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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 분원리에서 본 호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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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한강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드넓은 호수가 나타난다. 호수의 이름은 팔당호.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비로소 한강이 되는 지점에 만들어진 팔당호는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면서 생긴 호수다.

왕실 그릇의 역사와 붕어찜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곳 '분원리'

팔당호의 호수는 언제 찾아도 신비롭고 아름답다. 봄이면 연두빛 능수버들의 낭창거리고, 여름이면 훌쩍 자란 수초들의 일렁거림이 호수와 어울려 기막힌 풍경을 연출한다. 가을이면 새벽 안개가 환상적이고 호수까지 내려온 단풍빛은 지켜보는 이의 마음까지 유혹한다. 겨울 풍경의 진객은 역시 드넓은 호수에 내려앉은 흰눈이다.

호수는 바라보는 각도와 장소에 따라 물빛이 다르고 그 물빛에 비춰진 산 그림자의 형상이 다르다. 호수 주변으로 형성된 강변마을은 동화에나 나올 법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다산 정약용의 묘와 생가가 있는 마현마을에서 바라보는 호수와 양수리에서 바라보는 호수의 풍경이 다르다. 또한 호수 건너편 마을인 분원리에서 바로본 건너마을의 풍경 또한 아련하다.

조선시대 마지막 왕실 관요지였던 분원리로 갔다. 지난 일요일(7월 27일) 늦은 오후였다. 목적은 두 가지. 하나는 조선 백자를 만들던 장소를 보고자 함이요, 또 하나는 분원리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붕어찜을 먹어보기 위함이었다. 

그 시간 팔당호는 기울어 가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호수 건너편인 마현마을과 양수리는 그림속 풍경처럼 아득했다. 강변으로 난 길을 따라 달리면 양평까지 갈 수 있으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호수 풍경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다. 길은 호젓하며 구불구불하여 속도를 한껏 늦춘 채 드라이브를 하기에도 좋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섬들. 우측 멀리 양수리 마을의 아파트가 보인다.
▲ 팔당호수. 호수 위에 떠 있는 섬들. 우측 멀리 양수리 마을의 아파트가 보인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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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호수에 떠 있는 섬. 우천리로 짐작된다. 호수 건너 마을은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마현마을이 있다.
▲ 호수와 섬. 팔당호수에 떠 있는 섬. 우천리로 짐작된다. 호수 건너 마을은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마현마을이 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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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분원리는 조선 왕실과 궁궐에서 쓰이는 음식 그릇을 굽던 곳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그릇은 백자. 원래 '사옹원 분원 백자 번조소'이지만 약칭으로 '분원'이라 불렀다. 그러니 '분원리'라는 마을 이름은 왕실과 궁궐에 필요한 음식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사옹원'의 '백자 분원'이었던 곳이 마을 지명으로 정착된 것이다.

호수변 마을인 분원리는 전체가 백자 가마터

지금의 분원리에 오기 전 왕실 가마터는 남종면 금사리에 있었고, 분원리에 자리를 잡은 것은 1752년이다. 이전까지 분원은 땔감과 흙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 10년 주기로 자리를 옮기곤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마터는 광주에만 340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광주땅 전체가 분원이었던 것이 현재의 분원리에 정착한 것은 한강으로 땔감과 흙을 운반하기 좋았던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다. 백자를 만드는 데 쓰이는 흙은 춘천과 화천 홍천, 양구, 이천 등지에서 뱃길로 이동했다.

1752년 설치된 분원은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민영화가 되기 전까지인 1883년까지 130년간 왕실 관요 역할을 했다. 관요를 민간이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분원리는 일제의 사기가 들어오면서 1900년대 들어 완전히 문을 닫았다.

왕의 그릇인 '어용지기(御用之器)'가 되었던 분원리 백자는 흰백의 순수함과 절제미가 으뜸이다. 푸른 안료가 더해진 청화백자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제는 문화재 대접을 받으면서 귀한 것들이 되었지만 100년 전만 해도 일제 사기에 밀려 깨지거나 뒷전으로 밀렸던 것이 조선 백자 그릇이었다.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조선 백자 그릇을 굽던 가마터는 일제가 그 자리에 지금의 분원초등학교를 지으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랬던 것을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 2002년까지다. 분원리 전체가 가마터로 추정되지만 주변의 민가와 음식점, 학교 등으로 인해 앞으로의 발굴조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두 차례의 발굴조사 후 경기도는 현장에 '분원백자관'을 만들었다. 주변에 산재한 가마터와 그 역사에 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간 백자의 역사는 단촐하다. 발굴 터는 잔디밭으로 변해 그곳이 백자를 굽던 곳인지 짐작조차 힘들었다.

분원리 백자 가마터를 발굴조사한 후 백자관을 세웠다. 잔디가 심어진 곳이 발굴터이다.
▲ 분원백자관. 분원리 백자 가마터를 발굴조사한 후 백자관을 세웠다. 잔디가 심어진 곳이 발굴터이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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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왕실과 궁궐의 음식을 관장하는 사옹원 감관들의 선정비를 세웠다. 선정비 거리가 따로 있었으나 물에 잠기자 분원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놓았다.
▲ 사옹원 선정비 마을에서 왕실과 궁궐의 음식을 관장하는 사옹원 감관들의 선정비를 세웠다. 선정비 거리가 따로 있었으나 물에 잠기자 분원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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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전체가 조선백자 가마터인 분원리는 어느 집을 가더라도 깨진 백자 조각 하나씩은 다 있다. 팔당호가 생기면서 기존의 땅이 절반이나 잠긴 분원리는 그 사이 붕어찜 전문 음식점 마을이 되었다. 간판마다 원조임을 밝히고 있지만 진정한 원조를 찾기에도 힘든 세월이 되었다.

마을 유일한 어부가 붕어 잡아 파는 집 '한강붕어찜'

분원리에 살고 있는 박창덕(76)씨는 마을의 유일한 어부이다. 고기를 잡겠다고 해서 아무나 어부 허가를 내주지 않는 시절이니 어부도 그만큼 귀해졌다.

"10년 전만 해도 어부가 예닐곱 있었어요. 지금은 달랑 저 혼자뿐이지요."

분원리 앞 마을인 우천마을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박씨는 팔당댐이 들어서면서 고향마을이 물에 잠기는 아픔을 겪었다. 예전 분원리 나루터가 있던 우천마을은 지금 호수 위로 머리만 내밀고 있어 박씨의 안타까움이 더하다. 그나마 어부가 되어 탯줄이 묻힌 곳을 가까이 가 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란다.

"어부가 혼자라서 돈벌이가 좀 되겠어요?"
"그렇지도 않아요. 밀려 들어오는 수입 붕어에다 양식 붕어까지... 예전만큼 못해요."

수입이 줄어 들기에 어부 일을 하지 않는 세월인 것이다. 박창덕씨가 잡은 참붕어를 대주는 집은 '한강붕어찜' 간판을 달고 있는 집이다. 박씨는 팔당호에서 잡은 붕어를 그 집에만 공급한다고 했다.

정선의 작품집 '경교명승첩' 중에서 팔당댐으로 잠겨버린 '우천리' 풍경. 간송미술관 소장
▲ 겸재 정선의 '우천' 정선의 작품집 '경교명승첩' 중에서 팔당댐으로 잠겨버린 '우천리' 풍경. 간송미술관 소장
ⓒ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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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찜 요리는 시래기가 들어가지 않으면 제 맛을 낼 수 없다.
▲ 시래기와 수제비. 붕어찜 요리는 시래기가 들어가지 않으면 제 맛을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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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유일한 어부가 잡은 붕어를 들고 걸음하는 집. 그렇다면 믿을 만한 집이렸다. 호수 옆에 자리잡은 '한강붕어찜' 집으로 가서는 붕어찜을 주문했다. 붕어찜이 완성되기까지는 30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 시간동안 붕어찜의 효능이 적혀 있는 책자를 뒤적였다.

여름철 보양음식으로 알려진 붕어찜 "국물이 보약입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붕어는 즉어 또는 부어, 춘어라고 하며 성질은 따뜻하고(溫) 맛은 달며(甘) 독은 없고 위기(胃氣)를 고르게 하고 오장을 보호한다고 했다. 또한 중초(中焦)를 고르게 하고 기를 내리며 이질을 낫게 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붕어는 비위허약, 식욕부진, 무기력, 이질, 혈변(血便), 수종(水腫), 임병(林病), 옹종(癰腫), 궤양(潰瘍) 등을 치료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여름철 보양음식으로 알려진 붕어는 담백질과 철분이 많아 빈혈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붕어로 만든 찜요리는 무더위로 잃어 버린 입맛을 돋우는 것은 물론이고 기운은 보충하는 요리로서 널리 쓰였다고 전해진다. 붕어는 찜요리뿐 아니라 소주를 내려 장복하기도 하는데 스태미너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단다.

붕어찜으로 나온 붕어는 50센티는 되어 보였다. 민물새우와 지난 해에 만들어 놓은 무시래기와 수제비를 깔고 요리한 붕어찜은 술안주로도 손색이 없다. 서너 사람은 족히 먹을 양인 붕어찜은 담백하기가 그만인 데다 매꼼한 시래기를 먹는 재미도 특별했다.

팔당호에서 잡은 참붕어로 요리한 붕어찜. 한 여름철 보양식이다.
▲ 붕어찜. 팔당호에서 잡은 참붕어로 요리한 붕어찜. 한 여름철 보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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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집을 내어 요리한 붕어찜. 군침이 절로 돈다.
▲ 붕어의 속살. 칼집을 내어 요리한 붕어찜. 군침이 절로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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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찜의 백미는 비단 붕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요리하면서 생긴 국물. 붕어 엑기스가 따로 없다.

"붕어만 먹고 가면 약효의 절반만 먹는 것과 같습니다. 국물까지 먹어야 붕어 한 마리를 다 먹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식점 주인은 고기살만 건져 먹는 손님들에게 붕어찜 먹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손님들은 마지막 남은 한방울의 국물까지 싹싹 긁었다. 붕어찜과 함께 나온 솥밥으로 국물을 비벼 먹는 이들도 있었다. 건강이라면 못할 것이 없는 시절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먹는 것은 무쇠솥에 지은 밥의 숭늉. 뜨거운 것을 뜨겁다고 표현하기보다 시원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우리나라의 누룽지 숭늉은 아무리 배가 부른다 해도 잘도 들어간다.

매콤 얼큰한 붕어찜과 숭늉 한 그릇으로 행복해지는 분원리 붕어찜 마을에 가면 건강도 챙기고 왕실의 그릇 역사도 엿볼 수 있다. 그 뿐인가. 팔당호에 드리워진 아름다운 풍경은 식후경으로도 더할 나위 없다.

호수에 떠 있는 섬과 산그림자. 한폭의 그림이다.
▲ 산과 그림자. 호수에 떠 있는 섬과 산그림자. 한폭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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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분원리, #붕어찜, #팔당호수, #조선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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