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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국민주권' 국가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사실 주권이란 것이 없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미안하지만 당신에게는 주권이란 게 없다. 국민주권은 쉽게 말하면 그냥 뭉뚱그린 '전체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국민주권'은 좀 기만적인 개념이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하면서, 실상 국민들은 그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처럼 국가와 국민을 대표하는 공무원을 뽑는 역할 정도 밖에는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권이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인민주권'이다. 국민소환과 같은 직접민주주의적 제도는 거의 인민주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국민주권은 나쁜 것", "인민주권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역사적으로는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했지만, 장단점이 있는 만큼 두 가지 상반된 주권론의 장점을 잘 조화시키고 실현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민주권과 인민주권의 구별은 거의 무의미하다.

 

물론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대의제라도 잘 발전했다면 모를까, 우리의 미천한 정치현실에서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말은 참으로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말이다.

 

하지만 이젠 생각이 달라졌다. 주권이론이야 어찌됐든 상관없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고, 자신에게도 주권이 있으며, 그걸 마땅히 행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거를 통해 권력담당자 또는 대표라고 뽑아 놓은 자들의 행태가 도저히 못마땅하니, 주권자로서 분연히 일어서 심판하겠다는 사람들이다. 헌법의 시각에서 보자면, 자칫 빈껍데기가 될 수 있는 '국민주권'을 알차게 만드는 '주권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촛불을 든 사람들은 결코 과거의 운동권이 아니다. 설령 과거에 운동권이었던 사람들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 역시 과거의 그 운동권들이 아니다. 미국을 '제국주의'라며 한반도에서 몰아내자고 하지도 않고, 자본주의 세상을 뒤엎어 사회주의혁명을 이루자고 하지도 않는다. 저항폭력으로 정당하게 여겼던 쇠파이프, 화염병, 돌멩이조차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이들은 미국을 아주 가깝고 중요한 우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대등해야 할 국가관계가 불평등하거나 전쟁을 하는 그런 경우만 빼면 말이다). 또한 남녀노소를 떠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희망을 품고 열심히 일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시민들이다(물론 이들이 바라는 자본주의는 '민주적 자본주의'이다). 나아가 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시위현장에서 경찰로부터 공격을 받아도 '비폭력'을 외칠 줄 알고, 대책 없는 취객이 전ㆍ의경에게 욕을 하면서 폭력을 행사하려 할 때에는 그 앞을 막아서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성숙한 시민들이다.

 

이는 촛불을 든 시민들이 이명박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보면 입증이 된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가 어처구니없는 외교적 미숙으로 우리가 당연히 찾아야 할 것도 못 찾고, 나아가 한미관계 또한 악화시키고 있는 '진정한 반미정부'라고 생각한다. 또한 자본주의를 제대로 해서 경제 좀 살리라고 했더니, '수입협상'의 기본조차 모르는 '진짜 무능한 정부'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려다 어쩔 수 없이 시위진압을 할 수밖에 없는 어린 전ㆍ의경과 철저히 이명박 정권의 개가 된 경찰 고위직들까지도 구분해 낸다.

 

그래서 '친북좌파'를 운운하는 정부나 수구ㆍ극우세력이 다시 한 번 처량해 보일 수밖에 없다. 지금 촛불을 든 이들은 과거에 독재정권을 증오하다 못해 국가와 사회까지도 송두리째 갈아엎어야 한다고 했던 그 '불순세력'이 아니라, 누구보다 국가와 사회를 사랑하는 '주권자'이자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진즉에 돌아올 수 없는 기차를 탄 것으로 보인다. 시민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거짓된 태도로 일관하는 정부, 시민에게 봉사하지 않고 핍박하는 정부도 정당성이 없다 할 것이다. 그런데 비록 선거를 통해 최소한의 민주적 정당성은 갖추었다고 하나,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에서 국민을 기망하고, 나아가 국민들의 평화적 요구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정부라면, 이미 과거의 독재정권처럼 존재근거를 상실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오늘날 흔히 볼 수 없는, '시민불복종'이나 '저항권'이라는 고전적 권리가 현대에도 실현되어야 할 그런 경우가 있다면,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경찰이 신주단지처럼 애지중지 모시는, 낡은 집시법이나 알량한 도로교통법과 비교하기에는 신성하기까지 한 권리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정치세력들이 보여주는, 그들만의 변하지 않는 레퍼토리가 있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 민중의 진정한 요구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결국 그들 스스로 헛발질을 하다 고꾸라져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고 마는 것이다. 그 역사의 수레를 움직이는 것은 물론 민중이다. 오늘날 '국민'이나 '시민'이란 말이 더 이상 '민중'과 다른 말이 아니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이 즐거운 주권자들의 축제는, 어떤 모습으로든 결국 승리하고 말 것이다!

 


태그:#촛불, #국민주권, #주권자, #주권운동, #인민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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