안개가 끼어 아침에 비해 선명도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이 정도 전망도 보기가 쉽지는 않다. 산을 오르는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천왕봉이 맞는지 아니면 천황봉이 맞는지?

 

 

속리산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온다. 이곳에 보면 속리산의 옛 이름이 속리악(俗離岳)임을 알 수 있다. 속리악은 신라 때부터 사용된 이름이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뿐 아니라 문장대가 소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조선 초기만 해도 속리산 정상은 문장대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산마루에 문장대(文藏臺)가 있는데, 층이 쌓인 것이 천연으로 이루어져 높게 공중에 솟았고, 그 높이가 몇 길인지 알지 못한다. 그 넓이는 사람 3천 명이 앉을 만하고, 대(臺)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불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達川)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조선 중기로 오면서 속리산 천왕봉(天王峰)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습재집(習齋集)』에 보면, 권벽(權擘: 1520-1593)이 남쪽으로 중원 땅을 여행하다 속리산 천왕봉에 오른다. 그는 '속리산 정상 천왕봉에 바다 같은 구름이 첩첩산중 솟아오른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후 여러 사람이 쓴 시와 산문에서 속리산 천왕봉이 나온다.

 

이에 비해 속리산 천황봉(天皇峰)이라는 표현은 조선 후기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나타난다. '세전우복동도기변증설(世傳牛腹洞圖記辨證說)'에 보면 이규경은 우복동이 천황봉 근처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규경은 '우복동변증설', '용화동변증설', '우복동진가변증설'에서는 속리산 천왕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규경이 천왕봉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천황봉 정상 표지석의 철거이다. 표지석을 뽑아낸 사람들은 천황봉이라는 용어가 일제의 잔재이기 때문에 철거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의적 해석이다. 천황봉보다는 천왕봉이 과거의 역사 속에서 더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천왕봉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옳다. 이제 천왕봉의 정상석은 넘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조상들 다수가 쓰던 이름 천왕봉을 새긴 정상석을 다시 세우는 일만 남았다.   


태그:#신선대, #입석대, #천왕봉, #천황봉(?), #문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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