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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의 퇴진에 대해, 삼성그룹 임직원, 특히 해체가 결정된 전략기획실 소속 임직원들은 '충격'과 '당혹'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중에는 눈시울을 붉힌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나는 슬며시 웃고 말았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짐작했던 그림이 그대로 실현됐기 때문이다. 사극의 예를 들자면, 그건 <용의 눈물>일 것이다. 탤런트 유동근의 걸쭉한 목소리로 상징되는 태종 이방원이 삼성그룹에서 부활한 것 같았다. 마침 KBS2 TV에서 <대왕 세종>이라는 또다른 관련사극을 방영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퇴진', 태종 이방원의 '양위' 떠올리다

<용의 눈물>이나 <대왕 세종> 등에서 엿보이는 '태종 이방원'은 창업주에 이어 조선왕조의 실질적인 설계를 맡은 군주다. 이 '설계'에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대숙청이 수반된다. 형제를 몰아내면서 공신들의 사병을 강제로 혁파했으며, 외척의 전횡을 염려하더니 4명의 처남과 사돈에게 역모의 혐의를 씌워 저승행 티켓을 끊어준다.

이 모든 것은, "내 뒤를 이을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명분이 있기에 후세에 이르러 '사극의 주인공'으로서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들의 안정적인 재위를 위해서라면, 어떤 악평을 들어도 개의치 않겠다는 각오가 있었을 듯하다. <용의 눈물>의 마지막을 보면서 많은 시청자들이 숨을 죽였을 것이다.

"비를 내려주소서", 그 한마디엔 "내 악업엔 다 아들과 왕실, 그리고 국가를 위한다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 그만 내가 제사로써 용서를 빌터이니 하늘은 이제 그만 나를 용서하고 비를 내려달라"는 뜻이 숨어있었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도 이와 똑같은 선택을 했다. 조직적인 배임범죄와 탈세 등의 수많은 악업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그 뒤를 이은 아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 태종 이방원이 '상왕'으로 물러난 그림처럼 그도 '퇴진'을 선택했다.

그뿐일까? 태종 이방원이 하륜이나 이숙번같은 자신의 측근 공신들을 쳐냈듯이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과도 같은 전략기획실의 핵심도 퇴진시켰다. 그 전략기획실은 '해체'의 운명을 걷게 된다.

그러고 보니, 이재용 전무를 CCO에서 퇴진시키면서 '열악한 외국 사업장에서 시장개척 업무'를 맡길 것이라는 그림도 흥미롭다.

<대왕 세종>을 시청하는 분이라면, 요즘 충녕대군이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 최북단 국경지역인 '경성'에서, 여진족과 부대끼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의 삶을 배우고 있지 않나. <대왕 세종>으로서는 충녕대군의 이 경험이 훗날 김종서와 최윤덕의 '4군 6진 개척'으로 빛을 발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정사에는 그가 경성에 유배를 갔다는 기록은 없다.

정사의 기록 여부는 이 글에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왕자가 '열악한 지역에서의 개척 업무'를 직접 체험하면서 훗날 왕으로서 현명한 업적을 쌓는 계기가 된다는 사극의 한 장면을,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 회장도 참고했을 법한 그림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일가에 비판적이었던 인사들은 여전히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죄가 있으면 제아무리 재벌 회장이라 하더라도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왕조의 왕으로서 법 위에 서 있었을지는 몰라도, 이건희 회장은 대한민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이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쇄신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야박해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도 대한민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라. 그 조직적인 배임범죄는 '퇴진'으로 유야무야되는 것일까? 이건희 회장은 끝까지 '태종 이방원' 노릇을 하려는 것 같다.

'상왕'이었지만 주도권 놓지 않은 태종 이방원, 이건희 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퇴진'과 함께, 삼성그룹은 계열사별 전문 경영인의 자율적인 경영을 우선시하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 성격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삼성그룹의 '대표'로는 삼성생명 이수빈 회장이 지명됐다. 그동안 이건희 회장이 폐암 정말진단 등으로 부재중일 때에도 그가 이건희 회장의 대행을 맡은 적이 있다. 삼성그룹 내에서도 이건희 회장을 제외한다면 '의전 서열 1순위'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처럼 초고속 승진의 상징으로 자리잡으며 13년만에 사장직에 오른 인물, 전략기획실의 전신 비서실장으로서 그룹 핵심 수뇌부를 거친 인물, 1997년의 IMF 체제 당시에는 그룹 구조조정위원회의 수장을 거쳤으며, 이건희 회장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주가를 올리는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구단주도 맡았던 인물, 이만 하면 '심복 중에 심복' 아닐까.

언론도, 이수빈 회장의 '회장직'을 사실상의 '명예직'이라는 지적을 남기면서 "이재용 전무를 위한 지렛대"라는 지적을 남긴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한번 '태종 이방원'을 거론할 수 밖에 없다. 공식적으로는 '퇴진', 혹은 '2선 후퇴'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상왕임에도 불구하고, 군사권을 틀어쥐면서 세종의 처가를 도륙내는 숙청작업을 진행했던 적이 있다.

뭘 말할까? 왕위는 아들에게 물려줬을지언정, 실권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의 눈물>을 기억해보라.

당시 세종 역을 맡은 탤런트 안재모가, 아버지가 진행하는 '처가 도륙 작전'에 아무런 이야기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던 모습을 연기한 바 있다. 왕이지만 왕은 아닌 그림, 게다가 현재의 이건희 회장은 현재 세자에게 대권을 전부 물려줄 수는 없는 상황 아닌가. 영의정을 '국왕 권한대행'으로 지명해놓고 배후에서 실권을 행사하는 그림이 연출될 수도 있다.

한참을 건너뛰어 22대 정조 역시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준 뒤에, '군사권을 쥔 상왕'의 자격으로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노론 벽파를 몰아내려 했다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퇴진'이 '퇴진'이 아닐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전문경영인의 자율적인 경영체제를 이야기했지만, 그게 어디 하루 아침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삼성그룹 내에서 이건희 회장이 차지하는 성역과도 같은 위치, 삼성의 범위 밖에 있는 우리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아우구스투스도 '황제'라는 직함으로 로마제국을 통치한 것이 아니다. 그런 직함 따위는 가져본 적도 없었다. 공적으로부터 비롯되는 '권위'와 그것을 영리하게 활용할 줄 아는 연기력으로 로마제국을 통치했다. 이건희 회장, 나름대로 '상등품 위선'의 묘를 발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침, 경제개혁연대도 22일자 논평에서 "차명계좌 명의인의 한 사람이자 1999년 이재용씨의 삼성투신 지분인수 당시 삼성생명의 임원이었던 이수빈씨를 대외적으로 삼성을 대표하는 인사로 지목한 것은 여전히 이건희 회장의 친정체제를 유지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했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이건 <용의 눈물>의 '삼성그룹' 버전이다.

<용의 눈물> '삼성그룹 버전', 최대 수혜자는 이재용 전무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서부터 '특검 수사'에 이르기까지 177일간의 <용의 눈물> '삼성그룹 버전' 최대의 수혜자는 이재용 전무다. 이미 특검으로부터 '무혐의' 처분을 받은데다가, 순환출자구조와 배임혐의로 뒤덮은 그의 지분도 '안전'을 보장받았다.

'열악한 지역에서의 개척 업무'에 대해서도, 눈물을 흘린 임직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눈물 흘릴 이유 하나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조선왕조 최북단 지역에서 열악한 백성들의 현실을 낱낱히 지켜보는 <대왕 세종>의 충녕대군은 어떻게 됐나. 결국 왕위에 올라 32년의 치세를 이어가질 않았나.

훗날 왕위에 오를텐데 그런 고생 정도는 마땅히 거쳐야 하지 않을까? 전략기획실의 모 관계자에 의하면 "이는 이재용 전무 본인의 뜻"이었다고도 한다. 그 역시 뭔가를 아는 모양이다. '치세'를 이어가려면 '실적'과 '경험'도 필요한게 사실이다. 그것이 곧 왕으로서의 권위로 연결될 수도 있다.

앞으로도, 삼성그룹의 행보, 특히 지배권과 관련된 행보를 지켜보려면 '태종 이방원'의 행적에 대해 더 판단해야 할 여지가 남아있다고 생각된다. 10여 년 전의 <용의 눈물>, 어디 다시 볼 수 있는 곳 없을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삼성, #이건희 퇴진, #삼성 해체, #김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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