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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왼쪽으로 보이는 작은 석탑이 나옹의 다비식이 있었던 장소이다.
▲ 신륵사 강월헌의 일출.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왼쪽으로 보이는 작은 석탑이 나옹의 다비식이 있었던 장소이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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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넘이를 맞이한 절집은 '그윽함' 그 자체였다. 나들이객마저 떠난 뒤라 경내는 풍경소리 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그러한 절집 한귀퉁에 앉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고요함으로 다가오는 그 시간, 흔들리는 것은 풍경과 인간의 옅은 심성뿐이었다.

물향 짙은 신륵사, 천년의 세월로 숱한 아픔 견뎌

나는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을 양 손으로 가린 채 불성이 깃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불성은 번번히 나를 지나쳐 봉미산 자락으로 혹은 여강변으로 내달렸다. 지난 달 24일 저녁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 저녁 너른 여주 땅을 굽어보고 있는 절 하나 있었다. 여주군 북내면 여강변에 위치한 신륵사. 화성에 있는 용주사의 말사로 이름이 올려져 있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절집이라 찾는 이들이 많다. 내가 찾은 그날도 마침 휴일이어서 절집 산책에 나선 이들이 제법 있었다.

신륵사는 깊은 어느 절처럼 산 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기암절벽에 기대앉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질거리는 고개를 몇 번이나 올라야 만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그저 강변으로 난 평지의 길을 산책하듯 따라가다보면 만날 수 있는 절이 신륵사이다. 그래서인지 신륵사는 산향보다 물향이 더 짙다.

신륵사는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은 유서 깊은 절집이다. 원효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 또한 확실하지는 않다. 창건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신륵사는 그런 이유로 그 신비감이 더 한 곳이다. 오랜 세월 여주 사람들의 삶을 지켜 보았을 신륵사는 그 숱한 사연을 가슴에 묻고 산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신륵사를 보면 명당 터에 앉아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절 집은 아늑하다. 두 손을 편 모습으로 절 집을 감싸고 있는 봉미산은 신륵사를 지켜낸 산 증인이다. 그와 함께 신륵사의 현재와 과거를 지켜본 여강은 신륵사를 거쳐간 스님들에겐 도반과도 같은 존재이다.

신륵사를 오고 간 사람들은 절 마당에 있던 조포나루를 통해 떠나고 돌아왔다. 목은 이색과 나옹선사는 배를 띄우지 않고 결국 신륵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양으로 혹은 개성으로 떠나던 세곡선도 조포나루에서 다리쉼을 하고야 이포나루로 가던가 흥원창이 있는 은섬포로 떠났다. 신륵사 앞을 빈번하게 오가던 배들은 팔당댐이 들어서면서 물길이 끊겼다.

혼탁한 세상을 깨우는 소리를 낸다.
▲ 절집에 걸려있는 목탁. 혼탁한 세상을 깨우는 소리를 낸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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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느린 걸음은 강물의 속도를 닮았다.
▲ 강변을 산책하는 스님. 스님의 느린 걸음은 강물의 속도를 닮았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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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출발한 이명박 정부는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강에 운하를 만들겠다며 야단이다. 소금배와 황포돛배가 다니던 옛날 추억을 되살리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륵사는 강변에 운하 반대를 알리는 대형 현수막을 걸어 놓고 정부 정책과 다른 길을 간다.

나옹선사 "그대 무겁지 않은가, 탐욕도 성냄도 벗어 놓게"

신륵사가 운하를 반대하는 이유는 운하를 만들었을 때 홍수가 나면 신륵사가 물에 잠길 수 있다는 것이다. 천년의 세월이 운하라는 풍전등화 앞에서 떨고 있는 시간. 봄햇살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털이 보송보송한 버들강아지를 강변 가득 피워놓았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나옹선사 '선시'

탐욕도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고 노래한 나옹선사. 나옹이 살았던 세상이나 현세나 탐욕으로 가득찬 모습은 비슷하다. 청산과 창공은 말도 없이 티도 없이 살라하지만 어느 세상이나 그 일을 벗어 두기엔 유혹의 끈이 질기고도 강하다.

신륵사(주지 세영스님)에 가면 신륵사보제존자석종인 '무욕'을 노래한 나옹선사의 사리탑(보물 228호)이 있다. 봉미산의 중앙에 자리잡은 사리탑은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으며 신륵사의 살아있는 정신이다. 한눈에 봐도 명당 중의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는 나옹선사의 사리탑은 나옹이 입적한 지 21년 후인 고려 우왕 5년 1397년에 세워졌다. 지금으로부터 629년 전의 일이다.

목은 이색 "군자는 자기 집부터 바로 잡아라"

사리탑 옆에 있는 탑비의 비문은 목은 이색이 썼다고 알려진다. 경상도 영해 사람인 목은은 고려말의 대문장가로 신군부의 수장인 이성계의 부름을 거절하고 신륵사에 머물다 1396년 숨을 거두었다. 일부 자료엔 이색이 그 해에 신륵사로 향하던 중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진위는 알 길이 없다.

작은 병에 샘물을 담아가지고
깨진 그릇에 노아차를 달이네
귓불에 청정한 기운이 돌 때
코에서는 신선의 자하를 보노라
별안간 눈에 어른거리는 것이 사라질 때
밖의 경지는 조그만 티도 없구나
혀로 차맛 음미하여 삼키니
뼈와 살이 참으로 달라지는 듯
영대의 아주 작은 당이라도
교교하게 밝아 사기邪氣가 없구나
어느 차가에 천하에 이 기운 미치리
군자는 응당 자기 집을 바로 잡아라
- 목은 이색의 시

나옹선사는 당시 고려왕실의 왕사로서 양주땅에 있는 회암사 주지로 있었다. 그는 고려 우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1376년의 일이다. 갑작스런 일이었고 그의 나이 57세, 법랍 38세였다.

나옹은 쓰러져가는 불교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시도했던 인물로 인도승려 지공화상을 스승으로 삼았다. 조선왕조의 왕사가 된 무학대사는 나옹의 제자가 된다. 이들의 영정은 신륵사 조사당에 모셔져 있다.

석종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엿보인다.
▲ 나옹선사 사리탑. 석종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엿보인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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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이 탑비를 썼다.
▲ 나옹선사 사리탑비 목은 이색이 탑비를 썼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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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의 다비식은 여강변의 바위 위에서 진행했다. 연화대 역할을 했던 바위엔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는 작은 석탑이 세워져 있다. 석탑 옆에는 태초부터 꼭 그 자리에 있었던 듯 멋스러운 정자가 하나 있다.

나옹이 열반한 신륵사, 아직 그 정신은 살아있어

정자의 편액엔 강월헌이라 적혀있다.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이다. 그렇다면 신륵사가 밀려드는 전화의 기운을 피하며 천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나옹의 정신이 면면히 살아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강월헌에 앉아 금빛으로 젖어드는 여강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노을을 받은 여강 물빛은 찰라의 시간에도 몸을 뒤채며 더욱 짙어갔다. 대지를 밝혔던 태양은 또 하루를 이별하고, 먼 이국땅으로 흘러갔다. 물질을 하던 청둥오리들도 잠을 청하는 시간, 여강은 검붉게 변해 가더니 이내 어둠에 잠겼다.

경내의 숙소로 걸음을 옮기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강월헌을 바라보았다. 나는 세존을 발견하기라도 한듯 '아!'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았다. 먼 산등성이 위로 솟아 오르던 둥근 달이 강월헌 지붕 꼭대기에 앉았을 때는 내가 마치 나옹선사라도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나는 나옹선사가 그러했듯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강월헌으로 갔다.

강월헌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니다. 나는 십 수년 전의 어느 여름날에도 강월헌에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으며 걸어서 신륵사에 도착했을 때는 하늘에 비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는 강월헌에 앉아 준비해온 한 되들이 소주병을 따 병나발을 불었다.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었지만 당시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시절을 견뎌내지 못하고 정신병자가 되었거나 은둔자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때도 내 곁엔 나옹이 있었다. 그랬다.

강월헌 난간에 앉은 나는 불어오는 바람의 흔들림을 느꼈다. 풍경소리는 먼 곳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고 여강은 달빛을 받아 여여히 흐르고 있었다. 나옹선사의 육신이 한 줌의 재로 남았던 자리에 세워진 석탑은 달빛을 받아 옅게나마 광채를 냈다. 그 순간 나는 석탑이 나옹이라고 생각했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나옹의 표정은 맑아 보였다. 바람도 잦아든 시간,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옹이 여강에게 뭐라고 물었다. 여강은 나옹의 물음에 뭐라 대답했다. 다시 나옹이 묻고, 여강은 답을 하고…. 물욕의 때가 잔뜩 낀 나 같은 인간에겐 귓전을 아무리 씻는다 해도 그들의 대화는 들려오지 않았다. 전설 같고 옛날 이야기 같은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극락보전 내부 대들보에 나옹화상의 필적이라 구전되어 오는[천추만세千秋萬歲]라는 현판이 걸려져 있다. 보전 앞에 있는 것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층석탑이다.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비슷한 형태의 탑이다.
▲ 신륵사 극락보전. 극락보전 내부 대들보에 나옹화상의 필적이라 구전되어 오는[천추만세千秋萬歲]라는 현판이 걸려져 있다. 보전 앞에 있는 것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층석탑이다.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비슷한 형태의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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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다층석탑에 새겨진 용조각. 섬세하면서 화려한 기법으로 마치 용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 용조각. 신륵사 다층석탑에 새겨진 용조각. 섬세하면서 화려한 기법으로 마치 용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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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구운 벽로 쌓은 탑이며, 안동 등의 지역에 몇 기만 남아 있는 탑이다. 여강을 굽어보는 탑으로, 탑돌이를 하는 이들이 사진에도 보인다.
▲ 신륵사 다층전탑. 흙으로 구운 벽로 쌓은 탑이며, 안동 등의 지역에 몇 기만 남아 있는 탑이다. 여강을 굽어보는 탑으로, 탑돌이를 하는 이들이 사진에도 보인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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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에서 아침을 맞았다. 범종소리는 벌써 들었으나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이른 시간 공양을 해야 하는 절집의 생활을 따라하기엔 현대인의 삶은 게으르다. 눈꼽도 떼지 못하고 공양간으로 갔다. 전날 저녁의 식단은 카레밥과 김치였고, 아침은 쌀밥에 배추국을 끓였다. 전날 마신 곡차 기운이 배추국 한 그릇으로 씻겨진다.

세상은 다시 탐욕으로 들끓고, 그 유혹은 내 귓전을 어지럽힌다

공양을 마치고 나오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강월헌으로 갔다. 간밤 둥근 달이 떠 오르는 모습과 흡사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태양은 강렬한 빛을 내며 어둠이 만들어 놓았던 서리꽃을 녹여냈다.

잠에서 깬 청둥오리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 세상은 다시 탐욕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해가 뜨기 무섭게 인간들의 걸음은 다시 바빠졌다. 속도를 잴 수 없는 발빠름은 성냄과 은밀함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그 유혹은 내 귓전을 끊임없이 넘나 들었다.

아침 공양을 끝내자 주지스님은 길을 떠났다. 객만 남아 있기엔 절집이 크게 느껴졌다. 나도 떠나야 했다. 빈 절로 남을 신륵사는 오래전에도 그러했듯 온갓 유혹을 견뎌내며 흔들림없이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나옹선사가 있지 않던가.

떠나는 자를 배웅하는 것은 봉미산 자락에서 만들어낸 바람. 등으로 느껴지는 바람을 돛 삼아 나도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주문을 나섰다.

비행운이 신륵사 창공에 만들어졌다.
▲ 신륵사의 노을. 비행운이 신륵사 창공에 만들어졌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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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신륵사, #나옹선사, #여주, #봉미산, #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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