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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에서 문학·출판 담당기자로 일해온 허연(42)을 아주 가끔 만나곤 했다. 주로 문학기자를 대상으로 하는 간담회나 문인들의 행사장이었다. 해사한 얼굴에 긴 손가락을 가진 그는 '독특한' 기자였다.

 

목소리 톤은 한없이 낮았고, 쉬이 웃거나 찡그리지 않았으며, 가끔씩 흐려지던 눈망울은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의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가 1991년 등단해 <불온한 검은 피>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야 허연의 침잠과 우수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했다.

 

속화된 자본주의가 득세한 21세기 한국. 통속한 '기자'이면서 탈속을 지향하는 '시인'의 역할까지 해야한다는 것은 얼마만한 고통과 번뇌를 배후에 깔아야 가능한 것일까. 굳이 묻지 않아도 세상으로부터 허연이 받았으며, 받고 있고, 앞으로도 받아야 할 상처의 깊이가 짐작 가능하다.

 

바로 그 허연 기자, 아니 시인 허연이 책을 냈다. 문학·출판 담당기자를 하며 접한 수많은 책들 중 그의 마음을 움직인 백수십 권을 선별해 감상을 남긴 것이다. 제목은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해냄). '책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한 사내의 이야기'쯤으로 불러도 좋겠다.

 

조금은 생경한 단어 '비블리오필리'(bibliophily)는 '책에 독립된 성격을 부여해 이를 감상하고 수집하는 취미'를 지칭한다. 저자 서문엔 허연이 '책에 독립된 성격을 부여'하고 책 속에서 길을 찾는 사람이 된 이유가 적혀 있다.

 

"10대 후반 무렵 나는 앞길이 캄캄했다. 난 이른바 모범생이 아니었다. 자율학습 시간에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학교 근처 정독도서관에 가서 소설책을 읽는 게 더 행복했다. 당연히 앞날은 어두웠다. 고등학교 3학년 겨울 집안에 처박혀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판권 발간연도가 소화 몇 년으로 표기된 부모님의 책들까지 모조리 읽었다. 그때 아주 놀라운 깨달음이 다가왔다. 세상이 두려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책이 준 힘이었다."

 

미래라는 단어에 짓눌렸다는 불안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에 시달리던 혼란스런 10대를 '독서'를 통해 극복해낸 허연의 '책 편력'은 이후 20년을 넘게 이어졌고, 지금도 여전하다. 그런 까닭에 그의 독서체험을 모아놓은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는 '양서 소개'인 동시에 시인 허연의 '자기고백'으로도 읽힌다.

 

기사의 틀을 넘어 명료한 문장으로 전하는 의미 있는 메시지

 

<공산당선언>과 <유교 아시아의 힘>에서부터 <목수 아버지>와 <단순한 열정>까지. 허연이 소개하는 166권의 책은 그 프리즘이 넓다. 특정 장르와 저자에 구애됨이 없이 그야말로 '자유롭게' 책을 골라 주관적으로 감상하고 분석하는 그의 글쓰기는 꽉 짜여진 틀 속에서 생산되는 기사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다. 여기에 더해 명료하고도 적확한 허연 특유의 '문장'과 웅숭깊은 세계인식을 맛보는 재미는 또 어떤가. 예컨대 이런 것이다.

 

'아나키즘을 이루지 못할 꿈 정도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꿈이라 부르지 마라. 세상에 꿈이 아닌 사상이 있었던가. 왕조 시대에 공화제를 꿈꾼 것도 당시로서는 꿈이었다.'(위의 책 16페이지)

 

'낚시에서 고기를 잡고 못 잡고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내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흐르는 물을 잠자코 지켜봤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위의 책 125페이지)

 

'독살 사건은 유난히 권력이나 사랑 때문에 많이 발생했다. 권력이나 사랑은 잘못하면 독(毒)이 되는 모양이다.'(위의 책 236페이지)

 

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고, "책이 있어 세상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른 저자는 헤럴드 블룸을 인용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세상을 향해 이런 말을 들려준다.

 

"독서는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세속적 초월이다."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를 접한 소설가 조정래는 "기사든 산문이든 시든 그의 글에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며 그 매력이란 다름 아닌 "예리함과 고집, 인간에 대한 애정, 선비 기질"이라고 상찬했다.

 

부록으로 묶인 '독서 방법'과 '본문 안의 책들' '더 읽을 만한 책들'은 친절하기까지 한 허연이 독자들에게 선물한 '책읽기를 위한 항해도'다.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 - 인생의 답을 책에서 구하다

허연 지음, 해냄(2008)


태그:#허연, #비블리오필리,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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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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