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과거 독재정권 시기, 낙태가 금지된 루마니아가 배경이다. 통제사회와 낙태, 여성문제를 섬뜩할 정도의 사실적 화면으로 강도 높게 비판한다. 60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과거 독재정권 시기, 낙태가 금지된 루마니아가 배경이다. 통제사회와 낙태, 여성문제를 섬뜩할 정도의 사실적 화면으로 강도 높게 비판한다. 60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 유레카 픽쳐스

루마니아의 1987년. 민중혁명이 일어나기까지 2년이 남았던 때다. 아직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라는 독재자가 지배하는 땅이었다.

 

어느 학교 기숙사에 사는 여대생 오틸리아는 갑작스레 여기저기 돈을 빌린다. 이것저것 짐을 챙겨들더니 걸음을 재촉하여 호텔을 예약한다. 꼭 오늘 밤에 방을 써야 한다고 애원하는데 사정이 참 급해 보인다. 어디로 전화를 걸어 짜증을 내는가 하면 베베라는 이름의 사나이를 만나 은밀한 이야기를 나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호텔방에는 오틸리아와 베베, 그리고 친구 가비타가 모였다. 여전히 영문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베베가 딱 한 마디를 꺼내자마자 모든 걸 이해하게 된다.

 

"낙태."

 

'낙태'라는 단어는 듣자마자 어쩐지 몹시 불편해지는 힘이 있다. 때문에 낙태를 주제로 하는 이야기 또한 불편한 것이 당연하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낙태에 관한 불편한 영화다.

 

가비타는 원치 않은 아기를 임신했고 오틸리아는 아기를 '지우는' 일을 도우려 하고 있다. 베베는 불법 임신중절 시술자다. 불법이다. 혁명 이전 루마니아에서 낙태는 불법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호텔방을 잡고 낙태를 모의하고 있는 것이다.

 

롱테이크와 다큐멘터리 기법을 구사하는 카메라가 묵묵히 오틸리아의 뒤를 밟으며 범죄 과정 전부를 담아낸다. 집요한 카메라워크에 어떠한 위로나 격정도 묻어나지 않는다. 그 객관성이란 섬뜩할 정도다. 베베가 전혀 의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도구를 꺼내들고 가비타의 몸을 물건 보듯이 훑을 때 카메라는 둘 모두를 화면에 담는다. 카메라는 낙태 당사자가 아닌 오틸리아의 눈을 따른다.

 

이 영화의 진가를 온전히 맛보기 위해서는 말하고 행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화면 곳곳에 숨은 당시 루마니아의 현실을 함께 읽어내야 한다. 차우셰스쿠 정권 아래 루마니아는 철두철미한 통제 사회였다. 오틸리아는 어디를 가더라도 신분증을 제시하고 돌려받기를 거듭해야 했다. 늦은 밤 길거리를 쏘다닐 때는 언제 어디서 비밀 경찰이 나타나 옷자락을 붙잡을지 몰라 공포에 떨어야 했다. 졸업한 학생의 직업과 생활은 정권의 명령에 따라 정해졌다.

 

 1987년 루마니아에서 암시장은 이미 일상적인 풍경이다. 이는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의 황당한 경제정책 때문에 생필품까지 품귀 현상을 빚었기 때문이다.

1987년 루마니아에서 암시장은 이미 일상적인 풍경이다. 이는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의 황당한 경제정책 때문에 생필품까지 품귀 현상을 빚었기 때문이다. ⓒ 유레카 픽쳐스

 

독재 정부가 국민의 일상 생활까지 통제하는 모습은 기숙사 암시장에서 잘 나타나 있다. 당시 루마니아의 경제는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때 차우셰스쿠가 경제위기의 해결책으로 내놓은 해답이란 참으로 황당한 것이었다. 루마니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공산품을 닥치는 대로 외국에 팔아버리라는 명령이었다. 때문에 국민들은 비누 같은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없어서 쩔쩔매는 진풍경이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오틸리아는 기숙사 암시장에서 담배와 사탕을 구매한다. 그러한 보편적 빈곤의 현실에서 여대생이 홀로 아기를 키운다는 일은 잔인한 농담에 가깝다.

 

오틸리아와 가비타와 같은 처지인 당시 여성계급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엄청나게 나빴다. 차우세스쿠 정권은 생명을 아주 세심하게 관리했다. 여성을 노동력 생산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루마니아의 급속한 공업화를 위해서는 많은 노동인구가 필요했고 여성은 노동자를 생산하는 일종의 도구가 되었다. 때문에 차우세스쿠는 낙태는 물론 피임까지 엄격하게 금지하는 인구정책을 행하였던 것이었다.

 

기계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자궁에서 태어나는 사람을 그리 다른 경우로 취급하지 않았다. 존엄성이 제거된 생명이니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능히 짐작이 간다. 베베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태아를 변기에 넣으면 막히니까 어디 건물 위에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라"고 말한다. 무심한 인구정책에 멍청한 경제정책이 합쳐지는 자리에 불법 낙태시술이 생긴다. 차우세스쿠는 낙태를 금지하는 동시에 낙태를 강요하는 사회를 만들었던 셈이다.

 

 우리 현실은 1987년의 루마니아에서 별로 진보하지 않았다. 낙태와 출산 사이의 잔혹한 선택은 여전히 여성 계급의 몫이다.

우리 현실은 1987년의 루마니아에서 별로 진보하지 않았다. 낙태와 출산 사이의 잔혹한 선택은 여전히 여성 계급의 몫이다. ⓒ 유레카 픽쳐스

오틸리아와 가비타가 낙태를 모의하는 이유는 아기의 생명을 쓰레기처럼 하찮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다. 루마니아는 여대생이 아기를 키울 수가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손발을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바닥에서 말라가는 태아의 시체를 보았을 때 오틸리아가 짓는 표정은 마치 가슴을 썰어내듯 참혹하다. 그래도 오틸리아와 가비타는 끝내 태아를 쓰레기통에 버릴 수밖에 없다. 차우세스쿠의 지독한 통제사회는 그렇게 어머니로 하여금 자식의 생명을 제 손으로 유기하게 했다.

 

영화 속 그때로부터 벌써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 과거 루마니아의 잔인한 역사를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가 무얼까? 우리네 세상이 거기서 별로 진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혼모는 세상의 온갖 멸시와 구박에 시달리는 한편,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 부닥친다. 사회가 소녀의 낙태와 출산을 보는 눈은 똑같이 냉랭하다. 거기서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 하는 끔찍한 딜레마는, 역시 거의 온전하게 여성의 몫이 되고야 만다.

 

영화를 보는 동안 오틸리아는 카메라를 단 한 번도 쳐다보는 법이 없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화면이 암전(暗轉)되기 바로 직전, 고개를 돌린 오틸리아의 눈과 카메라의 시선이 딱 마주친다. 피로와 울화에 잠긴 그 마지막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한다.

2009.02.20 10:30 ⓒ 2009 OhmyNews
4개월 3주 그리고 2일 크리스티안 문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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