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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6월 10일자 <조선> <동아>에 실린 4·19관련 주요 단체들의 '3선개헌 지지 성명서'. 나흘 뒤 국회에서는 3선개헌안이 날치기 통과됐다.
 1969년 6월 10일자 <조선> <동아>에 실린 4·19관련 주요 단체들의 '3선개헌 지지 성명서'. 나흘 뒤 국회에서는 3선개헌안이 날치기 통과됐다.

지난 1969년 9월 10일자 <조선>·<동아>에 정말 놀라운 광고가 실렸다. 4월혁명동지회, 4·19유족회, 4·19중앙회 등 4·19관련 3개단체 회장 명의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하던 '3선개헌'을 지지하는 성명서였다.

"경제사회건설의 도약대에 막 올라서려는 이러한 중차대한 시기에 처하여 박 대통령에게 좀더 이 나라를 계속 영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허용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심정이요 신념이다."

하지만 이틀 뒤인 9월 12일자 <동아>에 또다른 광고가 실렸다. 이휘재 4·19유족회 회장의 '개헌 결사반대'라는 제목의 성명서였다. 그러나 이미 이틀 전 <조선>·<동아>에 실린 '3선개헌 지지' 성명서에도 이 회장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박정희에게 나라를 더 맡겨야"... 4·19정신에 반한 3선개헌 지지 성명

1969년 9월 10일자 <조선>·<동아>에 실린 '3선개헌 지지' 성명서는 그 주체가 4·19관련 주요 단체들이었다는 점에서 자못 충격적이다. 4·19혁명으로 세워진 민주정부를 탱크와 군홧발로 뒤엎은 5·16 군사쿠데타의 핵심인물이 바로 당시 3선개헌을 추진하던 박정희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당시 3선개헌 지지 성명서 내용을 살펴보자. 최경열 4월혁명동지회 회장, 이휘재 4·19유족회 회장, 추은석 4·19중앙회장 등 3명이 문제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3선개헌 지지 성명서를 발표한 배경을 이렇게 밝혀 놓았다.

"민족중흥과 조국 근대화의 작업이 과감하게 수행되고 있는 이때에 북괴의 전쟁도발 위협과 정국의 혼미를 피안(彼岸)의 불꽃으로만 바라볼 수 없어 결연히 국가민족을 위하여 또다시 의(義)로 뭉쳐 일어섰다."

이어 성명서는 5·16 군사쿠데타를 적극 옹호하며 3선개헌 지지를 선언했다. 4·19관련 주요단체들이 낸 성명서라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5·16 혁명 후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막강한 국방력의 배양으로 이제는 우방을 지원하면서 '세계로 뻗는 한국'으로 국위를 선양케 되었다. 이는 오로지 박 대통령의 탁월한 영도력과 의욕적이며 부단한 노력의 결정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장기집권으로부터 파행되는 독재의 타성을 배격키 위해 항거했던 우리로서는 3선개헌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반대해야 할 입장에 있으나 경제 사회 건설의 도약대에 막 올라서려는 이러한 중차대한 시기에 처하여 박 대통령에게 좀 더 이 나라를 계속 영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허용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심정이요 신념이다."

또한 성명서는 3선개헌 반대에 나선 학생들과 정치인들에게 '저항의 포기'를 요구했다. 이는 당시 박정희 정권측에서 내세운 주장과 똑같다. 

"우리가 봉기하고 일어섰던 4·19 의거 당시의 상황과 현실은 분명히 그 정치적 여건이나 사회 경제적 사정이 다르다. 어떻든 정치적 안정과 근대화는 진정코 조국 장래에 있어서 희망이요 또 시대적 요청이다. 한편 폭력과 파괴는 사회적 혼란만 초래하게 됨을 재인식해야 하며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이며 누구를 이롭게 하는 행동인가를 스스로 자성 자작하자!!"

다만 성명서는 "각 대학교에서 처벌을 받은 학생들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 것이며 이들이 다시 자율적인 학원에서 계속 공부를 하도록 선처해 달라"고 덧붙였다.

4·19관련 주요 단체들이 '3선개헌 지지' 성명서를 발표한 지 이틀 뒤에 4·19 유족회 이휘재 회장은 "지지 성명서는 날조되었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내놓았다.
 4·19관련 주요 단체들이 '3선개헌 지지' 성명서를 발표한 지 이틀 뒤에 4·19 유족회 이휘재 회장은 "지지 성명서는 날조되었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내놓았다.

4·19유족회장의 반박 성명 "3선개헌 지지 성명은 허위 날조"

이 성명서가 실린 지 며칠 뒤인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50분 공화당과 무소속 등 240명의 의원들이 모여 국회 제3별관 특별위원회 회의실에서 3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당시 3선개헌에 반대했던 신민당('신민회') 등 야당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중이었다.

3선개헌안에는 ▲대통령의 3선 연임 허용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결의 요건 강화 ▲국회의원의 장·차관 겸직 허용 등이 담겨 있다. 3선개헌안의 통과는 '유신체제'의 서막을 열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다.   

김영명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과)는 자신의 저서 <한국의 정치변동>에서 3선개헌안 통과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공화당의 삼선개헌 결정은 쿠데타 세력의 권력투쟁이 드디어 박정희 일인 지배체제로 귀결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는 이후 있을 유신헌법 선포의 중요한 전 단계였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4·19단체들의 '3선개헌 지지'를 '4·19민주혁명 186위 영혼 말살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4·19혁명 186위'란 지난 1960년 3·15마산의거와 4·19 당시 산화한 영령들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4·19혁명 정신에 반한 성명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3선개헌안이 날치기 통과되기 직전에 3선개헌 지지 성명서를 성토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1969년 9월 12일자 <동아>에 실린 이휘재 4·19유족회 회장의 '개헌 결사반대' 성명서가 그것이다. 이 회장은 이틀 전에 실린 3선개헌 지지 성명서에 이름이 올라 있던 인사다.  

"작금 도하 신문에 우리 4·19 유족회장 명의로 3선개헌을 지지하는 것 같은 성명서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발표된 사태에 대하여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그것은 허위날조임을 말씀드립니다. 자유당 전제주의 타도의 선봉에 나섰다가 피와 죽음을 당한 우리 유족들은 또다시 독재주의로 흐를 개연성이 농후한 3선개헌 지지할 만한 얼빠진 4·19 유족은 단 한사람도 없다."

이어 이 회장은 4·19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지지 성명이 나오게 된 배경과 관련 아주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즉 4·19단체들이 베트남에 가고 있는 틈을 타서 '누군가'에 의해 지지 성명이 신문 지면을 통해 발표됐다는 것.

"사실은 4·19 단체 간부들이 파월 국군위문단이란 명목하에 외유의 길에 월남으로 떠나는 최종후발대가 작일 즉 9월 10일 오전 11시 반 김포공항을 떠나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 서명서가 도하 신문에 발표된 것은 우리 유족들로서는 천추의 한이 되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휘재 회장은 "우리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하여 죽음을 택하지 못할망정 독재를 타도하는 선봉에 섰던 자식들의 피를 헛되게 팔 수는 없다"며 "우리 4·19 유족은 3선개헌을 결사코 반대함을 만천하에 떳떳하게 성명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50분께 '유신체제'의 서막을 알린 3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사진은 당시 3선개헌안 통과 사실을 보도한 <동아>.
 박정희 정권은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50분께 '유신체제'의 서막을 알린 3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사진은 당시 3선개헌안 통과 사실을 보도한 <동아>.

'중정 개입설' 제기... "지지 성명 발표 직전 외유중이었다"

이휘재 회장의 증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4·19단체들의 3선개헌 지지 성명서는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 등 집권세력은 대한반공연맹, 대한재향군인회 등 50여개의 사회단체들을 동원해 3선개헌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도록 압박한 바 있다.

그런 가운데 박정희 정권의 관제탑이었던 중앙정보부(중정)가 지지 성명서 발표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중정 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던 김형욱씨(실종)였다. 그는 1963년 7월부터 3선개헌안이 통과된 직후인 1969년 10월까지 중정 부장으로 재직했다.

이와 관련, 3선개헌안 지지 성명서가 발표되기 직전 4·19단체 간부 등이 정부 주도로 해외에 나가 있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4·19중앙회 회원이었던 정원창씨(전 4·19민주혁명 공로자회 회장)는 "4·19단체 회원들이 69년엔가 주월사령부 창립기념일을 기해 파월 장병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베트남에 갔다"며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증언했다.

"급하게 마련된 행사 같았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갔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 아니나 다를까 박정희의 3선개헌을 지지한다는 성명서가 3개 단체장 이름으로 났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첫 기착지가 대만이었다. 당시 주대만 대사는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 장군이었는데 그의 보좌관이 내 친구였다. 그 친구에게 부탁해 <동아일보>를 봤는데 진짜 지지성명서가 대문짝하게 났더라.

이거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그 친구에게 UPI 통신사를 안내해 달라고 했다. 대만 지리도 모르고 영어도 모르니까 부탁한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나한테 잠시 있으라고 하고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월남 갔을 때 중정 요원이 따라 왔는데 그 사람에게 얘기한 것 같다. 결국 통신사에 못갔다. 나중에 우리 대표한테 '이따위 짓 하려고 베트남 가자고 했느냐'고 따졌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모의사건으로 투옥됐던 정대근 현 4·19 정신선양특위 기획연구실장은 "당시 (사회단체들에 대한) 중정의 관여가 심했다"며 "단체를 움직였던 몇몇 사람들이 중정의 압력 때문에 지지 성명서를 냈다"고 주장했다.

"당시 (사회)단체들은 맘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중정의 감시 아래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군사원호법인가를 통해 우리 같은 단체들을 제도권에 집어 넣었다. 주변관리를 중정에서 했는데 압력이나 회유를 많이 받았다. 4·19단체를 담당하는 중정 직원이 있어 동태 파악을 해갔다. 그리고 정치적 문제가 있으면 성명서를 내라고 협박했다. 

회원들은 (일부 간부들이) 월남에 가는 것을 전혀 몰랐다. 중정에서 몇몇 집행부 인사들이 월남으로 데려가 버렸다. 그리고 (국내에) 남겨진 사람들은 산발적으로 3선개헌 반대운동을 했다. 4·19단체가 3선개헌 지지 성명서를 낸 것은 아주 유감스럽고 치욕스러운 사건이다. 다만 광고비는 4·19단체에서 나간 게 아니라 중정에서 돈을 대서 광고한 것이다."

4·19 공로자회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김기일씨도 "중정이 짜놓은 각본에 의해 춤추고 장구치고 한 사건"이라며 "지지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회장들에게 물어봤더니 '중정이 우리와 의논도 하지 않고 사전에 (성명서를) 만들어놓고 (광고로) 나왔다, 나는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4·19혁명 당시 산화해간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4·19민주묘지' 모습.
 4·19혁명 당시 산화해간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4·19민주묘지' 모습.
ⓒ 국립4·19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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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4·19단체들의 일부 간부들이 자신들의 출세를 위해 정권과 결탁해 회원들의 추인을 받지 않고 지지 성명서를 발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원창씨는 "중정 쪽의 공작이 있었을 것이고 단체 간부들과 정권이 교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며 "정권에는 4·19단체의 지지 성명이 좋은 명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기일씨도 "당시 박정희 정권은 신사적이었던 4·19단체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며 일부 간부들은 줄대기를 하는 등 권력과 결탁돼 있었다"고 지적했다.


태그:#4·19혁명, #3선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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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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