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혹자는 말하기를 ‘서울에는 궁궐 보러, 경주에는 무덤 보러’ 간답니다. 도시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대릉원을 비롯하여 경주를 포위하듯 무덤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황금빛 무덤들만 눈에 들어온다고 하니, 분명 경주는 고분의 도시입니다.

 

대릉원이나 오릉처럼 밀집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야트막한 산자락, 경치 좋고 햇볕 잘 드는 곳에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수가 워낙 많다보니 하루 이틀 사이에 다 둘러보기란 사실상 어렵습니다.

 

그나마 불국사, 석굴암, 박물관 등 경주의 핵심 여행지를 돌다 짬이 나면 들르는 ‘양념’에 불과해, 기껏해야 천마총이 자리한 대릉원 정도가 고분 여행의 전부입니다. 넓은 주차장이 확보돼 있는 데다 첨성대, 계림, 월성 등이 코앞이어서, 특히 학생들의 수학여행에는 단골 코스입니다.

 

그러나 휴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문화유산과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애써 경주를 찾아온 거라면, 시내와 교외에 지천인 고분을 둘러보는 것은 경주 여행의 백미라고 감히 자부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여느 곳에서는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색다른 맛과 멋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샅샅이 뒤져보고 싶지만 여건상 그럴 수 없다면, 이 세 곳만큼은 꼭 들러보기를 권합니다. 경주의 수많은 고분들의 다양한 형태와 느낌을 압축적으로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해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까지 만끽할 수도 있습니다.

 

틈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아무런 꾸밈도, 내세움도 없이 나란하게 줄 선 무덤 세 봉우리가 따스한 햇볕을 받고 있는 곳, 바로 삼릉(三陵)이 그 첫 번째입니다. 남산 아래에 위치한 삼릉은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무덤입니다.

 

상석이 봉분의 크기에 비해 매우 작고 비껴나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재 안내판도 울타리 너머 멀찍이 세워져 있어 바라보는 데 전혀 거슬리지 않습니다. 남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이어서 사랑을 가득 받을 법도 하건만, 무심한 등산객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소박한 고분입니다.

 

또, 바로 옆에 아담한 봉분 하나가 덤인 듯 자리하고 있으니, 신라 말 후백제의 견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애왕의 무덤입니다. 무덤 주인의 슬픈 사연 탓인지, 소나무 숲에 부딪히는 바람소리조차 처량합니다. 삼릉 주변이 차분하다 못해 고요하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모양입니다.

 

 

두 번째로 들를 곳은 시내에서 불국사 가는 도로 변에 있는 신문왕릉입니다. 신문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고 당 세력을 축출한 문무왕의 아들입니다. 천 년 제국 신라를 굳이 양분한다면, 신문왕으로부터 후반부가 시작된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신라 전성기의 기틀이 다져진 시기입니다.

 

튼실해진 신라를 상징하듯 신문왕릉은 이전의 무덤들에서는 볼 수 없는, 호석(護石)이라는 장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호석이란 봉분의 가장자리에 돌을 다듬어 쌓은 석축을 지탱하는 돌을 말합니다. 일정한 크기로 반듯하게 다듬어 세운 까닭에 왕릉다운 자못 당당한 품격이 느껴집니다.

 

 

잔디가 곱게 깔린 넓은 터에 왕릉을 향해 고개 숙인 몇 그루의 소나무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시원한 눈맛을 주는데, 그가 남긴 업적으로 미루어 보건대 신문왕 살아생전의 성품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권위적이면서도 뽐내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왕릉의 모범이라 할 만합니다.

 

삼릉에서 소박하고 평범한 멋을, 신문왕릉에서 위엄을 갖춘 단순함을 맛보았다면, 세 번째로 찾을 괘릉은 수많은 무덤들이 지닌 다양한 멋과 아름다움을 하나로 집약해 놓은 결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무덤 하나만으로도 여느 관광지 수십 곳이 부럽지 않을 만큼 풍부한 볼거리와 흥미진진한 얘깃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찾아가는 길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4차선 도로를 벗어나 무덤 입구까지 500미터 남짓 시멘트 포장길을 더 들어가야 하는데, 잘 생긴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어 차에서 내려 걸어봄직한 멋스러운 길입니다. 서 있는 모양새를 보면 무덤을 지키는 호위 무사들 같습니다.

 

무덤 입구 대문에 들어서도 봉분이 보이질 않습니다. 으레 입구의 정면에 봉분이 자리하기 마련인데, 20여 미터를 더 가 왼편으로 꺾어야 비로소 왕릉 영역입니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라는 듯 숨고를 짬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에는 경주의 여느 무덤에서는 볼 수 없는 석상들이 봉분을 향해 가로수마냥 세워져 있는데, 정교한 조각 기술도 놀라우려니와 석상마다 상상해볼 수 있는 얘깃거리가 많아, 이곳 괘릉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우선 맨 앞 양 옆으로 이국적인 모습에 무서운 얼굴을 한 무인상 한 쌍이 서 있습니다. 움푹 들어간 눈매에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독특한 옷차림 등은 우리와 사뭇 다른 모습인데, 흔히 서역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뒤로 공손하면서도 근엄한 모습의 문인상 한 쌍이 서 있습니다. 얼굴이 둥글넓적한 것이 영락없는 우리나라 사람인데, 옷 주름이 종이에 선 긋듯 자세히 표현돼 있어 당시의 의복 문화를 보여주는 소중한 사료입니다.

 

어떤 이는 문인상으로 표현된 신라의 귀족 계급이 서역인들을 용병처럼 부렸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목청 높이지만, 어쨌든 당시 신라가 바닷길을 통해 다른 나라와 활발하게 교역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석상들 중 압권은 단연 네 마리의 사자입니다. 수호신으로서 사자의 위엄은 온데간데없고 장난기 가득한 천연덕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 짓게 합니다. 통돌을 떡 주무르듯 한 석공의 해학을 그대로 담고 있어 무덤의 스산한 분위기를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특히 봉분을 향해 고개를 돌린 돌사자는 무덤 주인에게 농을 거는 듯 이빨을 드러내고 씨익 웃고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봉분 역시 화려합니다. 봉분을 감싼 호석에는 십이지신상을 정교하게 새겨놓았고, 그 바깥에 돌난간을 세워 장식성을 더했습니다. 신라 절정기 때의 양식으로, 이 괘릉은 신라의 것들 중 가장 화려하고 완벽하게 보존된 왕릉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덤 주인은 원성왕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굳이 괘릉(掛陵, 곧 매달아놓은 무덤)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본래 이곳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수면 위에 시신을 넣은 관을 매달아 안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봉분 뒤쪽 석축 아래에 성곽의 해자 같은 물길이 만들어져 있어 이채롭습니다.

 

남산 자락의 삼릉에서 신문왕릉을 거쳐, 넓고 화려한 괘릉까지 차분하게 돌아보자면 족히 한나절은 걸립니다. 더욱이 삼릉은 햇볕이 아직 힘을 받지 않은 아침에 가야 고즈넉한 정취를 맛보기에 좋고, 신문왕릉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해가 중천에 뜬 한낮에 가야 확 트인 시원함을 느낄 수 있으며, 괘릉은 서산에 걸린 비스듬한 햇볕이 석상들의 표정을 깨우는 늦은 오후가 찾기에 제격이니, 이래저래 하루는 필요한 셈입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 21일부터 23일까지, 3일간 다녀왔습니다. 

삼릉에서 만난 한 경주 토박이 아저씨가 말씀하시기를, '천년 고도 경주의 진정한 멋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애써 무덤을 찾아간다'고 했습니다. 늘 그렇듯 빠듯하게 굴러가는 (천년 고도 경주 여행이 아닌) '경주(競走) 여행'에 여유를 찾으라는 얘기처럼 들렸습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신라 고분 여행, #삼릉, #신문왕릉, #괘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