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30℃가 넘는 찜통더위에 숨이 헉헉 막혀온다. 앉아만 있어도 땀이 비적비적 흘러내리고 온몸에 기운이 풀려 녹작지근하다. 금세 빨아 빳빳하게 날이 선 옷들도 입자마자 풀기가 빠져 휘주근하다.
산골짝에 사는 촌부네 집에 에어컨이 있을 리 없고, 시원한 하늬바람이 골짝을 타고 내려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릴 뿐이다. 오늘은 그 서늘한 바람 한 자락마저도 소식이 없고 따가운 햇살만 쨍쨍 밭고랑을 건너가고 있다.
선풍기나 돌려볼까 하다 마음을 접고 며칠 전 어느 독자가 보내 준 부채를 좍 펴들었다. 부채 살이 27개, 흰 바탕 백자 위에 국화꽃 닮은 그림이 한 쪽을 차지하고 있다. 부채 손잡이엔 앙증맞은 줄이 달랑달랑, 직접 만들어 달아 놓은 듯, 부채질을 하지 않아도 시원하고 서늘한 정성이 부채 살 가득 피어오른다.
옛날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부채에다 직함과 이름을 올리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결의를 다지고 죽음을 맹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 임백견이라는 강원도 관찰사는 부임할 때 사랑하는 기생으로부터 부채를 선물을 받았는데 부채 살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다른 부채와 바꾸질 않고 사랑을 불태웠다고 한다. 임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은 밀려오는 왜군 앞에 자결을 하며 불효를 용서해 달라는 내용을 부채에다 기록해 전해오고 있다.
부채는 극한 상항에선 결의의 매개체요, 좋아하는 사람에겐 사랑의 바람결을 대신하고 있다. 오늘은 날씨가 하도 더워 독자께서 보내준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본다. 이 부채엔 무슨 뜻이 담겨있을까, 행여 복더위에 욕심이나 어리석은 마음이 일거든 부채 살로 막아 날려 보내며 참고 견딤의 한계를 시험해 보라는 뜻일 터.
부채는 이런 정신적 매체보다는 실리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많다.
바람을 일으키는 일은 기본, 땅에 앉을 땐 깔개, 들판에선 밥상, 물건을 머리에 이면 또아리 받침, 햇볕을 가려주기도 하고, 비를 막기도 하며, 파리와 모기를 쫓기도 한다. 얼굴을 가려 내숭을 떨기도 하고, 판소리 장단을 맞추면 추임새 역할, 무당이 부채를 들고 춤을 추기시작하면 귀신이 맥을 못 추고 튀어나오기도 한다.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땀은 여전히 비질거리고 정신이 사납다. 땡볕은 쨍쨍, 들일은 어림도 없고, 어정대다 산을 향한다. 더울 때는 산보다 더 시원한 곳이 어디며, 개울 산골짝만금 서늘한 곳은 없다. 거기에다 들꽃이라도 만나 대화라도 나누는 날엔 더위쯤이야 저만큼 자리를 비껴나간다.
무더위 속에 범부채가 한창이다. 호랑이도 더운 날에는 부채질을 하나보다. 잎은 칼모양 같기도 하고 부채 살을 닮았다. 꽃 속에 박힌 점들은 호랑이 껍질 얼룩무늬를 닮아 범부채라 했나보다. 꽃잎은 6장이다. 뿌리줄기는 가래를 삭이는데 효험이 크다한다. 여름해소로 고생하는 분이라면 줄기를 삶아 마셔 봄직도 하다.
범부채 구경을 한참 하다 폭포 앞에 몸을 담근다. 부서지는 포말,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 시원한 계곡물소리, 웃통을 벗어 제치고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바위에 발을 올려놓으니 냉탕이 따로 없다. 탁족(濯足-발을 씻음)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싶다. 탁족은 예부터 발을 씻으며 풍류를 즐기던 풍습이기도 하다. 오늘은 물러터진 발가락과 퀴퀴한 발바닥이 호강이다.
'앗! 차거라'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여기가 바로 천연 에어컨 천국인 것을. 호랑이 부채로 설설 바람을 일으키며 함께 발을 씻어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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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족, 발씻기 탁족은 복 때 풍류를 즐기며 발을 씻고 노니는 풍습입니다.
퀴퀴한 발을 물에 담그고 이제부터 신선놀음 한 번 하실까요.
무릉도원이 따로 있나요. 천연 에어컨...정말 저릿저릿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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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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