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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지나갔다. 세자관은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고 세자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관원들도 하나같이 어두운 모습이었다. 소현은 황제의 사냥길 동행 요청을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뿌리치고 봉림대군을 내보냈다. 목 졸려 죽어가던 정뇌경의 환영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세자가 자리에 눕고 말았다. 진맥은 소화불량, 불안, 기(氣)막힘이었다.

의관 정남수가 평위산과 청심보혈탕을 처방했으나 별무효과였다. 침과 뜸을 병행했으나 역시 효과는 없었다. 음식을 먹지 못하고 열이 높았다. 오늘날의 의사라면 시간이 해결해주는 충격에 의한 스트레스성 질환이라고 진단했을 것이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압박은 거세어 졌다. 본격 길들이기다. 군량미와 세공미를 보내라는 요구에 식량을 보내주었고 황제에게 바치는 여자를 보내라는 강요에 인물이 고운 각사의 여자 종 10명을 보냈다. 심양을 다녀온 진주사(陳奏使) 홍보가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두 아들의 생명은 내 손안에 있다

"대청국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서로 유시한다. 삼전도에서 그대가 항복할 때 '명나라를 정벌하게 되면 군사 수만 명을 동원시킬 터이니 시간과 장소를 실수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는데 그때 왕이 군사를 낼 수 없다는 말을 했었는가? 지금 징병하라는 유서가 있어도 그대는 끝내 군사를 동원시켜 은혜를 갚겠다는 말은 없으니 강화조약을 저버린 것인가?

최명길이 와서 조선의 사정이 어렵다하여 징병은 시세를 살펴 칙서를 내리겠다고 하였다. 최명길에게 준 칙서에 징병하지 않겠다는 말이 있었는가? 지금 즉시 5천 명을 징발하여 보내라. 짐이 왕을 살려준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니 그대는 은혜로써 갚으라. 또한 그대의 두 아들이 심양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칙서가 아닌 협박이었다. 협박장을 받은 인조는 부랴부랴 임광을 상장으로 임명하고 유림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를 꾸려 청나라로 떠나라 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다. 임광이 임금의 명을 거역하고 면직을 청한 것이다. 항명이다. 명분은 부장 유림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명나라를 치는 군사동원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명나라와 조선은 임금과 신하의 사이로 부자(父子)와 같다. 200여 년을 복종하여 섬겼고 임진왜란 때 왜인을 몰아내 주어 은혜를 입었다. 국운이 지금까지 지탱한 것은 모두 황제의 보살핌이다. 형세가 궁핍하고 힘이 약하여 비록 절의를 지키지는 못하였으나 어찌 감히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침범하겠는가. 이는 정리 상 차마 하지 못하는 바이다. 라는 것이었다. 임광의 생각은 대부분의 사대부들 생각이었다.

임금의 명령을 거역한 장군

다급해진 인조는 임광을 체직시키고 이시영을 상장으로 임명하여 파병했다. 그러나 임광 항명사건은 상장군 하나 대체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후폭풍을 몰고 왔다. 장령 박계영과 유석이 김상헌의 논죄를 들고 나왔다. 수면 아래 잠복해있던 주화파와 척화파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김상헌 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김상헌.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김상헌 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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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은 한때의 이름난 신하로서 성상께 인정을 받아 정치에 참여한 지 10년 동안 가장 많은 성은을 입었으니 화복(禍福) 또한 시종 전하와 함께 해야 하는데 국가의 명운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 산성을 빠져나가 멀리 달아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당시의 일이 대충 안정되었는데도 끝내 성상을 찾아와 뵙지 않았습니다.

편안한 곳에서 쉬며 왕실을 돌아보지 아니한 그는 '절의를 지키는 것이 선비의 도리다. 더러운 임금은 섬기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이론(異論)을 고취시켜 사람들의 뜻을 혼란시켰으니 신하의 의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명예를 구하느라 임금을 팔아먹고 붕당을 세워 국가를 그르친 것이 김상헌의 여사(餘事)일 뿐입니다. 임금을 업신여기고 부도덕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극변으로 위리 안치하소서."<인조실록>

남한산성에서 항전할 때 최명길이 지은 국서를 찢으며 척화를 극렬하게 주장하던 김상헌은 산성이 함락되기 이틀 전 산성을 빠져 나와 가족들이 피난 나가 있던 춘천으로 갔다. 삼전도 항복 이후 김상헌이 안동에 내려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김상헌에게 호종공신으로 표창을 내렸으나 사양했다. 이때 인조는 이렇게 술회했다.

"오늘날 나라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다 시비가 밝지 않은 데 있다. 평소 벼슬이 영화롭고 녹이 많은 때에는 떠나는 자가 없었는데 나라가 위태롭고 망하게 되자 앞 다투어 나를 버리니 누가 동방을 예의의 나라라 하겠는가. 김상헌이 평소에 나라가 어지러우면 같이 죽겠다는 말을 하였으므로 나도 그렇게 여겼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먼저 나를 버리고서 젊고 무식한 자의 앞장을 섰으니 내가 매우 아까워한다."

박계영의 치계가 있자 김상헌을 옹호하는 지평 이해창의 상소가 즉각 올라왔다.

남아있는 자는 설거지 꾼이고 도망간 자가 충신입니다

"김상헌의 청렴과 정직은 사류가 추앙하는 바이고 성상께서 통촉하신 바입니다. 남한산성에서 굴복하던 때를 당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변치 않은 자는 김상헌과 정온입니다. 이미 사수(死守)의 의논을 이룩하지 못하고 또 결사(決死)의 의리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죄를 지은 것으로 자처하여 감히 얼굴을 들고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고 초야에서 죽기를 기약한 것입니다. 유석이 시기를 틈타 모함하는 계책을 삼았으니 참혹합니다. 장령 유석과 박계영을 사판에서 삭제하고 영원히 서용하지 마소서."

"김상헌은 죽으려 한다는 명분만을 취하고 끝내 목숨을 버린 사실이 없으니 천진(天眞)을 지키는 데 이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위급한 조정을 버리고 편안한 곳에서 유유자적한 것은 자신을 버리고 임금의 수레를 따른 자와는 다른데 경들은 지나치게 칭찬하니 이해 할 수 없다. 또한 유석과 박계영이 설령 죄가 있다 하더라도 대간이 논죄할 터인데 어찌 이처럼 도적을 잡듯 하는가? 지금 이 행동은 실로 놀랄 일이다."

불쾌하게 생각한 인조는 이해창의 상소를 반려했다. 하지만 척화파의 반발은 거세었다. 부제학 이목, 응교 홍명일, 수찬 이행우가 상차했다.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의 통의(通誼)입니다. 남한산성에서 나온 조치는 종사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니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때 김상헌과 정온이 남보다 앞장서서 충성심을 발휘하고 기꺼이 자결하려고 한 것은 차마 임금께서 치욕당하는 것을 보지 못하겠기 때문이었습니다.

임금께서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김상헌이 허둥지둥 성으로 들어온 것은 국가가 망하면 함께 죽겠다는 그의 뜻이었습니다. 사수하자는 의논을 행하지 못하고 자결하려는 뜻도 이루지 못하자 기로에서 방황하며 스스로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김상헌이 어찌 존망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에 임금을 버렸겠습니까."

"어찌하여 이처럼 괴상망측한 변론을 승정원은 올렸는가? 여러 승지들의 태도가 괴이하다. 이 계사를 도로 내주어라."

인조의 생각은 단호했으나 신하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사헌 김영조에 이어 예조 판서 이현영이 상소했다.

"남한산성에서 굴복할 때의 광경을 실로 차마 눈으로 바라볼 수 없어 통곡하고 물러나오되 마음이 발끈하여 훌쩍 도망 나온 것은 반드시 부지불각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나온 뒤에는 한편으로 치우친 소견이 종사의 대계와 서로 어긋나 이에 용납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알았으니 차라리 시골집에서 말라 죽을지언정 다시 궁궐에 들어갈 면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인조는 결국 척화파의 협공에 무너지고 말았다.

"김상헌의 논죄가 너무 늦었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무방하다."


태그:#병자호란, #김상헌, #사대부, #최명길, #척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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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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