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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땅임자’와 ‘지주’

 

.. 한숙이네는 땅이 없었기 때문에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농사를 지어 땅주인에게 얼마를 주고 남은 것으로 먹고살자니 늘 가난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  《박상규-사장이 된 풀빵장수》(산하,1993) 107쪽

 

 낱말책에서 ‘땅주인’을 찾아보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임자’라는 말은 나옵니다. 토박이말 ‘땅’이라서, 이 말 뒤에 붙이는 낱말로는 ‘主人’이라는 한자말보다 ‘임자’라는 토박이말이 어울리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집임자’와 ‘집주인’은 낱말책에 함께 실려 있습니다. 다만, ‘집임자’ 풀이는 “집임자 = 집주인”으로 되어 있고, ‘집주인’ 풀이도 “집주인 = 집임자”로 되어 있습니다.

 

 ┌ 땅임자 :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

 │     <돈이 없는 농사꾼은 땅임자가 되기 어렵다>

 ├ 임자

 │  (1) 물건을 가진 사람

 │     <이 자리는 임자가 없나 / 이 책은 아직 임자가 없다>

 │  (2) 사람,물건,짐승을 잘 다스리거나 다루는 사람

 │     <자전거가 임자를 만났구나 / 이 일에는 임자가 따로 있어>

 │  (3) 부부를 이루는 짝이 되는 사람

 │     <이제 임자도 마음 놓으시게>

 │

 ├ 주인(主人)

 │  (1) 대상이나 물건을 소유한 사람. ‘임자’로 순화

 │   - 책방 주인 / 주인 없는 땅 / 이 우산 주인 없습니까?

 └ 지주(地主)

     (1) 토지를 지니고 있는 사람

     (2) 자신이 가진 토지를 남에게 빌려 주고 지대를 받는 사람

     (3) 그 토지에서 사는 사람

 

 ‘주인’이라는 한자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모두 다섯 가지 뜻이 달려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쓰는 첫째 뜻을 보면, ‘임자’로 고쳐서 쓰라고 풀이가 달립니다. 이 풀이말에 따른다면, “책방 주인”은 “책방 임자”로 고치고, “주인 없는 땅”은 “임자 없는 땅”으로 고치며, “이 우산 주인 없습니까?”는 “이 우산 임자 없습니까?”로 고쳐야 알맞습니다.

 

 국어사전 뜻풀이로 살피면, “땅임자 = 지주”로 되어 있고, 다른 뜻풀이가 달려 있지 않습니다. ‘지주’를 찾아보면 모두 세 가지 뜻이 달립니다. 국어사전에 “땅임자 = 지주”로 되어 있다고 한다면, ‘땅임자’는 ‘지주’ 쓰임새 세 가지가 모두 있다는 소리가 될까요, 아니면 ‘지주 (1)’하고만 같은 뜻이나, ‘땅임자’보다는 ‘지주’라는 말을 써야 올바르다는 소리가 될까요.

 

 ┌ 땅 + 임자 = 땅임자 :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

 └ 地 + 主 = 地主 : 土地를 所有한 主人

 

 우리가 ‘땅임자’라고 할 때에는,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地主’라고 할 때에는, “土地 所有 主人”을 가리킵니다.

 

 저마다 자기 마음에 와닿는 말을 골라서 쓸 일이며, 자기한테 뜻이 또렷하게 느껴지는 말을 가려서 쓸 일입니다. 어릴 적부터 듣던 말이 익숙할 테고, 둘레에서 흔히 듣던 말을 스스럼없이 쓰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펄벅 님이 쓴 문학은 ‘땅’도 ‘너른 땅’도 ‘어머니 땅’도 아닌 ‘大地’로 옮겨졌습니다. 우리 나라 소설꾼 박경리 님이 쓴 문학은 ‘땅’이 아닌 ‘土地’였습니다. 글꾼 이광수 님은 ‘흙’을 썼고, 소설꾼 윤정모 님은 ‘들’을 썼는데, 앞으로 우리 나라 글꾼 가운데 ‘땅’을 글감 삼아서 이야기를 줄줄줄 펼쳐 나갈 분이 나올 수 있을는지, 못 나올는지.

 

 

ㄴ. ‘자름선’과 ‘절단선’

 

 집살림을 갈무리하다가, ‘체력검사 수검표’라는 종이 한 장을 봅니다. 사진은 다른 데에 쓴다고 떼어냈고, 꼬깃꼬깃 꼬겨진 채로 종이 한 장 남아 있습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가기 앞서 ‘체력검사’를 했습니다. 그때 쓰던 녀석이었을 테고, 이 수검표를 왼쪽 가슴에 옷핀으로 꽂아서 이것저것 체력검사를 했던 일이 어렴풋하게 떠오릅니다. 그때 일을 지나가는 말로 묻는다면 떠올리지 못할 터이나, 종이쪽지 하나가 남아서 가만히 만지작거리다 보니 아련하게 이 모습 저 모습 떠오릅니다.

 

 용케 이런 종이쪽지를 안 버리고 간수하고 있었다며 재미있어 하면서 요모조모 살펴봅니다. 종이쪽지는 둘로 나누도록 되어 있고, 오돌토돌 돌기가 솟고 금이 그어진 자리에 자그마한 글씨로 ‘자름선’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 자름선

 

 응? 자름선? 자르는 금이니 ‘자름선(-線)’인가?

 

 ┌ 절단선(切斷線) / 개봉선(開封線)

 └ 뜯는곳

 

 종이쪽지는 상자에 다시 집어넣고 끈으로 고이 묶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라면 스프를 뜯을 때, 과자봉지를 뜯을 때, 밥집에서 주는 물수건 봉지를 뜯을 때, 금이 그어진 자리가 있고 그 옆으로 여러 가지 말이 적혀 있습니다. ‘절단선’이라고 적히기도 하고, ‘개봉선’이라고 적히기도 하며 ‘뜯는곳’이라고 적히기도 합니다.

 

 ┌ 자름줄 / 자름금 / 자를곳

 └ 뜯는줄 / 뜯는금 / 뜯는곳

 

 1990년 가을 어느 날,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이 가슴에 달고 체력검사를 보도록 한 종이쪽지에 ‘자름선’이라는 말을 넣은 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분은 자기 나름대로 우리 말을 살려 보려는 마음이었을까요. 학생들이 쓰는 종이쪽지이니, 좀더 쉬운 말로 적어야 한다는 마음이었을까요. 이도 저도 아니고, 말 그대로 “자르는 금”이니까 ‘자름선’이라고 적었을 뿐일까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태그:#살려쓰기, #우리말, #우리 말, #토박이말,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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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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