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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워드의 이자율 관련 공약(空約)을 풍자한 노동당 웹사이트.
 존 하워드의 이자율 관련 공약(空約)을 풍자한 노동당 웹사이트.
ⓒ 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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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18대 총선이 끝나자마자 '뉴타운 후폭풍'에 휘말렸다. 총선의 승리와 패배를 갈라놓은 지역이 서울이고, 총선 공약의 한복판에 '뉴타운'이라는 단어가 넘실거렸기 때문이다.

new town이라는 영어를 직역하면 새 동네다. 기존의 동네 바깥쪽에 새로 조성한 동네인 셈인데, 호주에서는 교외 주택지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오래된 동네를 새롭게 단장하는 걸 뉴타운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막엔 뉴타운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이기심이라는 전혀 생소한 단어가 겹쳐서 떠오른다. 마음속으로는 공동의 선을 옹호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길 수밖에 없는 소시민적 이기심. 바로 그 엄정한 현실이 이번 한국 총선에서 커다란 변수로 작용했다.

그런데 그 골치 아픈 문제에 먼저 맞닥뜨린 나라가 호주다. 결과부터 미리 말하면, 표심을 얻기 위해서라면 악마와 거래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정치인들의 공약(空約)에 깜빡 속았던 호주 유권자들은 다음 선거에서 통쾌하게 복수의 펀치를 날렸다.

2007년 11월 호주 총선 투표소 입구.
 2007년 11월 호주 총선 투표소 입구.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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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늙은 동네가 뉴타운이라고?

그 숙제의 정답을 밝히기 전에 호주 뉴타운의 정체부터 알아보자. 시드니에는 통상 '시티'라고 불리는 시드니시(City of Sydney)가 있다. 도시의 심장부인 CBD(중심업무지구, Central Business District)를 포함한 서울의 4대문 안 같은 곳이다.

거기를 약간 벗어난 곳에 뉴타운이라고 이름 붙은 행정구역이 있다. 그런데 동네 이름만 뉴타운이지 실제로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올드타운 중의 한 곳이다. 서울의 동숭동쯤으로 여겨지는 동네다.

19세기 초에는 이곳이 디바인스 팜이라는 농장이었는데 메리 레비(1777~1855)라는 여성 사업가가 'New Town'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열어 Newtown이라는 동네 이름이 붙게 됐다.

그녀는 사업 이익의 사회 환원 차원으로 여러 교육 기관에 기부금을 전달하고 학교 봉사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빈민 구제 활동도 열심히 하여 현재 호주에서 사용되는 20달러 지폐에 그녀의 초상이 담겨있다.

뉴타운 아방가르드 소극장에서 열린 호주 전통 음악 축제.
 뉴타운 아방가르드 소극장에서 열린 호주 전통 음악 축제.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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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타운의 정신은 여전히 뉴타운

뉴타운 길거리에는 고색창연한 빅토리아 테라스가 있는 2층짜리 건물들이 즐비하다. 내부를 새롭게 수리하고 현대식 간판을 설치한 가게들이 없다면 마치 19세기 도로를 걷는 느낌이 들 정도다.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회 구성원은 자신들의 특성이 담긴 문화를 창출한다. 그런 측면에서 시드니 뉴타운은 상업지구이면서도 예술의 향기가 넘치는 풍모를 지녔다.

뉴타운 바로 옆에 시드니대학교 캠퍼스가 있고 문학인, 화가, 배우들이 많이 거주하는 어스킨빌 또한 바로 옆 동네여서 서점, 소극장, 재즈카페, 스낵바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특히 뉴타운의 소극장과 재즈카페는 시드니의 명물이기도 하다.

저녁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는 '디 아방가르드'라는 소극장의 주인 겸 무대감독인 존 카스를 만났다. 그에게 "늙어빠진 동네의 이름이 뉴타운인 것도 기이한데 거기에 전위(前衛)라는 의미의 극장 이름을 붙인 이유가 뭐냐?"고 따지듯이 물었더니 되돌아온 답변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시드니 서남부 쪽을 가봐라. 새 주택들만 즐비하지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정신은 오랜 과거에 머물러 있다. 반면에 여기 뉴타운 주민들은 비록 낡은 건물 안에서 살지만 아방가르드적인 삶을 살지 않는가? 그래서 정신적인 뉴타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디 아방가르드'의 무대감독 존 카스.
 '디 아방가르드'의 무대감독 존 카스.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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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선과 이기심 사이

이쯤 되면 가히 시적(詩的)이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에겐 자기 자신 및 자신이 속한 단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토대로 근대경제학의 대부인 아담 스미스는 각자의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적정하게 조정되어 시장 질서가 유지된다는 자유방임주의 이론을 주장했다.

반면에 막스 베버는 자기의 잇속만 챙기는 극단적인 이기심이 공생의 질서를 파괴하는 현실사회에서 정부의 시장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공동의 선을 위협하는 개인과 집단의 이기심을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2004년 호주 총선 당시 집권당이었던 자유-국민 연립당이 유권자의 이기주의 심리를 부추겨서 크게 승리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주택 담보 대출(mortgage loan) 이자율과 연계하여 부채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불안한 심리를 자극한 것.

이번 한국 총선에서 뉴타운 건설로 한몫 잡아보겠다는 서민 유권자들의 기대 심리를 한껏 부추긴 한나라당 등 한국의 주류 정당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선거 전략이었다. 경제적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지역의 유권자들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공통점도 발견된다.

'강북 벨트'와 '모기지 벨트'

서울에 '강북 벨트'가 있다면 시드니 서남부 지역에는 '모기지 벨트(mortgage belt)'가 있다. 이는 천정부지로 오르는 부동산 가격에 속병을 앓던 서민·노동자 계층이 무리한 주택 담보 대출에 의존해서(심한 경우는 95% 이상) 자기 집을 마련하여 거주하는 지역을 이른다.

2004년 호주 총선에서 노동당이 집권하면 이자율이 오른다고 주장한 자유당 광고물.
 2004년 호주 총선에서 노동당이 집권하면 이자율이 오른다고 주장한 자유당 광고물.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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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모기지 벨트를 형성하고 있는 시드니 서남부 지역은 전통적으로 노동당의 텃밭이었다. 덜 보수적인 정당에 표를 몰아주었던 서울의 '강북 벨트' 지역과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2004년 10월 총선에서 대이변이 발생했다. 전통적인 노동당 텃밭에서 보수정당인 자유-국민 연립당이 대승을 거둔 것.

4회 연속 집권을 노리던 존 하워드 전 총리가 "노동당이 집권하면 이자율이 오른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주택 담보 대출을 받은 수많은 유권자들을 협박했기 때문이다.

하워드의 말대로 노동당이 집권하여 이자율이 오를 경우 엄청난 경제적 압박을 피할 길이 없던 그 지역 유권자들은 결국 자유-국민 연립당을 선택했다. 울며 겨자 먹기 식의 선택이었다는 지적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진실보다 경제가 우선이라고?

그런데 존 하워드의 공약이 원천적으로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선거 직후에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연립당이 재집권에 성공했음에도 이자율이 3차례나 오른 것. 하워드를 더욱 참담하게 만든 건 글렌 스티븐슨 당시 연방준비은행(Reserve Bank of Australia, 호주의 중앙은행) 총재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었다.

"이자율에 관해서 아무런 권한이 없는 하워드 총리가 총선 기간 내내 사실과 다른 발언을 했다. 현재 호주의 악성 인플레이션 국면을 진정시키려면 이자율 인상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는데도 말이다."

하워드의 선거 공약이 터무니없는 거짓이었다는 게 들통 나고, 연방준비은행 총재의 강도 높은 비판까지 이어지자 호주 언론은 '정치인의 거짓말'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다음은 그 당시에 나온 대표적인 어록들이다.

"하워드 총리를 보라. 현대 사회에선 성공적인 정치를 위해 거짓말도 필요하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정치시스템이 이를 증명한다." (노동당 소속 그래함 리차드슨 전 상원의원)
"물론 진실은 좋은 덕목이다. 그러나 호주의 황금시대였던 1980~1990년대를 망친 노동당 정부를 기억해보라. 진실이 밥 먹여주냐?" (하워드 지지자의 논평)
"호주 국민 35%만 하워드의 말을 믿는다. 그러나 국민들은 정치가로부터 어떤 진실을 원하기보다는 경제안정을 더 원한다." (<시드니모닝헤럴드> 사설)

호주 투표소 안의 풍경.
 호주 투표소 안의 풍경.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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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노동계층의 착각

이와 관련해 호주 정가에 전해오는 논쟁 하나를 소개한다. 존 하워드에게 3번이나 도전했다가 집권에 실패했던 킴 비즐리 전 노동당수가 보수정당의 달콤한 공약에 속아 넘어간 일부 노동자들을 비판하면서 나온 얘기다.

"보수정당은 태생적으로 블루 리본 지역구(부유층 거주 지역)를 옹호할 수밖에 없다. 그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데 무슨 여력으로 노동계층의 이익까지 챙겨주겠는가? 잘못 투표하고 후회하는 일은 이번으로 끝내야 한다."

그러자 존 하워드 당시 총리가 즉각 반격에 나섰다. "오죽하면 노동자들이 보수정당에 표를 찍겠는가? 노동당이 장장 10년도 넘게 집권하면서 정작 박살난 그룹이 노동계층 아니었던가?"

이는 약 10년 전의 호주 정가 이야기지만, 이번 한국 총선을 보며 기자의 머릿속엔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무튼 존 하워드는 "형편없이 무너진 노동계층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보수정당의 경제 우선 정책밖에 없다"는 논리로 서민 지역을 공략해서 12년 동안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존 하워드의 5연속 집권을 저지한 요인 중의 하나가 연방준비은행의 이자율 인상이었다. 선거 기간 중에는 이자율을 인상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2007년 11월 총선 직전에 이자율 인상을 단행한 것.

2007년 11월 호주 총선 현장. '미래를 위해서 투표하자'는 선거홍보물이 보인다.
 2007년 11월 호주 총선 현장. '미래를 위해서 투표하자'는 선거홍보물이 보인다.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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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과 호주 연방준비은행 총재

호주 연방준비은행에 결정타를 얻어맞은 존 하워드는 더 이상 "노동당을 찍으면 이자율이 인상된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반복할 수 없었고, 모기지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서민들도 하워드의 말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한편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2004년 총선에서 존 하워드가 이자율 공약(空約)으로 집권에 성공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 기회 있을 때마다 호주의 이자율 결정은 연방준비은행의 고유 권한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호주 보수정당의 12년 장기 집권은 2007년 11월 총선에서 마감됐다. 노동계층과 서민층이 존 하워드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공약(空約)과 실정에 대한 분노가 깊었던 탓인지, 보수정당의 참패뿐 아니라 현직 총리이던 존 하워드의 지역구 낙선이라는 결과까지 낳았다.

2007년 총선에서 하워드 총리와 맞붙어서 승리한 맥신 맥큐 노동당 후보가 지지자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있다.
 2007년 총선에서 하워드 총리와 맞붙어서 승리한 맥신 맥큐 노동당 후보가 지지자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있다.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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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뉴타운 공약과 호주의 이자율 공약은 사회 상황과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서민층의 기대 심리와 불안 심리를 선거에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많다.

이 대목에서 총선 기간에 보인 서울시장의 행태를 거론하고 싶지만 줄인다. 현대 사회가 개인이기주의에 함몰되어 다함께 흥하는 길이 아닌 망하는 길을 가고 있다고 우려하는 노암 촘스키의 역설적인 절규가 자꾸 귓전을 맴돈다.

"돈 많이 벌어라. 너 혼자만 생각하라!"


태그:#뉴타운, #호주 총선, #이자율, #모기지론, #존 하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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