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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는 가난과 서글픔, 아련함이 담긴 추억이다
 보리는 가난과 서글픔, 아련함이 담긴 추억이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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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에 아주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특별한 선물이라고 하니 거창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선물로 받은 것은 소주 6병이다. 양주나 와인이라면 몰라도 소주를 선물로도 주고받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선물로 받은 소주는 선물로 받기에 충분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조웅래 선양소주 회장이 보낸 선물이라고 하며 가져온 비닐 백을 건네주었다. 백에 든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소주 두 병씩이 포장된 상자가 3개 들어 있었다.

선물로 받은 소주는 지금껏 보아왔던 여느 소주들과는 달리 '보리'로 만든 소주라고 되어 있고, 소주 이름도 ‘보리소주 맥’으로 되어 있었다.

조웅래 회장과는 2번을 만난 적이 있다. 2번 다 대전의 동쪽 산, 대전시 대덕구 소재 계족산에서 치러진 맨발마라톤대회에서 주최자와 구경 겸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찾아간 시민기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만난 적이 있다기보다는 봤다는 표현이 적절할 거다.

계족산 맨발마라톤에서 주최자와 시민기자의 입장에서 2번 본적이 있는 (주)선양의 조웅래 회장
 계족산 맨발마라톤에서 주최자와 시민기자의 입장에서 2번 본적이 있는 (주)선양의 조웅래 회장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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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가져온 사람이 (주)선양에서 새로 출시하게 된 ‘보리소주 맥’에 대하여 몇몇 가지를 설명했지만 6년 가까이 손에 술잔을 잡고 있지 않다 보니 애주가였을 때처럼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고 하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하늘에서 툭 떨어지듯이 예고도 없이 주어진 선물, 당장은 마실 일이 없는 소주 이름에 들어간 ‘보리’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며 이렇듯 따뜻한 가슴으로 한 꼭지의 글을 쓰게 한다.

머리로 생각하는 보리, 가슴으로 추억하는 보리

중년의 나이를 넘은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보리’라는 단어는 가난과 배고픔은 물론 아련한 연애감정과 추억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일지언정 ‘보리’라는 단어는 출가한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수행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보리로 만든 보리소주를 보며 ‘향에 반하고, 맛에 당긴다’고 써진 포장지의 필자는 보리에 담긴 향수와 아련한 추억이 향보다도 맛보다도 가슴을 행복하게 했다.
 보리로 만든 보리소주를 보며 ‘향에 반하고, 맛에 당긴다’고 써진 포장지의 필자는 보리에 담긴 향수와 아련한 추억이 향보다도 맛보다도 가슴을 행복하게 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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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야 일부러 남녘땅으로라도 찾아가야 볼 수 있는 게 보리밭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보리밭은 마을주변에 지천이었다. 얼었던 땅이 녹을 때쯤이면 들뜬 보리의 뿌리가 땅에 닿도록 부풀어 오른 보리밭을 밟으러 다니는 게 지겨워 도망을 다녀야 할 만큼 많았던 게 보리밭이다.

차가운 겨울에도 푸른 빛을 머금으며 자란 보리는 보리가 견뎌낸 차가운 겨울만큼이나 춥고 서러운 사람들, 보릿고개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먹을 것조차 모자라고 궁핍했던 곤궁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늦봄부터 가을까지를 연명하게 해 주던 양식이었다.

겨울을 이기고 자란 보리는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봄이면 누렇게 익어갔다. 보리가 여물어 수염이 까슬까슬해지기 전까지의 보리밭, 언덕배기나 동구 밖에 있는 보리밭은 가난한 사람들이 넘어야 할 보릿고개의 곡간이기도 했지만 피 뜨거운 연인들이 만나는 밀애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끼닛거리를 걱정해야 할만큼 빈곤할 살림일지언정 청춘남녀가 만나 치른 한바탕의 뜨거운 흔적으로 잘 자란 보리가 멍석 자락만큼 뭉그러져 있어도 사랑이 익어간 징표려니 하며 못 본체 눈감아 넘기던 게 보리밭 인심이었다. 

러브호텔이라는 게 우후죽순처럼 방방곡곡에 들어서고 있을 때, 대개의 어른들이 러브호텔은 세상이라도 말아먹을 몹쓸 퇴폐한 곳이라고 한탄하고 있을 때, 러브호텔은 사라진 물레방앗간이나 보기 힘들어진 보리밭을 대신하는 현대판 물레방앗간이고 보리밭이라는 말을 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있다.

급속한 산업화로 생태계가 파괴되듯 사라지고 없어진 그곳, 인류가 존재하는 한 있을 수밖에 없는 뜨거운 몸짓, 애틋하지만 은밀할 수밖에 없는 청춘을 나눌 수 있도록 눈가림이 되어주고, 이부자리가 되어주던 물레방앗간이 사라지고 보리밭이 드물어지니 그 역할을 대신하는 순기능적 측면도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걸 들었던 기억 때문인지 즐비한 모텔을 보면 물레방앗간과 보리밭이 연상되었다.
 
보리밭은 청춘남녀들이 만나던 사랑의 공간이기도 했다.
 보리밭은 청춘남녀들이 만나던 사랑의 공간이기도 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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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 생각하는 보리는 가난과 서글픔이지만 가슴으로 추억하는 보리는 아련함과 풋풋함이다.

수행자가 가꿔가는 보리밭

인연이 있는 비구니스님이 운영하는 카페에 몇 번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카페에 처음 들어갔을 때 속물적 사고의 한계를 느끼게 했던 것도 바로 보리라는 단어가 들어간 ‘보리밭’ 코너였다.

적지 않은 세속인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단정하지만 젊고 예쁘장한 비구니스님을 보게 되면 수도자로서의 숭고함보다는 ‘사연’을 먼저 떠올리는 게 나의 속물일 수밖에 없는 한계다. 어슴푸레하게나마 일말의 ‘사연’을 떠올리게 하는 비구니 스님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보리밭’이라는 코너를 발견하는 순간 상상력은 온통 연분홍빛이었다.

어떤 애틋한 과거(?)가 있지?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 사랑이 얼마나 절절했으면 이렇듯 수행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때를 추억할까? 보리밭으로 간직한 그 사랑 때문에 속세를 등지고 수행자의 삶을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식으로 별별 생각들이 분홍빛 연상을 그려나갔다.

개 눈에는 똥만 띤다더니 오욕칠정에 찌든 눈에는 그 숭고한 보리(菩提)마저도 찰나일지언정 영화에서 보았던 그 장면, 푸른색 보리가 흔들거리는 보리밭에서 벌어지던 내밀한 모습과 뜨거움이 전제된 사연을 상상하고 있었던 거다.

머리로 생각하는 보리는 가난과 서글픔이지만 가슴으로 추억하는 보리는 아련함과 풋풋함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보리는 가난과 서글픔이지만 가슴으로 추억하는 보리는 아련함과 풋풋함이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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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는 기분으로 숨소리까지 죽이며 클릭하고 들어간 스님의 ‘보리밭’은 소곤거림이 맴돌고, 뜨거움이 나뒹구는 그런 보리밭이 아니라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 널리 중생을 교화하려는 마음’을 나타내는 보리심(菩提心)을 키우기 위해 수행과정에서 생긴 일들을 엮어나가는 탁마(琢磨)의 공간이었다.

보리에 추억과 가슴이 취하다

뚜껑도 열지 않는 술이지만 ‘보리’라는 말에 며칠째 취해 지낸다. 뚜껑을 열어 술잔을 채우고, 술잔을 기울여 목구멍으로 보리소주를 넘기는 순간 부르르 하고 몸을 떨 만큼 짜르르한 쾌감을 느끼며 ‘향에 반하고, 맛에 당긴다’고 써진 포장지의 글귀처럼 향에 반하고 맛이 당길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술을 마시지 않는 나에겐 보리에 담긴 향수와 아련한 추억이 향보다도 맛보다도 가슴을 행복하게 한다.

보릿고개를 넘겨주던 보리, 청춘의 남녀가 질펀하게 몸부림을 할 수 있는 은밀한 그들만의 공간을 제공해 주던 보리밭을 대신해 앞에 놓인 보리소주를 마음으로 마시니 이 또한 가슴을 취하게 하니 술주정을 하듯 마음주정을 해본다.

푸른빛으로 엄동설한을 넘기고 있을 보리밭이라도 찾아 추억도 더듬고 가슴도 한번쯤은 챙겨야 겠다.


태그:#보리, #보리소주, #맥, #보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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