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티켓(출전자격) 땄을 때요? 사실 기대도 안 했어요. 그래서 놀라기도 하고 좋기도 했지만, 제가 같이 나간 언니들보다 실력이 안 좋은데도 티켓을 땄으니 언니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당당할 수가 없었어요."

의외였다. 한국 근대5종 사상 여자선수 최초로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한 선수의 대답치고는 말이다.

윤초롱(20·한국체육대학교 1학년) 선수는 "아직 내가 실력이 부족한 걸 아는데, 갑자기 너무 많은 관심을 받으니 적응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근대 5종 '원더걸', 윤초롱 만나러 가다

윤초롱 선수를 만나러 가기 전, 내가 상상한 그녀의 모습은 '원더걸(wonder girl)'이었다. 한 종목만 하기도 힘든 사격, 수영, 승마, 육상, 펜싱을 한꺼번에 소화해 내다니. 그것도 수영하다가 근대5종으로 전향한 지 3년 만에 말이다.

거기다 운까지 좋았다. 작년 5월,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 근대5종 선수권 대회에서 윤초롱은 9위를 차지했다. 당시 1위부터 8위까지는 모두 중국과 카자흐스탄 선수들이었다 . 하지만 한 나라에서 2명 이상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 덕분에, 윤초롱 선수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티켓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우수한 실력에, 행운까지…. 이야말로 '대단한 소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난 17일, 경기도 성남 국군체육부대에 위치한 사격장에서 처음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도 이러한 환상(?)은 깨지지 않았다.

사격장  사격 훈련 중인 윤초롱 선수(제일 오른쪽).

▲ 사격장 사격 훈련 중인 윤초롱 선수(제일 오른쪽). ⓒ 홍현진


윤초롱 선수는 덩치 큰 남자선수들 틈에 홀로 서서 총알 한 발, 한 발에 집중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작은 체구(키 162cm) 역시 왠지 그녀를 더욱더 돋보이게 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옛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사격장에서 수영장으로, 점심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그리고 펜싱장으로 하루 동안 대표팀의 훈련을 따라다니면서 환상은 점점 깨지기 시작했다. 훈련을 하고, 이동을 하는 내내 윤초롱은 쉴 새 없이 대표팀 오빠들과 장난을 치고 수다를 떨며 깔깔댔고, 틈날 때마다 손에서는 휴대전화기가 떠나지 않았다.

이번 학기,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도 학점이 아주 잘 나왔다고 좋아하며 엄마에게 MP3를 사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또 자신은 운동을 계속했는데도 살이 잘 안 빠진다며 수영복 입은 모습을 촬영할 때는 슬그머니 빠지기도 했다. '원더걸'은 평범한 소녀들과는 뭔가 '차원'이 다를 거라 상상했는데…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올해로 근대5종 입문 4년차...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근대 5종 입문 3년 만에 '한국 여자선수 최초'로 올림픽 티켓을 딸 수 있었던 '비결'이 도대체 뭐냐고 물어보려 했던 계획도 무산되었다. 올림픽 본선까지 진출한 실력이지만, 윤초롱 선수는 아직 자신의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장 자신 있는 종목과 부족한 종목을 물었다.

"사실 세계무대에 나가면 다섯 종목 다 처지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사격이요. 수영이나 육상은 노력한 만큼 나오는 편인데 사격은 심리적인 게 많이 작용해요. 저는 사격할 때 너무 떨려서… (웃음).

이번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도 다른 종목은 다 제 기록만큼 나왔는데 사격에서 잘 못해서 성적이 안 좋았어요. 올림픽까지 나갔는데 주니어 결승에도 못 나가고 속상했죠. 사실 사람들이 올림픽 나간다고 하면 '우와, 너 정말 운동 잘하나 보다' 그러거든요. 그럴 때마다 조금 부담스러워요. 아직은 갈 길이 먼데…." 

이날 취재 중에 승마장에서 누군가 윤초롱 선수에게 "넌 말 타면 울잖아"라고 놀렸던 것이 생각나 '왜 울었느냐'고 물어보니, "아유, 말이 제 키만큼 높이 뛰는데 안 무섭겠어요?"라면서 멋쩍은 듯 웃었다. 바로 이어 떨어지는 게 무섭냐고 물었다.

"사실 떨어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어서 괜찮은데, 경기 나가면 어떤 말이 올지 모르잖아요(근대5종 승마에서는 선수들이 자신의 말과 함께 경기하는 것이 아니라 추첨을 통해 주최 측이 제공하는 말을 탄다). 이게 완전 운인데. 그래서 처음 말을 탈 때는 조금 무섭기도 해요."

올림픽 본선 진출 후 쏟아진 언론의 관심... "나만 관심받아 미안하기도"

펜싱훈련 대표팀 오빠들이 펜싱경기를 하자, 심판을 보고 있는 윤초롱 선수.

▲ 펜싱훈련 대표팀 오빠들이 펜싱경기를 하자, 심판을 보고 있는 윤초롱 선수. ⓒ 박상익


윤초롱 선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수영을 시작했다. "공부와는 그리 친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며 검도며 안 해 본 운동이 없다. 그런데 수영에는 워낙 우수한 선수가 많다 보니 수영으로는 대학에 진학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에 아는 분의 권유로 근대5종을 시작하게 되었다. 중3 때의 일이다.

처음에는 상비군으로 들어가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대표팀이 되었고 고3이었던 작년, 올림픽 티켓을 따냈다. 윤초롱은 "근대5종을 시작한 건 솔직히 말하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였다"고 말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답변이었다.

근대5종 다섯 개 종목 중에서 할 줄 아는 것은 수영과 육상밖에 없던, 그래서 근대5종을 처음 했을 때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는 윤초롱. 그런 그녀가 근대5종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올림픽 진출권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지만, 아직도 '성장하는 중'인 자신에게 쏟아지는 언론의 관심은 늘 부담스럽기만 하다. 

CF출연장면 MBC 2008 베이징 올림픽 홍보 CF에 출연한 윤초롱 선수

▲ CF출연장면 MBC 2008 베이징 올림픽 홍보 CF에 출연한 윤초롱 선수 ⓒ MBC


윤초롱 선수는 대표팀 이춘헌, 남동훈 선수와 함께 2008 베이징올림픽 홍보 CF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녀는 "CF에서 한 편은 3명이 함께 찍고 또 다른 한 편은 저 혼자 찍었어요"라며 "그런데 CF도 그렇고 언론 취재도 그렇고 오빠들보다 저한테 더 관심을 가질 때, 오빠들에게 너무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오빠들이 자신보다 더 오래 운동했고 실력도 더 좋은데,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에게만 비치니 미안한 것이다.

CF 촬영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없었냐고 물었다.

"CF 찍기 전에 일주일 동안 명절이었어요. 그때 정말 많이 먹어서 부은 거예요. 막 CF 감독님이 '운동선수 맞냐'고 놀리고(웃음). 그날 NG도 정말 많이 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언론을 통해 CF가 나가고 나서 주위 반응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TV 한번 나가면 문자가 막 오거든요. 근데 다 막 '왜 이렇게 새까매, 왜 이렇게 살쪘어' 이런 반응이에요.(웃음)"

"제가 좀 '남자'같고(?) 털털해서 괜찮아요"

갈굼(?) 당하는 윤초롱 윤초롱 선수를 놀리는 대표팀 남동훈 선수.

▲ 갈굼(?) 당하는 윤초롱 윤초롱 선수를 놀리는 대표팀 남동훈 선수. ⓒ 홍현진


인터뷰 내내 조금은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조차 시종일관 밝은 표정이었던 윤초롱은 해맑은 얼굴로 "외로워요"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운동을 시작해, 중3부터는 집을 떠나 근대5종 훈련장이 있는 성남 국군체육부대(상무)에 들어와 훈련해온 그녀는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해, 학교에서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친한 사람들은 대부분 대표팀 오빠들, 상무 오빠들, 체대 언니들과 같은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이다.  

함께 운동하는 또래 여자선수들도 많지 않다. 현재 근대5종 대표팀에는 여자선수가 3명밖에 없다. 소년체전, 전국체전에 근대5종 여자부가 없다 보니 선수 육성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5종으로 대학까지 간다고 해도 졸업 후에는 여자 실업팀이 없다. 그래서 많은 여자선수들이 근대5종을 시작했다가 그만둔다고 한다.

남자선수들이 넘치는 상무에서, 역시 남자선수가 많은 근대5종 훈련을 하다 보면 불편하거나 한 점은 없냐고 묻자 "제가 좀... '남자'같아서요(웃음) 털털한 성격이라 다 친하게 지내요"라고 답했다.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못했던 걸 다 해보고 싶어요"

윤초롱 선수에게 대학졸업 후 '진로'를 물어보았다. 실업팀이 없다면 어떤 길로 나가야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이번 올림픽은 사실 경험 삼아 나가는 거고,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아시안 게임이 있어요. 그래서 그때 메달을 따는 거예요. 그리고 대학 졸업 후에는...여기를 뜨는 거에요(웃음)."

만약 '계획대로' 메달을 따고, 운동을 그만두게 된다면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봤다.

"그동안 못했던 걸 하고 싶어요. 놀고도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사실 대학생인데 미팅도 못하고, 꾸미지도 못하고, 발목 다칠까 봐 구두도 못 신고, 화장도 배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게 많아요."

그럼 운동을 평생 하거나 그럴 생각은 없는 거냐고 다시 물었다.

"사실 대학 졸업하고 뭘 할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 안 해봤어요. 실업팀도 없고…. 누군가는 '너 왜 근대5종 하냐'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뭐 머리 아프게 지금부터 생각해요. 어디 한 군데 저 받아주는데 없겠어요.(웃음)"

이 소녀,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아니 이렇게 진지한 면이!' 하면서 놀랄 만하면 어느새 다시 명랑한 20살 소녀가 되어 있다.

'원더걸' 윤초롱이 아닌 '20살 명랑소녀' 윤초롱을 만나다

근대5종은 12시간 안에 다섯 종목의 경기를 모두 소화해야 한다. 훈련하면서, 경기하면서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은지 궁금했다.

"사실 경기할 때는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 잘 모르겠어요. 훈련할 때는 힘들기도 하지만 다섯 종목 훈련을 번갈아가면서 하니까 지루할 틈이 없어요. 그리고 근대5종이 변수가 많거든요. 1등이 말 한 번 잘못 걸려서 꼴등이 될 수도 있고, 또 역전될 수도 있고. 그래서 재미있어요."

16일 하루 동안 만나본 근대5종 윤초롱 선수는 그동안 언론에서 보아왔던 것과 같은 '원더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아직은 부족한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고, 자신만 관심 받는 것에 대해 다른 선수들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더욱더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밝고 명랑했다.

오늘 나는 밤하늘에 별처럼 떠 있는 환상의 '윤초롱'이 아니라, 나와 같은 땅에 두 발로 서 있는 '윤초롱'을 만났다. 그래서 더 예쁜,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윤초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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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SK텔레콤 T로밍이 공동 후원하는 '2008 베이징올림픽 특별취재팀' 기사입니다.
윤초롱 근대5종 베이징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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