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거스트 러쉬>에서 어거스트(프레디 하이모어)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다. 남들이 소음으로 여기는 소리에서 나름의 질서를 찾아낸다. 여기에서 질서는 음악적 질서를 말한다.

 

나뭇가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튀어오르는 공 소리는 물론 지나가는 차 소리에서 음악을 이끌어낸다. 줄리아드 음대의 교수가 "어떻게 음악이 네게 오니?"라고 묻는다. 이때 어거스트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그냥 들려요, 가끔은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길을 걸을 때도 마치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음악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우리는 그냥 듣기만 하면 된다.”

 

영화 <카핑 베토벤>에 등장하는 베토벤(애드 헤리스)도 다른 이들이 무심히 넘겨버리는 소리들을 인식하고 음악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음악은 자연의 소리 이전에 신의 소리라고 여긴다.

 

“내 머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어”, “신은 나를 음악으로 가득 채웠어.”

 

마침내 그는 자신이 귀가 안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속삭이지만, 신은 내게 고함을 치니 내 귀가 먼 거야.”

 

베토벤은 작곡가를 신의 소명을 받은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예컨대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은 이렇게 외친다.

 

“음악은 신의 언어야. 공기의 떨림은 인간의 영혼에 속삭이는 신의 숨결이지. 우리 음악가들은 최대한 가까이서 신의 음성을 듣고, 신의 입술을 읽지. 신을 찬양하는 신의 자녀들을 낳고. 그게 음악가란 존재야. 그게 아니라면 우린 아무것도 아니야. ”음악은 우리 곁에 있다. 우린 그저 듣기만 하면 된다.”

 

신의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난 어거스트의 시각에서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리 곁의 음악 그 자체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일반인들은 직접 그것을 듣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베토벤은 청각장애인이면서 청각장애인이 아니고, 일반인들은 청각장애인이 아니면서 청각장애인이다.

 

자연의 소리이건, 신의 소리이건 작곡가는 일반인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존재다. 영혼과 조우하는 영매가 있듯이 자연의 소리 혹은 신의 소리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자신의 음악 자체보다는 들을 수 없는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의미에서 작곡가와 아울러 연주자는 그 소명이 있을 것이다.

 

영화 <어거스트 러쉬>에서 작곡가와 연주자의 피날레 협연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지 모른다. 밴드 싱어이며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와 첼리스트인 라일라(레리 러셀)의 사랑이 있었기에 어거스트가 존재할 수 있었고, 고통과 아픔이 있었기에 세상의 음악을 더 잘 들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베토벤을 베토벤이게 한 것은 인간이 지닌 신과의 고뇌, 그것을 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음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항상 움직이는 것이다.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을 카피하는 음대생 안나에게 “음악은 고정되어 있는 다리가 아니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야!”라고 말한다. 안나의 작품에 대해서도 “나를 카피하고 있군. 제 2의 베토벤은 필요 없어. 구조에 얽매여선 안돼.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고!”하며 호통친다.

 

한국 대중가요계에 끊임없이 표절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FT아일랜드, 이민우, 아이비, 박진영, 그리고 최근에는 빅뱅 등에 이르렀다. 대개 혐의(?)는 이른바 음악 선진국 혹은 유명한 노래에서 차용하는 것이다.

 

차용만을 하는 작곡가 혹은 음악인 그들에게 신과 자연은 미국이나 일본의 음악일 것이다. 이럴 때 신의 소리나 자연의 소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메신저는 아니다.

 

대중음악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만들어진 음악이 아니며 신의 소리나 자연의 소리와 아울러 사람의 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무수한 대중들과 호흡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국내의 음악인들이 이땅의 사람에게 귀기울이지 않고 외국의 수많은 장르의 음악을 무분별하게 들여오는데 급급하다. 가요계의 불황은 이런 면과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가요계의 불황의 원인을 매체의 다변화에서만 찾지 않는다면 지향해야 할 음악가의 이상향을 논한다고 너무 영화적인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안에 실린 글입니다.

2008.01.10 15:40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데일리안에 실린 글입니다.
어거스트 러쉬 카핑 베토벤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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