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때로 오해한다. 일반에 속하지 못한 그들은 대체로 '불행할 것이다'라고. 유감스럽지만, 이는 지극히 폭력적인 일반의 시각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다. 그들은 그들 자체로 즐겁다. 그런데 왜 굳이 일반이 나서서 원하지도 않는 그들에게 일반적인 삶의 방식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인지? 혹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중략)

이누도 잇신 감독은 굳이 일반과 이반을 화해시키지 않는다. 굳이 어울리지 않는, 어울릴 수 없는 그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가? 라고 되묻는 것이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오히려 그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Sarcastic Civalism(blog.naver.com/justice1102) - '영화 <메종 드 히미코> : 인정할 건 인정하자.' 中

 영화 <메종 드 히미코>

영화 <메종 드 히미코> ⓒ 강민승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메종 드 히미코>는 대체로 해학적이고 유머러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현실에 대해 굉장히 냉소적이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일반과 이반의 공존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하는 책임 의식 따위는 부재한 상태로, '메종'이라고 하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주인공들이 자기들끼리만 놀게 내버려 둔다.

어차피 어려울 것이므로 애초부터 행동하지 않겠다는 주제 의식은 그가 살아 온 역사적 배경과 그의 개인적인 성향 자체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한 번 시도도 해보지 않고 일반과의 소통을, 그것도 주체적으로, 단절해 버리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리그는 영화 <메종 드 히미코>와 같은 듯 다른 영화, <숏버스>에도 등장한다.

 영화 <숏버스>

영화 <숏버스> ⓒ 강민승


원래 '숏버스'는 미국에서, 장애 아동들이 주로 타는 통학 버스를 의미한다. 일반 아동들이 타는 버스는 스쿨 버스. 상징적인 의미의 '숏버스'는 영화에서 소통(주로 섹스 혹은 성적 취향)의 문제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외설 논란이 일었던 것 역시 난교, 동성애, 항문 섹스 등 우리가 소위 변태적이다라고 낙인찍는 행위들이 이 클럽을 통해 적나라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숏버스'는 (일반의 기준으로 봤을 때) 무엇인가 결핍된 사람들이나 일반과는 다소 다른 성적 취향을 지닌 사람들, 혹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삶과 사랑을 온 몸으로 이야기하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메종'과 '숏버스'의 차이

영화 <메종 드 히미코>에서의 '메종'이 일반들과의 '단절(혹은 격리), 그리고 분리'된 공간을 의미했다면 영화 <숏버스>에서의 '숏버스'는 '단절, 그리고 치유'의 공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메종보다는 진일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쩌면 숏버스는 메종의 초기의 모습일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메종의 구성원인 할아버지들 역시 숏버스의 그들처럼, 처음 만났을 때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서로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않았을까. 그들이라고 하여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는 다 늙어버린 그들에게 여전히 높기만한 현실의 장벽은 더이상 넘어서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숏버스는 치유의 공간이지만 메종의 할아버지들은 이미 치유는 끝난 상황. 더이상 남들에게 이야기 할 것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자포자기적 심리, 그에 따른 연민과 공감, 그리고 연대의식 뿐이다.
  
 영화 <메종 드 히미코>

영화 <메종 드 히미코> ⓒ 강민승


숏버스의 치유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자, 그렇다면 숏버스의 '치유'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어떻게든 이겨내 보려는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숏버스에 등장하는 군상들이 스스로를 치유하려는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쉬 다가오지 않는다.

이 영화가 말하는 치유라는 것은, 편견과 멸시를 퍼붓는 일반에 의해 상처받은 마음을 이반들끼리 모여 서로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미 영화 <메종 드 히미코>를 비롯한 여러 퀴어 영화에서 많이 나왔던 것 아닌가?

일반 퀴어 영화들보다 영화 <숏버스>가 진일보했다고 평가 받는 것은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노력이라는 것이 결국은 숏버스 내에서 숏버스 내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라면, 이는 대단히 실망스럽다.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이 고작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안도감 따위였던가? 이는 자포자기적 심리에서 일반과의 소통을 단절해버린 메종의 할아버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노력이 진정으로 빛을 보기 위해서는 투쟁의 방향이 곧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반을 향해 있었어야 했다.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자신들의 성적 취향이 존중받고 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반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 아니었을까. 이는 영화 <숏버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퀴어 영화들이 갖는 한계다.

 영화 <숏버스>

영화 <숏버스> ⓒ 강민승


이제는 투쟁의 방향을 고민해야 할 때

사실은 그들이 스스로를 구원하려 한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것은 오직 성적 취향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에서처럼 날것 그대로의 주먹을 얼굴에 정면으로 맞아야 하는 일일까?

이반은 어떻게 해서든 일반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법을 배우려 하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스스로가 일반과는 다르다고, 스스로 나는 뭔가 좀 이상하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런 차별을 낳는다. 이반이라고 자처하는 것 자체가 차별에 대한 피해의식을 낳는다.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이반이 일반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일반에게 이상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 것인가가 아닌, 일반이 오히려 이반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인가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또 있다. 일반과 이반을 나누는 것 자체도 우습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여자라면 당신도 어느 순간, 어떤 장소에서는 이반이 될 수도 있고, 당신이 키 180cm가 채 되지 않는 남자라면 당신도 어느 순간, 어떤 장소에서는 이반이 될 수도 있다. 결국 대안이란 모두가 같은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는 것 아닐까. 아, 이 길고도 지난한 싸움이여.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제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퀴어 메종드히미코 숏버스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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