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오른쪽이 양화당이다.
▲ 통명전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오른쪽이 양화당이다.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중궁전을 꿰차고 앉아 있는 후궁

통명전은 창경궁 내전 중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다. 성종 때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지었다. 하늘의 기를 받아 왕자를 생산하라는 경복궁 교태전처럼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통명전은 중전의 침전이다. 이러한 왕비의 생활공간에 원비 인열왕후가 죽고 중전이 없는 공백기를 틈타 후궁이 슬며시 들어앉아 있다.

전란으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어 마땅히 들어갈 곳이 없었다 해도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헌데 문제를 제기하는 중신이 하나도 없다. 병자호란의 책임을 지고 퇴출되었던 김류와 김자점이 되살아나 승승장구하고 있다. 모두가 소용 조씨 치맛바람의 위력이다.

환관 김언겸은 후궁 조씨가 심양 세자관에 밀파한 심복이었다. 세자 귀국과 함께 돌아온 김언겸을 조소용이 부른 것이다.

거품 낀 보고에 흡족해하는 조소용

“세자가 청국에서 가져온 물품이 무엇 무엇이더냐?”
“수천 필의 채단에 황금덩어리가 수십 개에 이릅니다.”

“틀림없으렷다?”
소용 조씨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네, 마마.”
개구리눈이 놀란 듯이 껌벅거렸다. 과장된 보고가 밝혀지면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걱정이 된 모양이다.

“또 무엇이 있더냐?”
“북경에서 서양 사람에게 받은 천주학 책과 요망한 물건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요망한 물건이라 했느냐?”
“네, 마마. 나무토막을 열십자로 묶어놓은 듯 한 물건이었습니다.”
“알았다.”

김언겸의 보고를 받은 소용 조씨가 엽전 꾸러미를 던져 주었다. 배고픈 강아지가 찬밥 한 덩이 받아먹듯이 소매 춤에 꾸러미를 넣은 김언겸이 후궁전을 빠져 나갔다. 이튿날, 조정에서 세자 귀국교서를 발표했다.

세자 귀국 환영행사는 없다

“세자가 돌아오니 우리 동국에 밝은 세상이 열렸다. 모든 사람이 경하할 일이니 조정과 만백성이 기쁨을 함께 하노라. 국운이 비색하여 강토가 산산 조각났으나 망한 나라를 보존하게 된 것은 오로지 상국(上國)의 은혜다. 앞서는 울었으나 뒤에는 웃으니 이는 천재일우의 시기이고 치욕과 허물을 깨끗이 씻었다. 지금부터 새로이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세자 귀국 환영은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인조는 대소신료들의 세자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궐 안팎이 웅성거렸다. 이에 사헌부에서 상소했다.

“세자가 영원히 돌아온 것은 전에 없던 나라의 경사이니 신민들의 기뻐하는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한번쯤 하례를 올리고 옥안을 우러러 보는 것은 마땅한 도리인데 갑자기 권정 하라는 명이 있어 조정의 모든 관원들이 실망합니다. 칙사가 들어와 있고 사세가 바빠서 그렇다면 하루쯤 물려서 거행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날짜를 물려서 거행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인조는 냉담했다. 신하들이 세자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햇수로 9년 만에 돌아온 세자다. 그것도 유람하고 돌아온 세자가 아니다. ‘되놈들’이라고 경멸하던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핍박을 받다가 돌아온 세자다. 볼모의 땅 심양에서 그래도 조선의 자존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던 세자다. 이러한 세자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인조는 세자와 신하들의 접촉을 허락하지 않았다.

같이 오고 싶지 않았는데 왜 같이 왔을까?

닷새 후, 최명길과 김상헌이 도성에 도착했다. 청나라에 끌려간 이유가 달랐고 시기가 달랐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도 각각 다를 줄 알았다. 그런데 가는 길은 달랐지만 오는 길은 같았다.

“왜 같이 오는가?”

심양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한성에 이르는 20일 남짓 노정에서 두 사람을 괴롭히는 질문이었다. 솔직히 두 사람은 같이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같이 왔다. 당대의 논객 최명길과 김상헌 두 사람은 같이 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동시대를 살았던 연(緣). 그것이라 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그것이 악연이던 필연이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두 사람의 입가에 허(虛)한 웃음이 흘렀다. 그 웃음 속에는 ‘척화와 주화로 생각이 달랐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지 않았을까? 라는 성찰이 녹아 있었다.

청나라가 최명길과 김상헌을 끌어갔지만 그것은 인간이 미워서 끌어간 것이 아니었다. ‘조선 길들이기’의 수단이었다. 그들에겐 척화와 주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사대부들을 겁주어 ‘조선 길들이기’의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제 그 유효기간이 지났다. 세자 귀국 허용과 마찬가지로 명나라 정복 후,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 귀국하게 된 것이다.

보고 싶지 않은 얼굴

최명길은 입궁하여 인조를 알현했다. 김상헌은 임금이 있는 창경궁을 지나쳐 곧바로 낙향하여 상소를 올렸다.

“고국에 돌아와 다시 대궐문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마른 버들에 꽃이 피고 썩은 뼈에 살이 오른 것 같은 성은입니다. 이 감격스러운 충정을 마음속에 새겨두었다가 저승에 가서 결초보은하려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태만히 한 죄를 아직도 씻지 못하여 대궐에 나아가 사례 드리지 못하고 한 자쯤 되는 상소장을 올리니 눈물만 흐릅니다.”

상소를 받아 든 인조는 심기가 불편했다.

“김상헌이 궁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궁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조와 김상헌은 임금과 신하다. 그러나 한 때는 동지였다. 광해군을 몰아낸 혁명초기에는 생각이 같았다. 하지만 청나라라는 커다란 바윗돌 앞에서 그들은 생각이 달랐다. ‘치워야 하느냐? 넘어야 하느냐?’ 생각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갈등이 증폭 된 것이다.

사신이 돌아가는 날. 인조는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에 나갔다. 청나라 칙사가 황제의 명으로 선유(宣諭)했다.

“부자가 서로 헤어져 있으면 반드시 그리워하는 정이 있으므로 세자를 내보낸데 이어 대군을 내보낼 것을 허락하노니 우리 두 나라의 무궁한 복을 갈고 닦도록 하라. 또한, 연소한 대관들이 전부터 이의를 제기하기 좋아하여 국사를 무너뜨렸는데 앞으로는 신중히 하여 이전의 폐단을 따르지 말라.”

어의를 무시하는 침의 이형익

경고를 남기고 칙사가 돌아갔다. 창경궁으로 돌아온 인조는 양화당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이 누웠다. 깜짝 놀란 소용 조씨가 이형익을 불러 침을 놓으라 명했다. 좌부승지 이행우가 이의를 제기했다.

“옥체에 침을 놓고 뜸질을 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이형익은 신과 협의 없이 입시하여 여러 의원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중완에 뜸질을 하고 있으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고 거리낌 없는 행동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엄중하게 추고하소서.”

중완(中脘)은 위를 다스리는 혈이다. 위의 유문부에 해당하는 혈로서 정통 의서에서는 뜸질을 금기시 하는 경락이다.

“내가 쾌하고 시원해서 하는 것을 왜 이리 말들이 많은가?”

인조는 한마디로 잘랐다. 침을 맞고 뜸을 들여 조금 회복된 인조 곁에 누운 소용 조씨가 속삭였다.


태그:#통명전, #어의, #침의, #창경궁, #양화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