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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은 삼키듯 먹어야 한다. 매끄러운 우동의 면발은 씹거나 맛을 충분히 느끼는 과정을 생략하고 두어 번 우물거려 위장까지 급격히 투하해야 제 맛이다. 특히 기차여행 가운데 먹는 우동은 정말 별미다. 그릇에 그득했던 면발이 사라지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몇 차례의 젓가락질로 면발을 삼킨 다음 그릇을 집어 들고 국물을 들이켜기까지의 과정은 채 5분도 필요하지 않다.

 

그릇이 완전히 빈 다음에야 비로소 다 먹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우동은 간결하게 포만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음식이다. 게다가 기다리는데도 별로 시간을 끌지 않는다. 미리 준비한 국물에 면발을 넣어 끓이고는 유부와 송송 썬 파를 띄워 내면 그것으로 끝이다. 반찬이래야 고작 단무지 몇 조각이면 충분하니 생산자와 소비자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패스트푸드의 제왕으로 결격사유가 없다.

 

무협지를 읽는 것은 우동을 먹는 것과 흡사하다. 침침한 분위기와 조악한 소파가 놓인 비좁은 만화가게에서 무협지를 읽는 것은 서민적인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는 것과 흡사하다. 포장마차가 식당에 비해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유일한 메뉴가 우동인 것처럼 무협지는 만화가게에서 읽어야 제 맛이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무서운 무공이 출현하여 처참한 형태의 죽음이 무수히 양산되거나, 주인공이 위기에 빠지는 장면에서는 절세의 경공을 펼치기라도 한 것처럼 페이지가 휙휙 넘어간다.

 

정독과는 동떨어진 모습으로 무협지에 몰입하는 모습은 맛을 느낄 사이도 없이 우동을 후루룩 삼키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우동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대동소이한 것처럼 무협지에서 주인공의 설정과 사건전개와 위기, 결말의 모든 과정은 서로가 커닝이라도 하였는지 거의 판에 박은 것만 같다. 심하게 말하면 제목과 저자만 다를 뿐이다. 그것은 비슷한 맛의 우동을 파는 식당 간판이 다른 것에 대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접했던 문학을 통틀어 무협지처럼 강하게 흡인하는 것은 없었다. 가는 곳마다 미스코리아 급의 미녀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고 위기에 빠지는 것은 기연을 얻기 위한 장치인데다, 결국 사악한 세력을 일소하고 무림을 제패하는 빤하고 상투적인 것이 왜 그렇게 빨아들이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첫 페이지를 펴게 되면 밤을 새워 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몰래 무협지를 보다가 들켜 혼찌검을 당하고도 매 자국이 지워지기도 전에 다시 꺼내는 것을 보노라면 거의 마약 수준의 중독성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비슷한 레벨에 있는 것을 꼽으라면 흔히 '빨간책'으로 통용되던 포르노 잡지나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통속 소설을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빨간책은 무협지처럼 흔하게 구할 수 없는데다 두어 번 보고 나면 흥미를 잃게 되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무협지에서도 성행위를 리얼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무협지의 아성은 심각하게 도전받지 않았다. 나이가 든 계층이 무협지를 어린 시절의 주요한 아이콘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리 무리가 아니다.

 

무협지가 예전의 지위를 잃은 지 오래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것의 영향권 내에 있다. 어줍지도 않게 작가가 된 다음부터 블랙홀 같은 무협지의 흡인력에 더욱 끌린다. 적어도 3년 이상의 내공을 들인 나의 소설들은 한 달이면 열권을 써내고도 남을 것 같은 무협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래가지고는 고금 제일의 절세고수가 되어 강호 무림을 평정하기는커녕, 주인공의 칼날 아래 처참하게 죽어가는 무수한 무명소졸의 대열에 합류할 게 뻔하다.

 

물론 그렇게 죽고 싶지 않다. 죽지 않으려면 실력을 길러야만 한다. 내가 서식하는 바닥은 오직 실력만 통한다. 실력 이상으로 뜨는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분위기에 편승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고수가 아니라 사기꾼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나를 포함한 모든 작가들에게 기연(奇緣)은 나타나지 않는다.

 

강적에게 일장을 맞고 절벽으로 추락하는 주인공을 구해주는 나뭇가지도 없으며 그 위치에 입을 벌리고 있어야 할 동굴도 없다. 동굴이 없으니 그곳에 유폐되어 내공을 전해줄 기인(奇人)도 없으며 옵션으로 따라올 만년산삼 같은 영약이나 가공할 비급도 없다. 여기서의 추락은 사전적 의미에 충실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낙차를 함유하고 있다. 

 

추락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청운의 뜻을 품고 강호에 출도한지 이제 겨우 4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흡성대법에 제압당해 급격히 고갈되는 내공처럼 잔고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지만 어차피 충분히 각오하지 않았던가, 다시 무기를 잡았다. 우동을 곁들인 포장마차의 소주 한병을 비우면서 종횡강호의 큰 뜻을 예리하게 갈았다. 기연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다.

 

*김용 원작의 영화 동방불패에 나오는 기이한 무공, 상대방의 내공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 수법인데, 연성하기 어려운 내공을 빠르게 축적할 수 있으나 그것을 빼앗긴 자들을 폐인으로 만드는 사악한 무공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인터넷한겨레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에세이 , #흡성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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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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