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황현선생의 생가 광양 봉강면 서석마을에서 태어난 매천 황현선생의 생가를 영상에 담았습니다.
ⓒ 조도춘

관련영상보기

바람이 차갑다. 어제는 가을비가 내리더니 제법 센 바람이 분다. 매천 황현선생님의 생가가 있는 서석마을 어귀를 들어서자 길가 논두렁에 억새는 찬바람에 온 몸을 휘젓는다. 하얗게 센 억새꽃이 눈부시다. "아~ 으악 새 슬피 우는 가을 인가요." 센 바람에 휘청대는 억새의 몸짓에서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이 느껴지는 듯하다.

 

선생이 태어났다는 서석마을은 나지막한 산 아래 있는 조용하고 작은 동네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관광객들의 발길은 보이지 않는다. 벼를 수확하고 난 빈 논에서 볏짚을 작은 단으로 묶느라 분주한 아저씨 모습 외에는 동네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동네어귀를 돌아 마을로 들어서자 '매천 황현선생 생가'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생가로 가는 골목길 담장 안쪽 높이 달려 있는 불그스레한 감이 먹음직스럽다. 야생 참 옻과 오가피 나무가 눈에 띈다. 예부터 민가에서 방부제 살충제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위장치료제로 사용했던 야생 참 옻이 담장 안쪽으로 숨어 들어가는 풍경이 이색적이다.

 

펜션 같은 주택과 슬레이트 지붕들 사이로 초가 지붕이 보인다. '매천 황현선생의 생가'다. 문간채 나무대문을 살짝 밀자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안채, 문간채 그리고 집 뒤쪽으로 돌아서자 아담한 정자가 인상 깊다. 흙벽으로 쌓아 짚으로 이엉잇기를 하여 지은 우리의 전통 초가집이다. 처마는 '홑처마 집' 가구는 '납도리 5량집'이라고 한다.

 

 

매천 환현선생(1855~1910)은 황희 정승의 15대 손이다. 시문에 능한 그는 29세(고종25년 1883년)에 '특설보거과'에 급제, 34세(1888년) 생원시에 장원급제 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과 조정의 부패를 안타깝게 여기고 낙향, 구례에 살면서 호양학교를 설립해 후진양성과 학문에 몰두하였다.

 

54세가 되던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비분강개하여 문변삼수(聞變三首) 시를 지어 매국행위를 통탄하였다. 그의 나이 56세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 항거 시인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의 저서로는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매천야록, 매천집, 매천시집, 동비기략 등이 있다. 

 

"옛날에 고방이 여기다 곡식 너 놓고……. 그런 디라 이것은 논매는 기계라 명색이 기계라,  이것은 논 써는 써레, 요거는 옛날에 콩나물 기르고 남한사람들 그릇에 놓고……. 물 받침대"

 

문간채 왼쪽에는 '고방'이 있다. 아버지(74)는 고방 쪽을 가리키며 옛 생각에 마음이 설레는 모습이다. 고방 문을 열자 농사를 짓던 괭이, 소등에 실어 논을 고르던 '써레' 그리고 곡식을 담아 두었던 '뒤주' 등 농기구를 자세히 이야기 하여 준다.

 

안채는 볼 수가 없다. 짚더미가 마루에 가득 쌓여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새 볏짚으로 엮은 날개로 곧 지붕을 개량할 모양이다. 마당 한쪽에는 매천 황현 선생의 절명시가 놓여 있다.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처신에 대한 어려움을 절감한 시라고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자결하는 심경이 나타난 시라고 한다.

 

황현 선생의 생가에서 500여 미터쯤을 더 가자 사당이 나온다. 그리고 사당 오른쪽 조금 걸어가자 '애국지사 황현 지 묘'라는 묘비명이 시야에 들어온다. 나라를 잃은 비통함에 자결했던 선생님의 분노와 암울한 마음들. 이제는 이곳에 조용히 잠들어 계신다. 간간히 나무을 뒤흔드는 바람소리 뿐 조용하고 평화스럽다.

 

 

노인은 은행나무 열매를 줍고 있다. 어제 저녁부터 거칠게 불어준 바람 때문에 잘 익은 은행나무 열매가 땅바닥에 널려있다. 바람이 기다란 간짓대를 가지고 나무를 휘두를 필요가 없게 만들어 준 것이다.

 

황현 선생의 사당을 지으면서 함께 심었던 은행나무라고 한다. 제법 울창한 가지를 뻗은 나무에는 노랑 은행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잘 익은 홍시처럼 노랑 빛깔 띤 열매를 보니 먹음직스럽다. 약제로도 사용하는 은행 열매는 보기와는 전혀 다르다. 냄새가 고약하다. 구린 '똥' 냄새와 비슷한 것 같다. 잘못 피부에 접촉하면 옻처럼 피부 알레르기를 일으킨다고 한다.

 

 

"지금 못 들어가요 문이 쟁겨써요. 대문이 쟁겼습니다.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매천선생 사진이랑 걸려는디 어떤 놈들이 다 띠겨 가 부리고……."

"사진도 뭐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만 지금 걸려 갖고 있어요."

 

매천황현선생의 후손인 황귀주(75)씨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으로부터 전해들은 그의 조상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사당에 모셔두었던 황현 선생의 초상화가 없어졌다고 한다. 선생님을 존경한 사람이 가져갔다면 문제가 덜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참 불행한 일이다.  

 

난리 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몇 번이나 죽으려 했지만 그 뜻을 못 이뤘도다.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가물거리는 촛불만이 창천을 비추는 도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 자리 옮겨지더니

구중궁궐 침침하여 해만 길구나.

조칙은 이제 다시 있을 수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올을 모두 적시도다.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시름하는구나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

가을 등잔불 밑에 책을 덮고 수천 년 역사를 회고하니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

 

일찍이 나라 위해 세운 작은 공 하나 없었으니

이 죽음은 인(仁)이지 충(忠)은 되지 못하리.

겨우 송나라의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다

송나라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

부끄럽도다.

 

[절명시(絶命詩) 4수 / 매천 황현]

덧붙이는 글 | u포터에 송고했습니다.


태그:#매천 황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