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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에 계단 밑에서 자유롭게 아기발(Baby foot)이라는 놀이를 하고 있는 학생들.
 쉬는 시간에 계단 밑에서 자유롭게 아기발(Baby foot)이라는 놀이를 하고 있는 학생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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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도 대안학교가 있다. 일반 정규학교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어려움을 겪어 적응하지 못해 갈 곳 없는 학생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대안학교가 파리에도 딱 하나 있는데, 바로 파리자율고등학교이다. 

프랑스의 대안학교는 전국에 4개. 한국의 대안학교와 수적인 면에서 비교도 안될 만큼 적다. 파리자율고등학교 외에 브르타뉴 지방의 셍-나제르, 올레롱 섬, 노르망디 지방의 에루빌 셍-클레르에 하나씩 있다. 이렇게 네 지역에 분포한 이들 학교를 프랑스에서는 '경험학교'라 부르는데, 특이하게도 모두 프랑스 서부에 있다.

프랑스의 경험학교는 모두 1982년에 설립되었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경험학교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피아제·프레네 등 신교육주의자들의 이론을 접합한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도입한 경험학교를 공식적으로 인가한 것은 좌파이던 미테랑 정부였다.

지금은 인기를 얻어 일종의 '명문학교'가 되었지만 파리자율고등학교가 문을 열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수많은 교사들의 투쟁이 없었더라면 공식 인가는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개교 후 1~2년 동안은 교사(校舍)도 없이 한 고등학교의 지하실을 빌려 수업을 해야 했다. 그 후 지금의 작은 교사(파리 남서부 15구)로 옮겼는데, 작은 정원이 딸린 아담한 교사에서 수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교사와 학생 모두 큰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파리자율고등학교 교사와 정원.
 파리자율고등학교 교사와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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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학생이 공동으로 학교 운영... 교사의 한 표와 학생의 한 표는 같은 무게

파리자율고등학교는 230여명의 학생과 25명의 교사로 구성된 소규모 학교이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학교에서는 모든 것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학교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은 투표로 결정되는데, 특이한 점은 교사의 한 표와 학생의 한 표가 같은 무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해마다 이 학교에 입학을 신청하는 학생 수는 250~300명 정도인데, 이 중 매년 100여명을 선발한다. 한국의 고등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스공드 클라스에 75명을 뽑고 자리가 비는 나머지 학년에 25명 정도를 뽑는 방식이다. 경쟁률이 2.5~3대 1에 해당하는 학생 선발 문제도 교사와 학생들이 같이 결정한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학생들을 선발하는 것일까?

우선 학생들이 직접 와서 서류를 제출하고 가면 미니테스트를 한다. 일종의 서류심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읽고 쓰지 못하는 학생들을 거르는 게 주목적이다. 미니테스트에 통과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주관하는 3일에 걸친 연수를 받는다. 교사들과 재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신입생들의 능력과 성격을 관찰하고 자체토론을 거쳐 1차 선택을 한다. 1차에 선택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시 인터뷰를 하는데, 이 관문을 통과해야 입학이 결정된다.

구체적인 선발 기준은 무엇일까? 기자를 맞이한 화학 교사인 안느-마리는 "우선 학생의 지원 동기를 보고 학생이 학교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또 학교가 이 학생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일반 정규학교에서 낙오해 의기소침한 상태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시 학교에 적응하려는 학생들의 욕구를 중요하게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준으로 신입생을 선발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재학생들이 학교생활에서 가장 곤란한 때가 신입생을 선발할 때라고 말할 정도다. 객관적인 수치가 아니라 입학할 경우 맺게 될 상호 관계와 역할 등을 헤아려 판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신입생 선발에서 나이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일반 정규학교에서 오랫동안 낙제했거나 학교를 몇 년 쉬어서 나이가 많은 학생도 이 학교에 들어올 수 있다. 현재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은 대학교를 졸업할 나이인 만 23세.

신입생 선발에도 재학생 참여... "후배 뽑는 게 제일 어려워요"

일단 이 학교에 들어오면 학생은 학교 운영과 관련된 모든 일에 교사와 함께 참여하도록 되어있다. 자율학교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도서관 운영, 구내식당과 카페 운영(식사 준비 포함)은 물론 학교 청소까지 모든 걸 자율적으로 한다.

수업 참가 문제도 대체로 학생 자율에 맡긴다. 이들은 일주일에 40시간의 수업을 받게 되어 있다. 프랑스어, 수학, 영어, 과학, 스페인어 등 정규 과목이 10시간이고 나머지는 테마교육, 특별 활동, 프로제(계획)란 독특한 과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주일에 6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테마교육은 해마다 주제가 달라지는데, 당연히 주제도 교사와 학생들이 같이 의논해서 결정한다. 올해 주제는 콩트, 도시, 르네상스이다. 프랑스 68혁명 40주년인 5월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주제도 다룰 예정이다.

매주 4시간인 특별 활동 때는 축구, 농구, 사진, 음악, 연극, 비디오 클럽, 미술, 수영, 배드민턴, 무용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최대 3개까지 등록할 수 있다. 주당 5시간인 프로제(프로젝트)에서는 주제(여행, 만화영화, 단편영화, 모로코, 등산 등)를 하나 정해 깊이 있게 연구한다. 프로제 수립부터 이행까지 1년 걸린다.

특별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에 이 학교는 일반 정규학교에서 이수하는 과목을 다 가르치지는 않는다. 교육부 프로그램도 일부만 적용한다. 일반 정규학교의 과목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학생들이 자기 안에 감춰진 능력을 스스로 찾아내는 데 특별활동이 매우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이 학교의 또 다른 특징은 튜터 제도다. 한 교사가 10명의 학생을 개별 지도하는 제도다. 이를 통해 학생 발달 과정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1학년 과정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아직은 서로 모르는 상태임을 감안해 임의로 튜터를 정하지만, 2학년 과정부터는 학생 스스로 원하는 교사를 튜터로 지정할 수 있다. 학생은 학기 초에 교사 3명을 지정하는데, 학교에서는 지나치게 겹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학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매주 화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학생들이 유일하게 의무적으로 참가하도록 되어있는 베이스그룹(Base Group) 시간에는 3명의 튜터와 30명의 학생이 모여 1주일 동안의 학교 운영 관련 사항과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 토론한다. 이후 각 그룹의 학생 대표 2명과 교사 대표 2명이 다시 모여 2차 회의를 하는 식으로 학교 운영에 관한 모든 결정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가 학생들에게 다시 전달되는 형식이다.

재학생들이 첫손에 꼽는 학교의 장점은 자유이다. 고등학교에서 수업 참가 문제를 기본적으로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건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나 프랑스 속담대로 '모든 메달에는 이면이 있다'. '수업 참가 여부 자율 결정'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해 수업에 전혀 참가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이 생길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실제로 학기 초에 붐비던 교실이 학년 말에 이르면 드문드문 비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학교 쪽에 대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튜터 시스템을 이용하여 교사가 수업 참가가 지나치게 적은 학생에게 경고를 주기도 한다. 아울러 학생들 스스로 제재하는 경우도 있다. 그룹 차원에서 수업이 이루어지는 경우, 예를 들어 발표하기로 한 학생이 수업에 나오지 않으면 다른 학생에게도 피해가 가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의 수업 불참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프랑스어 시간. 수강생은 전부 7명이다(사진에 담지 못한 학생이 2명 더 있다).
 프랑스어 시간. 수강생은 전부 7명이다(사진에 담지 못한 학생이 2명 더 있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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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동의 없이는 낙제도 없다

파리자율고등학교엔 낙제가 거의 없다. 이미 일반 정규학교에서 낙제의 쓰라린 경험을 많이 해본 학생들이기에 낙제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지 않기도 하고, 낙제한 후 같은 과정의 수업을 한 해 더 들은 경우 성적이 나아지는 경우가 적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학교의 낙제 제도에서 특이한 점은 학생 스스로 낙제에 동의해야 낙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교사는 낙제시킬 필요성이 있는 학생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1, 2학년 과정에서는 낙제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3학년 중에서는 대학입학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기 위해 몇 년을 낙제해가면서 다니는 학생도 있다.

이 학교의 바칼로레아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3학년 학생 80명 중 바칼로레아에 응시하는 학생 수가 30명 정도인데, 바칼로레아를 위한 수업이 다른 정규학교보다 적기 때문에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교사의 도움이 필요한 학생에게는 교사가 언제든지 도움을 준다. 이들 중 30~35%의 학생들이 바칼로레아를 통과한다. 일반 정규학교의 합격률이 80%인 것에 비하면 저조한 성적이다.

그러나 파리자율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중 많은 수가 대학 입학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고 있다. 이 학교의 목적이 각자 원하는 직업을 얻는 것이므로 굳이 대학 교육이 필요치 않은 직업을 원할 경우 대학 입시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안느-마리 선생은 졸업생 중에 지붕을 이는 일꾼이 된 청년이 있는데 자기 직업에 아주 만족해서 살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요새 집 짓는 노동자가 부족한 프랑스에서 이 직업은 아주 좋은 직업이라며, 안느-마리 선생은 '대학 교육을 안 받으면 설 자리가 없다'는 사회의 편견을 깨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학 입시교육이 아니라 자신감을 지니게 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기자는 이 학교 학생들의 참여정신과 자립성을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안느-마리 선생, 마리옹 선생과 인터뷰를 끝내고 수업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10여분 기다리는 동안 교내를 둘러보기 위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침 쉬는 시간이어서 많은 학생들을 복도에서 마주칠 수 있었는데 하나같이 기자에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누구를 찾으시나요?" 등을 물어왔다. 다른 학교에서라면 자기 일 아니라고 그냥 지나쳤을 것 같은데, 이곳 학생들은 외부인임이 분명해 보이는 기자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주려 했다.

인터뷰에 응해준 화학 교사 안느-마리(왼쪽, 25년 근무)와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마리옹 선생(3년 근무).
 인터뷰에 응해준 화학 교사 안느-마리(왼쪽, 25년 근무)와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마리옹 선생(3년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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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교사 임용도 동료 교사들의 토론으로 결정

프랑스 교육부는 현재 경험학교 신설 인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경험학교에 근무하는 많은 교사들(교육부 소속 정식 교사로서 희망자는 경험학교 부임을 신청할 수 있으며, 기존 교사들의 토론으로 신규 교사 임용을 결정한다)이 이런 대안학교를 더 많이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초등과정에서 자율교육의 하나인 프레네 교육을 실시하는 교사들은 학생들이 자율중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하지만, 현재 프랑스에는 자율중학교가 없다. 이미 자율교육을 받은 초등학생들도 일반 중학교로 진학할 수밖에 없는데, 교육과정이 상당히 달라,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학생이 많다고 한다. 자율고등학교도 프랑스 전역에 겨우 4개만 있을 뿐이다.

프랑스 교육부는 왜 더 자율학교를 허가하지 않는 것일까? 자율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들은 이렇게 입을 모은다. "현재 교육의 목적은 복종하는 사람을 길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적 제약에서 해방될 수 있는 인간 교육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율학교를 정치인들이 반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왜 25년 전에는 네 학교를 허가한 것일까? 소수의 마이너리티를 인정해 사회에 작은 숨통을 틔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게 자율학교 교사들의 생각이다. 대다수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작은 자유는 허용한다는 관대한 태도를 당시 사회당 정부에서 보여줬다고 이들은 말한다.

도서실에서 자유롭게 공부하는 학생들.
 도서실에서 자유롭게 공부하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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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대안학교, #파리자율고등학교, #미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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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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