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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 건립되었으며 마포구 망원동에 있다.
▲ 망원정. 조선 초기에 건립되었으며 마포구 망원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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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정은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별장으로 210여 년 전. 1424년에 건립되었다. 세자 문종을 대동하고 양화진에서 주화질여포를 발사하며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참관한 세종이 형의 별장을 방문하여 희우정(熹雨亭)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그 후 월산대군의 별장으로 이용되던 망원정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명나라 사신 접대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망원정 주변에는 청군의 지휘소가 설치되었다. 소현세자의 군막도 바로 주변에 배당받았다. 군막을 나와 바라보니 무악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건국초기. 한양천도를 놓고 개국공신들이 치열하게 논쟁했던 무악산. 인왕 주산을 추천한 무학대사와 북악산을 주장하는 정도전 사이에서 무악산을 천거했던 하륜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태종이 못내 아쉬워했던 곳이 무악산 명당이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하여 지은 것이 연희궁이다.

세종대왕이 형님의 별장을 방문하여 내린 편액이다.
▲ 희우정. 세종대왕이 형님의 별장을 방문하여 내린 편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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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악산을 강력히 추천했던 하륜은 수운이 좋아 부국강병의 터전이 되고 상암들에 10만 군사를 모으면 요동을 호령할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허나, 요동을 장악한 청나라 군사가 상암들을 점령하게 되었으니 아이러니하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 대군이 주둔했던 터에서 올림픽을 치르고 월드컵을 치러냈으니 잠실과 상암은 사람을 모으는 땅인가 보다.

“세자는 부왕께 하직 인사를 하고 오시오.”

무악산을 바라보며 나라의 장래를 고민하던 선인들의 지혜를 떠올리고 있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도르곤 이었다. 서두르는 것으로 보아 북행길이 가까웠나 보다. 소현세자는 채비를 갖춰 창경궁으로 향했다. 세자 일행은 용골대와 마부대가 선도했으며 역관 정명수가 따라 붙었다. 세자가 대궐에 도착했다. 영의정 김류와 좌의정 홍서봉이 영접했다.

“전하, 부디 옥체를 보존하소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소현세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을 잊지 말아라.”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세자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임금과 세자는 더 이상 말이 없었지만 피를 토하는 오열이 오고갔다.

“세자는 일어나시오.”

역관 정명수가 끼어들어 찬물을 끼얹었다.

“조선은 폐하와 한 약조를 잊지 마시오.”

용골대가 눈알을 부라렸다. 수항단에서 행한 강화조약을 착오 없이 이행하라는 것이다.

“이제 두 나라는 이미 부자(父子)의 나라가 되었으니 무슨 말인들 따르지 않겠소. 가도를 공격하고 남조(南朝)를 공격하는 것은 오직 명령대로 따르겠소.”

영의정 김류가 주억거렸다.

“황금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한(汗)에게 아뢰어 감면하게 해 주시오.”

“본국에서 결정한 것을 내가 어찌 용 장군에게 말하며 용 장군은 또한 어찌 감히 폐하께 말할 수 있겠습니까?”

홍서봉의 청을 역관 정명수가 가로 막고 나섰다.

“세자는 무얼 하시오? 빨리 일어나지 않고...?”

정명수의 재촉이 거듭되었다. 소현세자는 양화당을 물러 나왔다. 소현이 말에 오르려는 순간, 영의정 김류가 말 잔등에 거만스럽게 앉아 있는 용골대에게 다가갔다.

“내 딸 아이가 포로로 잡혀 있는데 속바치고 돌아오게 해주면 천금을 주겠소.”

이 때 영의정 김류 첩의 딸이 청군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이로부터 청나라에 잡혀 있는 포로들의 속환 값이 뛰어 올랐다. 무슨 말인지 몰라 용골대와 마부대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김류는 역관 정명수를 껴안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제 판사(判事)와 우리는 한 집안이니 공(公)이 청하는 바를 내가 어찌 따르지 않으며 내가 청하는 것을 공이 차마 거절하겠는가? 내 딸이 속바치고 돌아오는 일에 힘써주시오.”

정명수가 김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가소롭고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조소를 흘리며 정명수가 돌아섰다. 김류가 정명수를 붙잡고 애원했지만 명수는 옷을 뿌리치고 말에 올랐다. 종종걸음으로 정명수의 말고삐를 잡은 김류는 애걸하는 모습으로 매달렸다.

한심스러운 영의정이다. 영의정은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이다. 조국을 배반한 역관에게 공(公)이라니 쓸개도 없고 채신도 없는 영상대감이다. 명나라에 사대하는 것은 이마에 피가 나도록 하면서 국가에 대한 개념이 없는 영의정. 이러한 부류들이 사대부라는 이름으로 조선 지도층에 있었으니 청나라 황제에게 임금이 치욕을 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창경궁 영화당 앞에 있는 고목은 영의정의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 창경궁. 창경궁 영화당 앞에 있는 고목은 영의정의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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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김류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현은 성중에 있을 때 협수사 유백증(兪伯曾)의 상소가 거짓이 아닌 것만 같았다.

“김류는 장수와 정승을 겸하여 뇌물이 폭주하여 저택이 크고 사치스러운 것은 광해조 때의 삼창(三昌 박승종ㆍ유희분ㆍ이이첨)이라도 그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말고삐를 세자저하께서 붙잡고 산성에 이르실 때에도 김류의 피난 짐바리는 60여 필이나 되고 부인은 가교(駕轎)를 탔습니다. - <연려실기술>

세자의 말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하들이 재갈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세자가 말을 멈추고 한참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신하들의 통곡소리가 대궐을 울렸다.

“빨리 움직이지 않고 세자는 뭐하는 것이오?”

정명수의 고함소리를 듣는 순간, 신하들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만 같았다. ‘역관 따위가 세자저하에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분노에 찬 얼굴로 명수를 쳐다보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정명수의 채찍이 날아왔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명수의 말고삐를 붙잡고 애걸하던 김류는 쏜살같이 줄행랑을 쳤다.

정명수는 조선 사람이다. 평안도 은산에서 천출의 아들로 태어난 정명수는 은산현 관아에서 하인 노릇을 했다. 평산 현감 홍집에게 곤장을 맞은 일로 인하여 관리들에게 적개심이 강했다. 광해군 때 강홍립 장군의 군대를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포로로 잡힌 그는 세작 노릇을 충실히 수행하여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역관 신분으로 조선에 출정한 그는 청나라 사람들보다도 더 조선 사람을 괴롭히고 행패가 심했다.

세자가 하직 인사 하러 들어오기 전, 며칠 째 창경궁은 술렁거렸다. ‘세자를 호종하는 사람으로 누구를 보내냐?’ 하는 눈치 바람이 대궐을 감쌌다. 줄줄이 사직 바람이 불었다. 임금이 삼전도에서 항복하기 이틀 전, 의미는 다르지만 예조판서 김상헌이 사직하고 출사하지 않고 있다.

세자를 호종하여 대신들이 인질로 따라가야 한다는 의논이 있을 때, 우의정 이홍주는 연로하다는 이유로 물러났다. 강화조약에서 ‘대신들의 아들이 볼모로 간다’ 라는 첫째 조항이 확정되자 호조판서 김신국은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로 물러났다. 결국 세자를 호위해 따라 나선 사람은 남이웅, 이시해, 박황, 이명웅, 박노, 이회, 민응협, 정뇌경과 익위사(翊衛司) 관원 3명이었다. 이들 중에는 대신들의 자제는 한 명도 없었다.


태그:#망원정, #창경궁, #김류, #소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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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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